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들한테는 벌써 엄마가 둘이나 있잖아요? 생모, 양부모. 그러니 나까지 엄마일 필요는 없지요. 하지만 어느 경로를 거쳐도 우리는 같은 핏줄이니까, 그런 의미로 이모라고 하는 거지요."
김광숙 씨의 어투는 시원시원하고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활달한 성품이 몸에 배어 있어서인지 예순을 넘어섰지만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 같다.
그는 1970년 9월에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오고 나서 줄곧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직업이 간호사였으니 병원에서 일을 했지만 그의 활동 영역은 훨씬 넓었다. 병원일도 열심히 하면서 그는 한인들과 힘을 합치는데 빠지지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 베를린 간호협회장직을 맡았고 또 뒤이어 역사상 (아직까지) 유일하게 여성으로서 베를린한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그가 매진하는 일은 독일 입양 한국인 후원회 활동이다. 이 일을 한지는 거의 2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 병원에서 일할 때, 독일 환자들 중에 한국 입양아를 둔 집이 있었어요. 저를 보면 이야기를 꺼냈지요. 또 자기 이웃에 그런 가정이 있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쯤 한국에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 유럽으로 입양가는 우리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되었어요.
프랑크푸르트 경유해서 스위스, 노르웨이 이쪽으로 많이 갔거든요. 애기들이 답답하니 막 울어댔지요. 그때 제가 좀 안아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제 품에서 울음을 딱 그치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얼마나 안 되었던지…. 그리고 잊어버리고 살다가 1994년부터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물론 그전에도 몇몇 아이들의 가족과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만나고 그랬지요."
▲ 김광숙 전 베를린한인회 회장. ⓒ한민영 |
그의 첫 근무지는 베를린 시내 서쪽 스판다우에 있는 정신병원이었다. 그 병원은 그의 마지막 근무지이기도 했다. 35년간 한 병원에서 일하고 그곳에서 퇴직했다. 딸 일곱을 둔 집안의 넷째였던 그는 여자고등학교를 나와서 고향 보건소에서 근무하다가 친구 따라 파독 간호사 신청을 했다. 애초 간호보조원으로 왔지만 그는 독일 말을 익히자말자 바로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독일에서의 시간을 배움의 기회로 만들고자 작심했다. 그러니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때 하루 네 시간 정도 잤을까 말까 했어요. 나폴레옹도 하루 4시간 잤다는데 김광숙, 너도 할 수 있어! 하면서 살았지요. 새벽 일찍 일어나 수영하고 오전에 독일어 배우러 갔다가 오후 2시부터 근무를 했어요. 학교는 일주일에 이틀 나가서 공부하고, 그렇게 하다가 결국 폐렴으로 입원하는 신세가 되기도 했었지만요."
한국은 물론 독일 사회에서도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그 병동 근무를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너무 좋았다'고 한다.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고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요. 정신병을 치료하는 데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관심, 사랑이 우선이거든요. 환자들이 울면 나도 같이 우는 병원 생활이 내게 맞았어요. 환자들을 돌보면서 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음악, 미술, 댄스, 대화 등 각종 프로그램으로 환자들에게 치료 요법을 하는 병원 생활은 어느 면에서는 일반 사회보다 더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병동 일과를 쫓아다니며 사느라 다른 곳으로는 눈 돌릴 틈도 없었다. 35년 근속의 병원 생활이 너무 편했고 좋았기 때문이라고 거듭 말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깊은 뜻도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 있는 동안 목표로 한 대로 열심히 배워서, 한국에서 못 배운 몫까지 몇 배로 배워서, 한국에 돌아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싶었다. 간호원장 코스도 밟고, 양로원 운영 자격증도 땄다. 한국에 돌아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사회 사업 쪽의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헬퍼 신드롬'이 있다고 고백한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한다.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셨어요. 내복이 두벌 있으면 한 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 쪽의 사회 활동을 하려면 정신병원 근무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돌보는 일, 어쨌든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지요. 결국 나중에 보면 내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한데, 저는 어쨌든 내 자신의 일보다는 남의 일, 남에게 뭘 해주는 게 참 좋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이것저것 다 거들고 나서요, 하하하…."
ⓒ한민영 |
병원에 있을 때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주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선배 간호사였다. 덕분에 독일 간호사와 한국 간호사 모두 병원 직원들이 두루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인기가 좋았어요, 하하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미리미리 알아내서 거기 맞춰 일하게 해주는 방식이었어요. 병동 근무 시간표도 개인 사정을 고려해서 오전 오후 시간대를 다르게 하곤 했지요. 그러면 병동 분위기가 아주 좋아져요."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독일에서 한국 간호사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1974년 추석 때는 병원에 이런 신청도 할 수 있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을 지낼 수 있게 하루를 한국의 날로 만들어 달라, 그리고 버스도 한 대 대절해 달라.' 그리고 모두 독일 올 때 챙겨온 한복을 입고 버스에는 태극기를 달고 각 병동을 돌면서 인사를 했다. 보름달 뜬 저녁에 기숙사 앞 주차장을 다 비우게 하고 강강술래 노래를 틀어놓고 손잡고 돌았다. 한국 음식을 만들어 병원 동료들을 전부 초대했다.
"그때 한국 간호사가 78명이었는데 병동 전체 간호사 인력의 3분의 1이었거든요. 후배들에게, 이것 봐라 뭉치면 산다, 그렇게 말해주었죠. 열심히 일하고 또 참 재미있게 보냈던 시절이었어요."
거의 10여 년을 베를린 간호협회 부회장으로 일하다가 1990년대 초에 간호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독일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면서 평생 참 많은 혜택을 받았고, 많이 배웠노라고 한다. 특히 독일 간호사들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존경할 만하다고 한다.
"독일 간호사들의 직업의식은 아주 투철해요. 그들에게는 환자가 왕이지요. 입원에서 퇴원까지 돈이 있건 없건 다 똑같아요. 환자를 돌보는 일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간호사의 책임이라는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요. 궂은일 험한 일, 그런 구별도 없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보호자나 간병인들이 하던데 여기는 그렇지 않아요."
간호사로서의 자존심은 본연의 임무를 지키는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평생 간호사로 일한 그는 말한다. 40여 년을 베를린에서 살아온 그는 1997년 베를린 한인회 회장을 맡았다. 첫 여성 회장이었다.
"우리 한인회 활동 내용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렇지만 그때는 이제 한인 2세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졌어요. 청소년인 2세 아이들에게 한국과의 연결을 만들어주자는 것이었지요."
ⓒ한민영 |
"사실 이곳에서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요. 생활이 안정되어 있어서 괜찮아요. 한국이 제일 중요해요. 특히 한국 갔을 때 말이지요. 여기 베를린에서는 탄테인 내가 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 입양인의 전체 수는 2300명 정도라고 한다. 입양된 지 30년이 지났으니 학교도 마치고 직장도 잡고,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어 사는 젊은이들도 많다. 주로 베를린 지역에 살고 있는 입양인들이 탄테 김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탄테 김은 자신의 주요 활동을 '뿌리 찾기'에 동행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뿌리 찾기. 그때 제가 같이 하는 거죠. 매년 한국에서 '한민족 축전'이 열리잖아요. 외국에 사는 동포들이 오는데 노인부터 어린 아이까지 다 있으니 큰 가족 모임 같아요. 가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의미가 있지요. 제가 애들하고 같이 가요. 애들한테 같이 가자고 해요.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가보자, 너희가 태어난 곳이 어떤 곳인지, 보고 듣고 느껴보라고 하지요. 가서 생부모를 찾고 싶으면 찾아보라고도 하고요."
어려서 입양된 아이들은 청소년 시기에 이르면 어렴풋이 자신의 존재, 그 뿌리의 연원을 찾고 싶어 한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떻게 생겼을까? 난 누구를 닮았을까? 한국이라는 나라, 나를 낳아준 부모의 존재가 그립고 궁금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찾아나서야 할지 막막해한다.
"처음엔 다들 많이 쭈빗대요. 낳아준 부모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부모가 왜 나를 버렸을까, 왜 나를 머나먼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살도록 해야 했을까, 하는 그런 원망도 가지고 있지요.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예요."
그런 아이들 옆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탄테 김은 자신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내가 늘 그러지요. 아이들이 어깨 늘어뜨리고 기운 없으면, 왜 그래? 여기 탄테가 있잖아! 힘내!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다고 하네요. 나도 탄테 있다고! 아이들이 친조카들처럼 저를 따라요. 자주 전화하고 이런저런 일도 의논하고 그러지요."
ⓒ한민영 |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을 품어요. 우리 아이들이 가서 지낼 공간이 있으면 꼭 우리 집에 간다, 그런 느낌이 생길 거 아니에요? 부모를 못 찾아도 있을 데가 있으면 내 고국이라는 느낌도 강할 것 같고…. 한국의 어느 독지가가 그런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간절해요."
그는 입양아들에 대해서 고국이 해줄 일은 아주 많다고 덧붙인다.
"고국을 찾아 갔을 때 한국에서 따스하게 맞아주는 일이 중요해요. 말도 통하지 않고 자라온 문화도 다르지만 분명히 자신들 안에서 꿈틀거리는 뭔가를 느끼거든요. 서울 처음 가서 아이들이 이런 말도 해요. '이렇게 잘 살면서 왜 우리를 버렸대요? 한국이 우리를 버렸으니 한국이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원망어린 말도 하는 거지요."
외국에 입양되어 오래 살다가도 고국 방문을 하고나서부터는 아예 한국이 좋다고 눌러 앉는 애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어느 입양아는 한국이 좋아서 이제는 이탈리아로 안 돌아간다며 세탁소에서 일하며 살고 있단다. 독일에서 살던 아이도 이곳에서 대학 마치자 말자 한국으로 가서 직장 잡아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한국 가서 잘 사는 것 보면 참 좋아요. 우리가 서울에 가면 다들 모이지요. 좁은 방구석에서 며칠간이나 같이 지내게 되는데 아무렇지 않아하는 것을 보면 참,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탄테 김의 입양인 후원회 활동은 그저 가족 간의 일들을 해나가는 것 같다. 시집 간 딸이 하소연하는 것을 들어주기도 하고, 아들이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하면 그냥 귀를 기울여주기도하고 조카들이 떼를 쓰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기도 한다. 먼 이국땅에서 살아온 40여 년이다.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입양아들의 그리움과 아픔을 그는 고스란히 나눠가지고 싶은 것이다.
ⓒ한민영 |
'헬퍼 신드롬'의 탄테 김은 한 달에 한번 씩 꼭꼭 나가야하는 모임이 몇 개나 있다. 그 중에는 민들레회도 있다. 선배 간호사들의 모임이다. 1966년 10월 15일 처음으로 베를린에 온 126명의 간호사들이 중심으로 만든 모임이다. 그는 명예회원이다.
"다 같이 나들이도 나가고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서 외로움을 덜어주는 거지요. 선배님들도 이제는 연세도 많고 또 독일에 오래 살아서인지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린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그래도 한국인 정서라는 게 따로 있으니까, 제가 한국말로 막 웃겨드리면 까르르 웃어요. 제가 잘 웃기거든요. 하하하…."
그가 큰 소리로 또 웃는다. 오래전 그의 꿈은 고국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꿈의 방향이 어디든 상관없다. 지금 바로 옆에 그가 손을 내밀고 잡아줘야 하는 동포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광숙 씨는 만인의 '탄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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