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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사 단체가 만들어진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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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사 단체가 만들어진 진짜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86] 의사연구회

일제는 을사늑약 강제 체결과 통감부 설치 이래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드는 작업을 차례차례 진행시켰으며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진두에서 지휘했다. 의료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대한의원 창설과 의사 자격 인정에 관한 것 모두 이토의 작품이었다.

1908년 6월 초, 내부 위생국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의술개업인허장" 제1호부터 제7호까지 발급했다. 하지만 그것이 통감부, 특히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인허장 발급에 대해 <황성신문>은 "의술 개업 허가장"을 수여했다고 보도했으며, <대한매일신보>는 "내부 위생국이 의술 위업하기로 허가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관보>에는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다.

일제에 강제 병탄당할 때까지, <관보>에는 1909년 3월 19일자에 의학교 제1회 졸업자 유병필에게 의술개업인허장 제8호를 발급했다는 것을 시작으로 1910년 8월 17일자에 김교준과 박희달(모두 의학교 제1회)에게 각각 제50호와 제51호를 발급했다는 것까지 의술개업인허장 발급에 대해 하나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유독 제1호~제7호 발급 사실만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관보> 담당자의 실수 때문일 수 있지만, 통감부의 부당한 조치에 대한 한국인 관리들의 항거의 결과일 수도 있다.

한국인 의사들로만 구성된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가 창립된 것은 1908년 11월 15일이었다. 의사연구회는 의학교 교관을 지낸 김익남을 중심으로 의학교 출신들이 만든 최초의 한국인 의사 단체였다. (대한의사협회는 의사연구회가 창립된 1908년 11월 15일을 협회의 기원일로 삼고 있다.) 의사연구회는 회장에 김익남, 부회장에 안상호, 총무에 유병필, 간사에 최국현과 장기무를 선출했다. 유병필, 최국현, 장기무는 각각 의학교 1회, 2회, 3회 졸업생으로 졸업 동기들을 대표하는 셈이었다.

의사연구회는 창립 직후인 12월부터 매달 첫 번째 월요일에 월례회를 열어 의학상의 여러 문제를 토론했으며 의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도 교환했다. 또 창립 초기에 잡지 발간에 대해서도 논의했지만 실제로 잡지를 발행한 것 같지는 않다. 의사연구회의 활동으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09년 4월의 <의사법(醫師法)> 제정 운동이다. 여기에 대해 <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의사법의 반포가 상무(尙無)한즉 여하한 자격이 유(有)한 자라야 의사됨을 득(得)할난지 의문일 뿐더러 차(此)를 이용하야 의학상 소핍(素乏)한 자도 의연히 의사의 명칭으로 개업 행술하야 오해(誤害) 인명(人命)하는 사(事)도 유(有)하며 종(從)하야 의업이 부진하는 고로 의사연구회에셔는 당국자에게 의사법 반포를 요구하기로 기(旣)히 결의하얏고 위원을 정하야 해(該) 청원을 기초하야 재작(再昨) 야례회(夜例會)에 통과하얏는대 수일 내에 청원서를 내부에 제출한다더라"

▲ 1906년 5월 2일 제정, 공포된 일본의 <의사법>. 이 법은 개업 의사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이해가 비교적 골고루 반영된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정규 의학교 졸업생들의 특권과 우위를 보장했다. ⓒ프레시안
의사연구회가 의사법 제정 운동에 나선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일본에서 오랜 논란 끝에 1906년 5월 2일 <의사법>이 제정, 반포된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일본에서는 189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에 걸쳐 "대일본의회(大日本醫會)"와 "메이지의회(明治醫會)" 등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여러 의사 단체 사이에 <의사법>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개업 의사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이해가 비교적 골고루 반영된 법이 제정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정규 의학교 졸업생들의 특권과 우위를 보장하는 이 법은 비슷한 처지인 의학교 출신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또 국내적으로 의학교 출신들은 "의술개업인허장" 문제로 고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이들은 가장 먼저 정규 의학교를 졸업하고 별다른 문제없이 의사로 활동해 왔는데, 의학교로 등록도 되어 있지 않았던 세브란스 출신들에게 납득할 만한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느닷없이 새로 "의술개업인허장"을 발급한 것이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우려했다. 대한제국 정부나 통감부가 새로운 의술개업인허장 취득에 대해 얼마나 추진력 있게 시행해 나갔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제에게 강제 병탄되는 1910년 8월까지 의학교 출신 거의 모두가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인허장 취득은 의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사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07년 3월에 자신들의 모교인 의학교가 일제에 의해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해 여름에는 자신들의 직장이기도 했던 한국 군대 역시 일제에 의해 해산당하는 쓰라린 경험도 했던 의학교 출신들은 이제 자신들의 의사 자격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집단적, 조직적인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만든 단체가 의사연구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황성신문> 1909년 4월 21일자. 의사연구회가 의사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곧 내부에 제출할 것이라는 기사이다. 하지만 후속 보도는 없었다. ⓒ프레시안
<대한매일신보> 1909년 11월 26일자에 의사연구회의 1주년 기념식이 이틀 뒤인 11월 28일에 휘문의숙에서 열릴 것이라는 기사가 게재된 점으로 보아 의사연구회가 그때까지 존속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사법> 제정 청원 움직임이 있었던 4월 이후 의사연구회의 활동은 알려진 것이 없다.

의학교 출신들이 의사연구회를 결성한 데에는 "의술개업인허장" 문제에 대한 공동 대응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한 공동 대응 때문이었는지 세브란스 출신들이 1908년 6월 인허장을 받고 9개월이 지난 뒤까지도 새로 인허장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1909년 3월 19일 두 번째로 인허장 발급을 신청하여 교부받은(제8호) 사람이 나타났다. 의학교 제1회 졸업자로 의사연구회의 총무이며 그때 막 대한의원 교수를 사임한 유병필이었다. 하필 유병필이 인허장을 발급받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또 그 과정에서 의사연구회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등에 대해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공동 대응의 전선을 깨뜨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 <관보> 1910년 3월 18일자. 의학교 출신들에게 의술개업인허장을 수여한 사유는 단지 "관립 의학교 의학과의 학업을 수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법적 근거도 없는 인허장을 발급한 것은 일제가 자신들의 틀에 의학교 출신들을 복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세 번째로 인허장을 받은 사람은 이관호 등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졸업생 5명이었다. 이들은 졸업식 하루 전인 1909년 11월 15일 인허장을 교부받았다. 이들이 인허장을 받은 것은 자신들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인허장을 받은 것은 박계양 등 대한의원 교육부 1907년 졸업생 7명과 의학교 2회 졸업생이자 의사연구회 간사인 최국현이었다. 그리고 그 뒤 1910년 2월부터 8월까지 나머지 의학교 출신들이 거의 모두 인허장을 받았다. 2회 졸업생 지성연과 강원영은 뒤늦게 1913년 5월 총독부의원 조수직을 그만 두면서 인허장을 받았다.

의학교 졸업생들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는 데에 별다른 조건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의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만으로 인허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도 의학교 출신들이 한참 뒤에야 인허장을 교부받은 것은 그들이 정부(사실상 통감부)의 조치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술개업인허장에 관해 의학교 제1회 졸업생 김교준(제77회)은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진술을 남겼다.

"학교를 나온 후 당시의 일본인 위생국장이 하루는 날 보자고 하기에 그를 찾아 갔었지. 무슨 일인가 해서 궁금한 가운데 방문했더니 의외에도 내가 왜 면허장을 타가지 않느냐는 것 아니겠오? 그래서 개업할 의향도 없고 해서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아직 타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래도 한국에서는 최초의 의학교 졸업생들이 면허장을 타지 않으면 후배 양성에도 간접적으로 지장이 있겠고 또 앞으로는 반드시 면허증이 필요하게 될 터이니 이 기회에 꼭 면허장을 타도록 하라는 것이었지. 그런지 며칠 후 위생국장은 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모든 서류를 완비해 놓고 글쎄 도장만 찍으라는 거야. 그래서 못 이긴 듯이 도장을 찍고는 면허증을 탔었지." ("한국 의학의 선구자를 찾아서 (3)", <대한의사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10월)

앞에서 보았듯이, 김교준은 지성연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학교 졸업생으로서는 가장 늦게 의술개업인허장을 발급받았다. 김교준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인허장 수령을 미루었지만, 통감부 측에서는 의학교 출신들이 인허장을 받지 않을까 봐 오히려 안달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처음에는 의술개업인허장을 의학교 출신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다 방침이 바뀐 것이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단 이번 회로 "근대 의료의 풍경" 제1편(개항부터 망국까지)을 마칩니다. 제1편에서 언급하려 했지만 충분히 다루지 못한 "광제원" 등에 대해서는 제2편(일제 시대)의 앞머리에서 서술할 것입니다.

그 동안 관심을 가져 주시고 성원과 질책을 아끼지 않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년 봄에는 민중들의 삶에 더욱 가까운 주제와 소재들로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더불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즐겁고 건강한 새해를 기원합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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