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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녹색 천 쪼가리가 웬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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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녹색 천 쪼가리가 웬 말이오?

[親Book] 박선희의 <줄리엣 클럽>

어제 학교 담벼락에 홍벽서가 붙었다.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녹색(교복)천 쪼가리만 입어라 하심을 어찌하올는지요. 소녀들은 눈앞이 캄캄할 뿐입니다. 부모님 졸라서 겨우 옷 한 벌 어렵게 장만했는데 그렇게 무자비하게 압수해 가심은 이 어린 소녀들의 순박한 가슴에 금을 긋는 일이옵니다. 학생부 선생님들께서는 부디 이 상황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세로쓰기로 가지런하게 쓰인 벽보를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왔다. 그야말로 풋풋한 애교가 묻어나는 귀엽고 참신한 홍벽서다. 홍벽서는 얼마 전에 종영된 <성균관 스캔들>에 나온 드라마 소재다. <성균관 스캔들>은 완소남, 꽃도령들이 대거 출연해 뭇 여성들의 가슴을 콩닥콩닥 헤집어 놓았던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조선 후기, 그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했던 홍벽서를 모방하여 교복 위에 덧입은 겨울 점퍼를 지정된 색깔 외에 못 입게 지도한 학생부 선생님들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교문 담벼락에 학생들은 이렇듯 애교 섞인 홍벽서를 붙인 것이다.

체벌 금지 규정으로 온갖 논란이 일었던 얼마 전에도 학생들의 관심은 정작 생활 규정에 쏠려 있었다. '학교에서 귀걸이를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 '교복 치마의 길이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가'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했을 때 어떤 규정을 적용받게 되는가' '교복에 덧입는 겨울 상의는 어떤 색까지 허용되는가', '화장은 가능한가', ' BB크림은 화장인가 아닌가' 등 이런 생활 규정에 교사는 교사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모두 제각각 다양한 의견들로 학교가 한바탕 들썩였다.

전교생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학생들은 체벌을 지지하는 편이 훨씬 많았다. 학생 인권의 출발이 체벌 문제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과는 달리 학생들은 자신의 인권 문제가 생활 규정과 더욱 밀접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학교의 생활 규정은 어떤 방식으로든 학생들의 욕망과 충돌한다.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다양한 10대의 욕망들을 통제하여 가지런한 겉모습으로 정리해야 하는 학교, 그 속에서 교사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힘들다. 학생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는 교사들조차도 끊임없이 다양한 내면을 분출하는 학생들을 보며 자신이 가져온 기존 관념과 싸우며 여러 가지 상황에서 늘 딜레마에 봉착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가장 힘든 문제는 학생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교사가 보는 학생, 부모로서 보는 사춘기의 자식, 사회가 보는 10대, 어른에 비해 정신적 혼란기로 방황하는 시기이며 입시 지옥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학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공부에 몰입해야 한다는 몇 가지 공식을 빼고 보면 우리는 학생들에 대해 참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전혀 모른다.

▲ <줄리엣 클럽>(박선희 지음, 비룡소 펴냄). ⓒ비룡소
<줄리엣 클럽>(박선희 지음, 비룡소 펴냄)은 멋진 로미오를 꿈꾸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들의 옥탑방 모임이다. 일반 주택에 사는 나(유미)는 부모님을 졸라 다른 식구들과 격리되어 한적한 분위기에서 공부에 몰입하고 싶다는 조건으로 옥탑방을 개조하여 자신만의 방을 꾸민다.

이곳에 죽이 잘 맞는 친구들이 우연하게 모이면서 옥탑방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 모인 열일곱 살 소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토란, 연두, 주은, 아람, 가영, 소이, 유미라는 이름보다 윰이라는 별명이 더욱 맘에 드는 유미까지 줄리엣 클럽은 이들이 알콩달콩 만들어가는 일상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방년 열일곱 살,

이들은 한창 멋 내기에 관심이 많고 연애에 관심이 많을 나이다. 성과 사랑의 호기심으로 가득 차 온갖 상상으로 아름다운 꿈을 꾸는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저런 게 바로 프렌치 키스구나. 저 사람들 정말 달콤할까?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내가 말했다.
"들척지근한 침 냄새밖에 더 나겠어?뭐가 분한지 토란은 계속 툴툴거렸다. 주은은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웃기만 했다.
누가 어디서 사랑을 나누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범생 연두는 한창 호탁이와 열애 중이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주은이는 아이돌 가수 J.rp(조리퐁)에게 빠져 있다. 아람과 가영은 동성애를 나누고 있고, 독학으로 제빵 기술을 익히며 달콤한 모카 케이크 같은 사랑을 꿈꾸는 토란은 같은 반 친구인 선우창을 짝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선우창은 나(유미)를 좋아한다. 나(유미)는 과외 선생인 수달피와 계약 연애를 하며 인생에 대해 한수 배우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선우창을 향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용서하지 않을테야!
조나단! 나를 지켜봐줘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날아라, 내 안의 조나단 리빙스턴.


자유롭게 어딘가를 날아가고 싶다.

마음만은 지구를 뚫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날 수 있을 듯싶지만, 억압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유미는 매일 새벽부터 나와 운동장에서 카이트를 날린다. 조나단 이야기는 유미가 자신의 옥탑방에 써놓은 문구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같이 다양한 욕망을 품고 각기 다른 색깔이 있는 아이들은 서툴지만 때로는 어른들보다 훨씬 지혜롭고 순수하다. 빠르게 질주하다가도 일단 정지할 줄 알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 앞에서도 힘들게나마 조금씩 타인을 인정하며 마음의 문을 열 줄도 안다. 종이비행기를 날리기 좋아하는 아람이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가영이는 자신들의 동성애가 비록 현실에서 인정받기 어려우나 그들의 사랑을 지켜내는 법도 배운다.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을 미숙하다고 걱정하지만, 이 글의 10대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되어 보였다. 나이 들수록 자신들의 사고 속에 갖혀 사는 어른들보다 말랑거리는 유연한 사고와 작은 혼란에도 흔들리는 그들의 모습이 더욱 인간답게 보였다. 어른들이 들여다보기 어려운 10대의 이야기는 마치 토란이 만든 겉모습은 별로지만 맛만은 기가 막힌 고구마 케이크와 닮아 보였다. 2009년 블루픽션상을 받은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의 작가 박선희의 재담으로 풀어지는 감각적인 젊은 문체는 이 소설의 맛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달콤한 케이크와 쿠키가 가득 담긴 편안한 방에서 10대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편안한 수다를 마음껏 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가르치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수업 시간 침묵과 졸음의 일관된 모습 속에 숨겨진 내면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40이 넘은 어른들은 소녀 시절에 물레방앗간 같은 데서 연애했다고 믿는 요즘 아이들, 그들이 어른을 이해 못하듯이 우리도 그들을 대책없이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새삼스런 기분에 젖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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