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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추억>·<황홀한 사춘기>…침대 밑 '빨간책'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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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추억>·<황홀한 사춘기>…침대 밑 '빨간책'의 추억

[親Book] '침대 밑 서재' vs '독서 교육 지원 시스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에서 책을 사기 때문에 작은 서점을 찾기 어렵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동네 책방이 많았다. 내가 살던 동네에도 상가에 비슷한 크기의 서점이 두 군데 있었는데 나는 두 곳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로 통했다.

한 서점은 주인이 아주머니였는데 그곳에서는 '요즘 보기 드문, 책 좋아하는 학생'으로 대접을 받았다. 어린 시절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좋아했던 나는 최소한 사나흘에 한번은 그곳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둘러보곤 했다. 거의 대부분 소설을 샀지만 하나같이 양서(良書)였고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면 주인아주머니에게 추천을 해드렸다. 책을 사러 갈 때마다 대견해하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어주시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또 한 곳의 서점은 아저씨가 주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러운 얘기지만, 야한 책만 샀다. 물론 중·고등학교가 지척에 있는 동네 책방에서 불법적인 음란물을 팔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뒤지다보면 건강 운운하는 잡지나 일본 만화, 그리고 특이한 제목을 가진 소설 중에서 청춘의 호기심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걸작들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주인아저씨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었다) 그런 책들을 카운터로 가져가면 아저씨는 '내가 먹고 살자니 이놈한테 책은 팔지만 내 자식만 같았으면 그냥 안 둔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포장을 해주시곤 했다(물론 당연히 종이봉투에 담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 한심해 하시던 표정 역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두 군데 서점에서 산 책의 안식처는 달랐다. 아주머니의 서점에서 산 '좋은 책'들은 당당히 책장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종이봉투에 담겨 온 다른 종류의 책들은 침대 밑에 차곡차곡 쌓였다.

좁은 아파트에서 비밀이 오래 갈 리가 없다. 그때는 몰랐지만 침대 밑에 꾸며진 서재는 동생들이 즐겨 찾는 간이 도서관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가끔씩 방 청소를 하다가 더러운(!) 책들을 발견하시면 즉시 갖다 버리고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훈계를 하시곤 했다. 왜 남의 책을 허락도 없이 버리느냐고 몇 번 항의를 해봤지만, 당연히 강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

고3이 되자 사정이 조금 변했다. 혹시라도 수험생 아들의 비위를 거슬릴까봐 걱정이 되신 어머니가 침대 밑 서재를 방치해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자식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약점은 모두 이용하려 들었던 나는 더욱 거리낌 없이 '아저씨 서점'에서 책을 사들였다. 나중에는 침대 밑 공간이 꽉 차서 밖에서도 책들이 보이게 되었고 심지어 밖으로 튀어나온 책도 몇 권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대 밑 서재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비밀이었다. 학력고사를 치고 돌아오니 침대 밑에 있던 책이 모두 사라졌다. 참고 참다가 자식이 대학 입시를 치르는 날 한숨을 쉬면서 '불온서적'을 갖다 버리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죄송하고, 한편으로는 웃음이 난다.

세월이 흘러 독립을 하고 어쩌다보니 다락방이 있는 집에 살게 되었다. 수리를 하고 책장을 짜 넣었더니 크지는 않아도 그럴 듯한 서재가 되었다. 책장 별로 여기는 소설, 저기는 전공 서적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하다 보니 그 옛날 침대 밑에 있던 책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한군데 몰아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도미시마 다케오의 <여인 추억>, <황홀한 사춘기> 같은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은, 나름대로 한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컬렉션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 시대가 남녀 고등학생이 함께 영화를 보러가는 것을 죄악시하고(그럼 뭘 하란 말인가?), 교복과 두발 자유화를 하면 아이들을 '단속'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교외 지도반' 선생님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학생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주머니 서점'에서 산 양서뿐만 아니라 '아저씨 서점'에서 샀던 책들도 나름대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거나,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생활의 지혜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건강xxx>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누가 나에게 '침실에서 어색하지 않게 옷 벗는 법'처럼 '어디 가서 물어볼 수는 없지만 알면 정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려주었겠는가(이 정보에 흥미를 느끼시는 분들께는 당시 읽었던 요령을 전수해드릴 용의가 있다. 너무나 천박한 정보라서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모르시고 사시길 바란다).

올해 2학기부터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독서 교육 지원 시스템'이라는 것을 운영한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읽은 책을 입력하면 나중에 대학 입시 때 반영한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뜻으로 만든 것이겠지만, 학창시절 읽는 책까지 국가에서 '관리'하고, 책마저 대학 입학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너무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면 부모가 자녀들이 읽는 책까지 관리할 수 있는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특혜를 받게 될 것이 명백하다. 특히 국방부가 '불온서적' 명단을 작성하고, "짝짓기에 몰두했지"라는 가사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 방송 불가 판정을 받는 것을 보면, 이 시스템이 결국 체제에 순응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관리하는 시스템에 도저히 입력시키기 어려운 책들을 많이 읽고 소규모 서재까지 만들었던 경험에서 말하자면, '교육'이나 '대입'같은 목표 없이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평생 독서를 취미로 갖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읽은 책 목록과 독후감을 입력하는 전산 시스템일까. 그런 것은 오히려 가뜩이나 여유가 없는 학생들로 하여금 독서마저 공부와 같은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장치가 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자라면서 한번쯤 침대 밑 서재를 만들어볼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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