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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에 '공주' 같은 친구들아, '할머니'를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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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60에 '공주' 같은 친구들아, '할머니'를 받아들여!"

[인터뷰]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 박혜란 씨

부산에서 어느 60대 노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비와 영정 사진,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짤막한 유서만 남긴 채였다. 지난달에는 평소 '행복 전도사'로 불렸던 최윤희 씨마저 자살을 택했으니,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뉴스에 놀라지 않을 수도 있겠다.

평생을 달려오다 겨우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60대. 사계절을 한평생으로 비유하자면 딱 지금 같은 때다. 가을 한 철 그 색을 폭발했다가 이제는 잔해처럼 도로 위에 눌러 붙은 은행잎처럼, 우리의 윗세대 60대도 지쳐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에 대해,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하 <다시>)는 아무 준비 없이 겨울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로하는 책이다. 저자인 여성학자 박혜란은 올해로 64세. 그는 60대에 접어들면서 자신 역시 "작은 일에도 서글프고, 미래가 불안하고, 사는 게 무거워 징징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지난달 펴낸 <다시>에서 박혜란은 "이제는 열렬하게 나이 듦을 껴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이 드는 거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라는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닐까?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 여성학자 박혜란 씨. ⓒ프레시안(최형락)

나이 얘기, 너무 하지 말자?

박혜란이 2001년 <여성신문>에 연재하던 에세이를 모아 <나이 듦에 대하여>(<나이 듦>)를 펴냈을 때만 해도 연상의 선배들로부터 "아직도 젊은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그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새파랗다"고 스스로도 말한다. 하지만 60대의 기록이라고, 50대의 기록에서 특별히 달라지거나 색이 바랜 건 아니다. 여전히 '박혜란'일 뿐이다.

"10년 사이에 자식들이 모두 결혼해 벌써 손자·손녀가 다섯이야. 공식 명칭이 할머니가 됐어. 그런데 정작 할머니가 되니까, 전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할머니의 상 같은 게, 다 깨지는 거야. 오히려 할머니로 불리든 어머니로 불리든 나는 나구나 하는 생각이 강해지더라고."

할머니라지만, 웬만한 연하의 사람들보다 발이 부지런한 박혜란에게 "그 연세에 참 체력 좋으십니다" 이런 칭찬은 안 하느니만 못한 얘기다. 그는 젊은 TV 리포터가 50대 출연자에게 '어르신'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실소를 터뜨린다.

"몇 살 덜 먹은 거, 몇 살 더 먹은 거, 너무 의식하지 말고 살자."

젊은 세대에 대한 '지질하다'는 식의 편견을 놓고도 박혜란은 고개를 젓는다.

"우리 또래도 모이면 요새 젊은 것들 생각이 없다, 뭐가 없다, 미래가 암울하다, 이렇게 욕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실제론 안 그래. 얼마나 훌륭한데. 집에서 젊은이 셋을 보면서 느낀 건데 나보다 훨씬 나아. 우리보다 많은 자극을 받으며 자랐잖아."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는 말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다. 팩트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터다. 얼굴이 다르듯이 생각이 다른 법이다. 젊은이만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이미 나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195쪽)

ⓒ프레시안(최형락)

나이를 잊자? 나이를 받아들이자!

박혜란의 <다시>는 '나이를 잊자'라든가 '젊게 살자'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인생역전이나 남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조망한 에세이 속에서 그는 맨밥 같은 글을 선보였다.

"내가 사는 이야기, 특별한 게 없어. '나한테 배워라' 이런 의도로 책을 낸 게 아니야. 한창 강단에 섰던 10년 전만 해도 가르치는 게 익숙해선지 약간의 메시지를 주려는 생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비웠어. 그냥 내가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넌 어떠니' 하고 말 거는 기분으로 썼어.

내 또래들이 책을 읽고서 이런 감상을 들려줬어. '어쩌면 넌 나랑 사는 게, 느끼는 게 그렇게 똑같니?'. 그 친구들이 그냥 마음에 담아둔 것을, 나는 이렇게 썼을 뿐이고."


새로 나온 글 모음은 전작보다 훨씬 편안하다. <나이 듦>을 쓰던 무렵인 쉰 초입엔 진통제 한 번 안 먹고 살던 체질이었던 그가 응급 환자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그때 펴낸 <나이 듦>에서는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잊힐 것 같은 느낌"에서 "사명감"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다시>는 느긋하다.

"건강한 사람들 착각이 자신만은 죽을 때까지 안 아플 거라는 거야. 50대 초반에 나도 그랬어. 그런데 아프고 나니까 깜짝 놀랐지. '몸이 말을 걸어왔구나!' 지금은 이곳저곳 병이 생겨도 놀라지 않아. 몸이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거지."

새삼스런 속편, 그 배경은…

▲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박혜란 지음,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몸이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새삼스레 '다시'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 듦>은 연재물이 누적됐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번엔 미발표 원고들이다. 게다가 평소엔 메모도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기록에 인색한 그다. 고로 <다시>는 기획에 따라서 백지에 써내려간 글이다.

"지난번 내 책은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한테 많이 읽혔다더라고. 독자의 70%가 3~40대 젊은 사람들이었대. 그 사람들이 내 책이 위로가 됐었다면서 다음 얘길 꼭 써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지금 60대 아니냐, 50대하고는 좀 다를 것 아니냐, 이러면서. 실제론 다른 거 없는데. (웃음) 한 사람의 후배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펜 굴려 봐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쓰게 됐어.

이미 나이 든 사람들은 늙어가는 얘기 정말 싫어해. 나이 드는 게 공포잖아?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워낙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세니까. 그래서인지 사람들도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동화 속 계모가 아니라, 공주하고 자신을 동일시하고. 사람들이 늙는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살았어.

그런데 시대는 어느덧 100세 시대가 돼 버렸고, 이제 늙는 것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된 거지. 요즘 강의를 하다 보면, 한 세대 아래 사람들이 점점 나이 듦에 대한 준비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눈에 보여."


한국 사회에서 늙는 준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노년은 두려운 것이며, 그것을 해소할 유일한 방안은 역시 돈 밖에 없다는 생각 등.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노년의 불안을 주로 보험설계사나 펀드매니저 앞에서만 고백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는 박혜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돈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야. 일단 삶이 그냥 늙는 과정임을 받아들여야 해. 노후 대책, 노후 대책 이러는데 그럼 노전(前)은 어디 있나. (웃음) 나이 듦은 어떤 시점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지.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에 대한 '기획'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누구인지, 뭐가 즐거운지 알아야 해."

상사의 취미에 따라 자기 주말도 반납해야 하는 살벌한 사회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해 가며 '기획'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도 한창 '달릴 때'는 모르고 외면했다가 어느 순간 "몸이 말을 걸어오면서" 알게 됐다. 노후는 통장에 가둬 둘 무엇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이다.

산다는 것은 늙어 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늙음이란 젊음이 스타카토로 끝나는 어느 날 별개의 삶처럼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늙음을 밀어내려고 애쓴다. 마지못해 늙음 이후의 생활을 예비하면서. 하지만 늙음 이후의 생활, 즉 노후생활이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저 계속 늙어 가고 있을 뿐이다. (<나이 듦>, 22쪽)

나이 드는 거, 멋지다고!

"솔직히 어렸을 때는 이럴 줄 몰랐다. '나이 든 사람도 세상이 재밌을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그저 할 수 없이 사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195쪽)

박혜란의 젊은 독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나이 듦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또 자신만은 그런 나이 듦에서 벗어나 있을 거라고 착각할지 모른다. 기자도 그랬다.

하지만 <다시>를 읽으며 그들이 진심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저자가 나이 들어 조직한 대학 동기들과의 친목 모임을 언급하는 글에서다. "이때쯤이면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철없이 뻐기지 않고 또 공연히 주눅 들지 않을 만큼 모두가 꽤 익은 시기다". 그래서 시기질투 없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다들 성공을 향해서 달려온 친구들인데…. 예전엔 누가 샘난다고 못 보겠고, 마음에 안 든다고 못 보겠고, 성향이 다르다고 못 보겠고 그랬는데 그건 다 껍질이더라고.

나이 드니까 그 껍질이 눈 녹듯 사라져. 사람이 사실 못나고 잘나봤자 거기서 거기 아니야? 한때 부나 명성을 누렸더라도 당시 역할에 따른 것일 뿐이고.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껍질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 멋진 경험이야. 동창들 얼굴을 보면, 그 나이부터 20대 청년의 얼굴까지 그 사람 인생이 다 보여. 정말로.

우리끼리 '하나도 안 늙었다' 이러는 게 젊은 애들이 보기엔 우습겠지만 당사자들은 정말이라니까." (웃음)


"나이 든다는 거, 생각했던 것보다 참 괜찮은 일이다.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그 끈질긴 욕심, 회한, 미움, 불안이 어느새 슬그머니 다 녹아 버렸다. 그 자리에 넉넉함, 연민, 고마움이 밀고 들어오는 중이다" (194쪽)

"노인 복지, 세대 간 접점 늘리는 방향으로…"

인터뷰 도중, 박혜란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한 여성이 등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명함을 건네려는 그의 손이 바쁘다. 워낙 여러 종류가 있어서다.

'공동 육아와 공동체 교육' 이사장, <여성신문> 편집위원장, 얼마 전에 4회를 끝으로 물러났지만, 꼬박 4년간은 서울국제가족영화제(SIFFF) 이사장도 지냈다. 명함은 없지만(!) '65씨네클럽'이라는 대학 동기들의 영화 소모임 회장도 맡고 있다. "감투만 많다"고 쑥스러워하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일 게다. "늙으니 분노하는 일이 줄어들고, 미움도 연민으로 화한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직도 사회의 부조리들이 눈에 밟힌다. 특히 여성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천상 20대 열혈청년의 모습이다.

"성폭력 문제, 특히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해선, (범죄자를 보면) 그냥 끓어올라. 창간 때부터 <여성신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 문제 때문에 여전히 신문을 떠나지 못하는 거야. 여성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루려면 전문 매체가 꼭 필요하니까. 대학 졸업 후 매체(<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한 경험 덕분에, 그 힘을 익히 알고 있어."

노인 빈곤 문제, 홀로 사는 노인의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문제 등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불행을 얘기할 때도 그의 심각한 고민이 전해진다. 그의 책에서도 앞서 고령화 사회를 맞은 일본을 둘러보고 난 뒤 "암담해진 기분"을 고백하는 '동경 유람단'이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여러 공동 주택과 노인 복지 시설을 체험한 뒤 적은 글에서 그는 "일본의 대응은 늙어 가는 속도에 비해 턱없이 더디다"며 "잃어버린 것은 지난 10년이 아니라 앞으로의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한국 사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는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 구축을 강조한다.

"아무리 호화로운 노인 복지 시설이라도 또래 얼굴만 보고 산다면 하루하루가 참 지루하고 답답하지 않을까? 일본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입주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 주택을 견학했는데 신선했어. 핀란드에서는 노인종합복지센터 바로 옆에 유아원을 짓더라고. 같은 공간에서 앞 세대와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거지.

노인들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종이 접기를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가 섞이고, 엄마아빠 세대도 아이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곳을 찾는 거야. 결국 그 공간에서 이뤄지는 모든 소통, 나눔 하나하나가 노인 복지, 아동 복지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세대를 섞는 하드웨어가 되는 거고."


ⓒ프레시안(최형락)

평소 기록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그이지만, 나이 듦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차원의 관심은 앞으로 계속될 터이니 10년 후 또 새로운 책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글을 쓸 때 제목만 정해 놓으면 그에 해당하는 머릿속 서랍이 열린다. 백 가지고 천 가지고 말할 거리가 흘러나온다"니까 기대해 봄직하다. 서랍의 풍성함과 서랍을 열어줄 열정도 계속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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