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지인들과 함께, 재일교포 극작가인 정의신이 연출한 <적도 아래의 맥베스>를 명동예술극장에서 보았다. 조선인 전범 문제를 전면에서 다룬 작품이었다. 특히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전범들의 죽음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러한 처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억울함 등이 잘 응축되어 드러난 작품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겁고 생소한 주제였는데 객석이 꽉 찼다.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여전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인문학에 대한 홀대가 고등학교의 과목 선택에까지 미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한국 근대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는 것은 어쩌면 상당한 용기를 수반하는 것이다.
일제가 단순히 조선을 지배하고 물질적 수탈만을 행한 것이 아니다. 조선사편수국을 설치하고 거액을 들여 <조선사>를 편찬한 것은 조선인 스스로 식민 지배를 받아들이고 독립 정신을 고갈시키도록 하여,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이를 이어갈 수 있는 의식을 조선인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이런 의도는 멋지게 성공했다.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고 오늘날까지 식민성의 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와 식민 지배 청산이 문제시되어서가 아니라, 자학사관에 근거한 한국인에 의한 왜곡된 역사 이해가 당당히 진행되고 있어서다. 당사자들의 현실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여전히 조선 근대에 대한 문제제기는 남다른 힘을 요구한다.
서양의 군함이 동아시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혼신의 힘을 다해 군사적 압박을 물리쳤다. 그러나 조선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했다. 그들을 물리친 자신감과 확신으로 문을 더욱더 걸어 잠갔다.
제국주의의 침탈을 일면만으로 평가하게 만든 이 조치는 일제의 지배를 용이하게 만든 빌미가 되었고, 열강의 속성을 간파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못하게 했다. 박규수를 위시한 현실적 대응 논리는 설 자리를 잃었고 개화파와 같은 급진적이고 대외 의존적인 발상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전근대 사회를 돌이켜 보면 생산력의 차원에서는 동아시아 각국이 그렇게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정치 개혁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바로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했다. 중국이 반 식민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정치권력의 편성과 관계된 문제이고 따라서 정치사상적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양이론(攘夷論)이 비등했을 때, 오랑캐라는 존재를 관념적으로 규정하고 말 것인지 아니면 그 실체를 바르게 이해하고 대응할 것인지는 이후 동아시아의 근대 행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중국은 청조가 붕괴되고 나서야 열강의 침략에 대한 중국적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은 명·청 교체기와 청조의 조선 지배 이후 보여준 왜곡된 양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주적 대응을 상실했다.
반면에 일본은 에도막부를 마감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정치 편성의 교체를 통해 서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서구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적어도 근대국가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데에는 모두들 열심이었다. 흔히 '지사'로 지칭되는 개혁가들에 의해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행되었고, 근대 사상가들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함께 작동하면서 근대국가로서의 틀이 조성됐다. 그러면서 국력을 신장시켜나갔고 독립의 지위를 획득했다. 기쁜 마음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열강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다는 것은 배움의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내부에 있는 일본이므로 그들의 근대를 통해 한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일본 근대 플랜
막부를 압박해 오는 서양 세력, 존왕양이와 천황을 중심에 둔 막부 타도파와 막부를 지키려는 측과의 대결 상황 등, 후쿠자와가 등장한 시대 일본 국내 정세는 정신없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정세의 변화를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관찰하면서, 후쿠자와는 일본인에게 세계의 현실(이는 후쿠자와를 세상에 알리고 그의 글이 인기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된 <西洋事情>으로 나타남)을 알리고 일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저술 활동을 펼쳐나갔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한 이론, '탈아론'으로 유명한 후쿠자와이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누구보다도 조선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개화파를 중심으로 조선 사회의 문명화에 많은 기대를 했고, 물질적 지원도 마다하지 않은 경력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를 침략의 원흉으로 무조건 매도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의 문제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그의 문명론에 근거해서 보면 서양에 대한 동양의 독립이라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성인남녀 모두를 개국론자로 바꿔보겠다'라는 의지를 갖고 1872년 저술한 것이 <학문을 권함>(엄창준·김경신 옮김, 지안사 펴냄)이다. 외국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개방하고, 상하 신분 질서를 비판하면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계몽사상을 일본인 전부에 심어주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을 창출함으로써, 일본의 독립의 발판을 확보하려는 것이 후쿠자와의 의도였다.
또 '인간 모두가 평등한 것처럼 나라와 나라도 서로 평등하며, 이것은 천리인도이며 인간 세계에 통용되는 법칙이며 도리이다'라는 관점에서 인간과 국가도 상호 평등하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독립 정신과 청교도 정신을 직수입하여 일본인 모두를 일신 독립, 자유 평등의 인간으로 바꾸어서 일본을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대등 평등한 일원으로 하고자 한 제안이었다.
후쿠자와의 이러한 제안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당초 제시한 초판(초편에 해당하는 부분임)에 이어 1876년 17편 '인망론'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계몽주의자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개혁 방안의 제안에로 활동 범위를 넓혀나가는 행보를 보였다.
그렇지만 후쿠자와의 이런 시도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근대 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후쿠자와 스스로 자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국가 간 평등이 만국공법에 입각한 상호존중에 의거하기보다는, 힘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강한 깨달음을 얻는다.
물론 <학문을 권함>을 대하는 당시의 일본 독자가 후쿠자와의 의도대로 이 책을 읽고 모두 개국론자로 전환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쿠자와의 거창한 의도와는 달리 실용서로 자리 잡은 것도 현실이었다.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돈벌이에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관점에서 읽게 되는 분위기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후쿠자와가 활동한 이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는 자본주의를 근저에서부터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예언자적 사상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후쿠자와가 서구의 사상계에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와 새로운 문제 상황에 대응해 보려는 사상이었다. 이를 단서로 후쿠자와는 일본을 문명화하기 위한 방안을 이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후쿠자와의 사상적 영위는 일본을 근대화하고 자본주의화하는 데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세계사적인 역사의 분기점에서 일본을 위해 활동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근대와 승부하자
최근의 신문 보도에서 ''제로백' 등 국적불명 용어 퇴출시키자!'를 제목으로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타자 몸에 맞는 볼을 가리켰던 '데드볼'은 '히트 바이 피치트 볼(hit by pitched ball)', 볼 4개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포볼'은 '베이스 온 볼스(base on balls)'의 일본식 표기였습니다. (…) 요즘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자동차에 관심이 많습니다. (…) 그 와중에 등장한 국적불명의 용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제로백'이라는 신조어입니다. '제로백'은 원래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의 가속 시간'을 가리키는 자동차 마니아들의 속어였습니다. 정지 상태는 영어 '제로'로, 시속 100㎞는 우리 말 '백'으로 표기해 만들어낸 희한한 표현이지요. 당연히 잘못된 말입니다."
조금은 장황하지만 인용한 이유는 우리의 근대의 현주소를 보게 하는 단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김용옥도 외래어 표기법에 대해 인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 읽기에 그 나라 표기법을 따르자고 주장한 적이 있다. 여기서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판정하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여전히 번역어 문제가 한국에서는 과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이미 정리하고 갔어야 할 일을 여전히 시빗거리로 삼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기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반도에서의 근대는 복잡하다. 산수 이종률은 "조국사의 분열은 근대사의 기형 중에서도 특수 기형에 기반하고 있다"라고 단정했다. 모리모토(守本) 사상사적 방법론에 의거하면 한국 사회는 아시아적 사유 중에서도 여전히 씨족적, 종족적 사유 체계와 정치 형태인 카스트제가 작동하고 있고 주술=미신의 광범위한 맹신에서 사대주의의 건재에까지 전근대 사유 체계가 중첩적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일신의 독립에서 자유와 평등에 이르는 근대적 과제는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현실적 과제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후쿠자와의 일본 사회에 대한 시선을 우리는 배워야 하지 않을까?
2010년은 한일 강제(불법) 병합 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째 되는 해이다. 많은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에서의 기념 집회에 참여하였다. 병합의 부당성에서부터 재일한국인 문제, 식민 지배의 현재성 등 일본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분위기였다. 자연스럽게 민주당 정부의 출현과 관련된 현실 문제로 이야기가 이어지자 이구동성으로 일본인들의 정치의식 고양과 정치 참여라는 일본인들의 수준을 문제시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그들의 입에서 후쿠자와의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은 아직 후쿠자와의 근대 플랜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신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우익적 분위기가 팽배하고 보수 정치가 이어진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문제라고! 여전히 후쿠자와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둘러보고 인천공항을 나서는 삼성의 이건희와 그 가족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번들거리는 얼굴하며 명품으로 치장한 자태는 자못 멋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 모습을 보면서 가까운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이건희는 정치권에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한국 사회는 3류 정치가 문제라고.
일면 맞는 말이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무엇이 3류이고 무엇이 1류인지를 놓고 잠시 논의를 하였다. 1등 국민이 되는 것은 야만도 아니고 미개도 아닌 문명화된 인간의 탄생에서 가능하다. 적어도 후쿠자와식 사회 분류 방식에서 생각해 보자면 그렇다. 이건희 체제의 삼성맨들도 과연 일신 독립을 통한 문명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궁금하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생 산업계에서 일본의 근대를 구축했으며, 그의 삶은 근대 기업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여전히 일본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후 많은 일본 기업가들이 돈벌이뿐 아니라 근대인으로서의 자립정신에 입각한 기업 활동과 일본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물심양면 노력해 왔다. '마츠시타 정경숙(經營塾)'이나 '방위대학'에서는 여전히 세계 속의 일본을 생각하면서 인재를 길러내고 있다. 일신의 독립이 일국의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문제의식은 일본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국격', '공정 사회', '환경 살리기' 등 현란한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부나 언론의 보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비판적 시각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장래 설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관에 근거한 세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 모든 것이 내 자신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진정 멋있는 인생은 사회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신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본인 후쿠자와가 제기한 일신의 독립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지적은 우리의 근대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투표용지만 대하면 우리는 감정적이 된다. 각종 연고주의에 목을 맨다. 자립적이고 독립적 의식의 근대인 출현은 요원한 것인가.
사족 같기도 하지만 후쿠자와의 책 제목에 대해 한 마디 해 두고자 한다. 시중에는 <가쿠몬노 스스메>(임종원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 <학문의 향기>(양문송 옮김, 일송미디어 펴냄) 등 세 종류의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와 있다. 세태를 반영한 번역 제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학문은 한자어이므로 그대로 둔다면 역시 '스스메'가 문제로 된다.
일본어의 의미에는 스스메가 술을 권하다, 책을 권하다와 같은 의미와 나아가다 발전하다와 같은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있다. 책 내용이 근대 사회의 원리와 일본의 현실의 문제점 지적, 그리고 해결 방안을 담고 있음을 고려해 보면 '학문의 권장'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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