1945년 12월 31일
12월 10일에 아처 러치 소장을 조선 군정장관에 임명한다는 미국 육군성의 발표가 있었고 러치 소장은 16일에 취임을 위해 입국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난 연말까지도 제7사단장인 아놀드 소장이 그대로 군정장관 역할을 겸임하고 있었다. 교체 발표 직후인 11일 하지 사령관의 이례적인 담화가 있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그 자리를 사임하게 되고 후임으로 육군군정학교장 러취 소장이 임명되었다는 미육군성 발표가 11日附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하지 중장은 11일 아침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어제 밤인가 그저께인가 워싱턴의 방송을 듣고 조선의 군정장관 러취 소장이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놀드 소장은 전쟁 초부터 지금까지 제7사단장을 지내왔을 뿐 그 외에 다른 자격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자 곧 군정장관의 직무를 갖게 된 것인데 第24師兵團의 최고지휘관인 나로서 새로 군정장관의 적임자가 나설 때까지 그 동안만 일을 보아 달라는 약속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놀드 소장은 임시 군정장관의 자리에 임명되고 지금까지 그 직무를 이행하여 온 터이다.
후임 군정장관으로서 적임자를 오랜 시일을 두고 물색하여 오던 바 이번에야 러취 소장이 새로이 오게 된 것인데 러취 소장이 불원간 온다고 하더라도 당분간은 사무인계가 완료될 때까지 아놀드 소장은 그대로 군정장관으로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분 사이에 사무인계가 완료되면 아놀드 소장은 제7사단으로서 즉 경기도에 인접한 4도의 사단장으로서 그대로 있게 되는 것이다.
아놀드 소장은 第24師兵團에 있어서 나 다음가는 분으로 내가 자리를 비울 때는 언제든지 나 대신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러취 소장이 새로 부임하게 된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다만 조선 주둔군에 행정장관을 새로 맞이한다는 그것뿐이다. 아놀드 소장의 지위와 세력은 조금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신문> 1945년 12월 1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군정장관 교체 사실을 방송을 듣고 알았다는 첫 마디에서 불만이 느껴진다. "사령관인 내게 의논도 없이 교체를 결정하다니!"
당분간 사무인계가 완료될 때까지 아놀드가 군정장관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말에서는 몽니가 느껴진다. 임시로 겸직을 하던 자리에 새 사람이 임명되었다면 겸직하던 사람을 원직으로 돌려보내 놓고 사무인계를 하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주둔군 사령관의 재량권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기 사람이 아닌 러치를 물 먹이겠다는 속셈이 보인다.
담화 끝에서는 아놀드가 군정장관 아니더라도 주둔군의 제2인자임을 강조하고 그에 대비해서 러치의 부임은 "행정장관을 새로 맞이한다는 그것뿐"이라고 깎아내린다. 참 유치하다.
육군성에서 군정장관 교체를 결정한 이유가 밝혀져 있지는 않아도 10월 30일 기자 회견에서 아놀드의 이 발언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
"극동국장 빈센트 씨의 말은 단지 개인의 의사에 지나지 않는 줄 믿는다. 그분의 말이 미국 정부의 방침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소식은 묵살해야 할 것이다."
미 국무성 빈센트 극동국장이 한국의 신탁 통치 방침을 밝힌 10월 20일 발언 얘기다. 이것이 미국의 공식 정책인지 여부를 현지 군정장관이 모르고 있었다고도 생각하기 힘들거니와, 만일 모르고 있었다면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국무성 담당자의 발언을 확인도 않은 채로 미국 정부의 방침이 아니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행동이었다.
바로 다음날 하지 자신도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기자들에게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송진우를 불러 이야기를 하고 한국인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송진우가 기자들에게 전한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신탁 통치를 운운하나 이것은 극동부장 1개인의 의견이요. 그 사람이 조선 정치를 좌우할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사람이 결속하여 독립할 만한 힘을 배우면 이제라도 나는 독립을 승인하겠다."
보도된 뒤에 하지의 항의가 없었으니 송진우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 없다. 하지는 아놀드와 같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미국 정책을 놓고 한국인을 기만하는 행위에 대한 공식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송진우의 입을 빌린 것이었다. 빈센트가 "조선 정치를 좌우할 지위"에 있지 않다면 하지 자신이 그런 지위에 있다는 말인가? 자기 말만 잘 들으면 "이제라도 나는 독립을 승인하겠다"고까지 하지 않는가. 독립을 승인하고 말고를 군정 사령관 마음대로 하겠다니, 육군성에 알려지고 확인되었다면 도저히 그 자리에 놓아둘 수 없는 발언이었다.
국무성의 신탁 통치 방침을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정하는 것이 하지와 아놀드의 입장이었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했을까? 뭘 믿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의 직속상관 맥아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둔군 사령관이든 군정장관이든 미국 정책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상급 책임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맥아더의 의중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치하거나 사주한 것이 분명하다.
10월 13~14일 맥아더, 애치슨, 하지, 이승만의 도쿄 회합을 기점으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기존 정책인 다변주의 노선의 신탁 통치안을 번복하려는 조직적 음모가 있었다고 보는 관점을 정병준의 연구를 (<우남 이승만 연구>, 440~453, 474~508쪽)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 음모의 일차적 초점은 모스크바 외상 회담에 영향을 끼치는 데 있었다.
육군성의 군정장관 교체는 모스크바 회담을 앞두고 부적격자가 확실한 아놀드가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못하게 하고, 그에 동조해 온 정황이 뚜렷한 하지에게도 경고를 보내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의 12월 11일 담화문은 그에 불복하는 의지를 밝힌 것이었다. 모스크바 회담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초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감시할 수 있는 자리에 러치를 앉힐 수가 없었다.
12월 29일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밝혀지자 하지와 아놀드는 대응에 바빴다. 아놀드가 10시 반에 기자 회견을 가졌고 12시에 임정 엄항섭 선전부장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는 12시에 주요 정당 지도자들을 만나고 4시 반에 기자 회견을 열었다. 하지의 4시 반 기자 회견을 상황에 대한 미군정의 공식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정식공보에 의하면 앞으로 조선의 통일된 임시정부가 민의에 맞는 정치를 원하는 데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타진하여 4개국의 승인 아래 독립 국가가 되도록 연합국이 원조하는 것이라고 하지 중장은 29일 하오 4시 반 신문 기자단에게 신탁 통치의 반대에 고조된 조선민중의 양해를 구하였다.
"금일 하오 1시 15분에야 공보를 접하여 3국 외상 회의의 조선에 관한 내용을 알았다. 나는 원래부터 신탁 통치란 말에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조선 동포들의 심정을 잘 알며 나도 그러한 의미의 신탁 통치는 여러분들과 동일히 싫어한다. 그러나 이번 신탁 통치란 다만 원조 협조의 뜻이다.
1) 앞으로 2주일 이내에 미소 대표가 협조하여 38도선의 장벽을 철폐하고
2)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 조선의 민주주의 정부의 구체안을 4개국에 제출하는 일을 하여 자주 독립을 원조할 것이다.
따라서 외국 무역, 통화 문제, 운수 문제를 해결하는데 노력할 것이다. 이 위원회는 자주독립을 원조하는 것이지 조금도 독립에 지장을 가져오려고는 하지 않는다. 남북 조선에 통일된 민주 정권이 수립되어 (略) 조선 독립을 하는데 있어서 제일 좋은 방법이며 건전한 또 항구한 독립이라고 믿으며 이 수단 방법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얻으면 열국 간에 평등한 국가가 될 것이다. 여섯째로 이 코뮤니케의 조건을 보면 조선 애국자로써 하등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問) 통치권은 누가 갖는가?
(答) 조선 정부가 통치한다.
(問) 국제적 외교는?
(答) 그것은 너무 상세한 일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問) 행정권을 준다면 미소 양국 군대는 언제 철퇴하는가?
(答) 조선의 치안과 국방군을 편성하기 위함이므로 필요 없으면 돌아간다. 그리고 극소수가 이에 응할 것으로 이는 미소가 타협 후 결정할 것이다.
(問) 지난 20일 미 극동부장이 조선의 신탁 관리를 말했었는데 결국 미국에서 주장한 것이 아닌가?
(答) 그 후의 조선에 대한 정세는 퍽 달라졌을 줄로 안다. 나와 나의 통솔 하에 있는 장병은 속히 조선이 독립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탁 통치에 대한 불평으로 폭동이 일어나면 연합각국에 좋지 못한 인상을 줄 것이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하지와 아놀드가 여러 자리에서 말한 것을 종합하면, 자기네도 신탁 통치 반대에 개인적으로 공감한다는 것, 그러나 신탁 통치에도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는데, 이번에 결정한 신탁 통치는 좋은 것이니 받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어차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려면 자기네 말 잘 듣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점령군 책임자로서 원론에 입각한 입장이다.
30일 12시 반에 아놀드가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 사실은 보도되었지만(<중앙신문> 1946년 1월 1일자), 이야기 내용은 공표되지 않았다. 31일에 이승만은 두 건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오전에 전단으로 뿌린 것은 "3000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연말 담화문으로 미리 준비했던 것 같다. "우리는 각기 자기의 직분을 다하자!" "우리는 생산에 노력하자!" "우리는 일치단결하자!" 등 원론적이고 일반적인 내용이 담겨 있고, 임정을 앞세우자는 호소로 끝을 맺었다.
"동포여! 끝으로 이르노니 海外絶域에서 30년간 우리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갖은 고통을 겪으며 고군분투한 우리 임시정부 주석 金九 선생 이하가 그 피의 역사를 지고 개선하였다. 우리에게 자주독립이란 이 지상명령을 위하여 명령을 내릴 사령부가 왔다. 절박한 이 시기에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3000만 동포여!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어 엄숙한 태도로 우리 정부에 마음껏 감사하며 목적달성을 위하여 命令一下 총진군을 개시하자. 이 정부 이 명령에 私利私說로 주저 이반하는 자는 민족적 대역이다. 일어나라. 3000 형제자매여!"
그리고 기자 회견에서 짧은 담화문 하나를 또 내놓았다. 그 전날 아놀드와의 교감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담화문인 듯하다. 특히 (4)항에서 미군정에 대한 태도를 밝힌 것이 주목된다. 임정을 과격 노선으로 유도해 놓고도 미군정에 협조적인 자기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12월 31일 敦岩莊 기자정례회견석상에서 李承晩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 금번 시위 운동 하는 것은 오직 독립 완성에 있을 뿐이나 신탁이나 다른 통치라는 명칭으로 우리 국권에 손해되는 것은 결코 拱手傍觀할 수 없는 것이다.
2) 이 결심을 세계에 표명할 결의로 전국 동포는 1시에 일어나서 우리의 원하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시위 운동을 시작하는 것인데 이것을 누구나 불가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격렬분자와 파괴주의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亂國을 만들어서 전부를 실패케 함이라 시위 운동에 참가케 하는 모든 남녀 동포들은 조심하여 남의 계획에 빠지지 말기를 바라며,
3) 모든 단체나 개인은 자유 행동을 취하지 말고 안녕질서에 저촉됨이 없을 것이니 이런 사람이나 단체가 있거든 결코 합작을 불허할 것이다.
4) 미국 정부에 대하여 결코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軍力을 두려워하거나 또 친미주의를 위함이 아니라 다만 미국군 정부가 우리를 해방한 은인이요 군정부 당국은 절대 독립을 찬성하는 고로 신탁 문제 발생이후 자기 정부에 대하여 반박과 공격의 공문을 보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독립의 친우를 모르고 원수로 대우하면 이는 도리어 독립을 저해하는 것이다." (略) (<동아일보> 1946년 1월 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1일 아침에는 경찰관 대표들이 경교장을 찾아가 "금후 전 경찰관이 임시정부의 지령 밑에서 민중의 치안 확보에 중임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바 임시정부로서도 전 경찰관이 국민총동원위원회의 지시 아래 그 중대한 임무를 다할 것을 거듭 부탁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2일자) 임정은 미군정과의 정면 대결을 위해 친일 성향의 경찰 집단을 끌어안기로 한 것이다.
국민에 대한 국가의 명령 성격을 가진 '국자(國字)'로 임정이 포문을 열었다.
신탁 통치에 대한 불합작 단행을 표명한 임정 내무부에서는 지난 달 31일 각시정기관의 자주 운영의 일환으로서 치안 及 기타 관계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방침을 결정 발표하였다.
國字 第1號
1) 현재 전국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관 及 한인 직원은 전부 本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 반대의 시위 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 행위와 파괴 행위는 절대 금지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 기관 등의 확보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 불량상인의 폭리매점 등은 엄중 취체함.
國字 第2號 요지
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要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동아일보> 1946년 1월 2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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