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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임시정부와 대결 태세를 갖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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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임시정부와 대결 태세를 갖추다

[해방일기] 1945년 11월 15일

1945년 11월 15일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은 13일 아놀드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15일 하지 사령관과 회견했다. 하지와는 10월 27일 첫 만남 이후 두 번째 회견이었다. 박은 15일의 회견 내용을 이튿날 기자 회견에서 밝혔다.

朝鮮共産黨 대표 朴憲永은 15일 하지 중장, 아놀드 군정장관과 회견하고 중요 협의를 거듭한 바 있었는데 일반이 궁금히 여기는 이 회의의 내용을 16일 朴憲永은 신문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하지 중장과 아놀드 장관은 나에게 두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다.

1) 남부 조선에 있는 미국 군정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건전한 경제 기초 위에서 조선 독립을 보장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본의를 양해하고 앞으로 더욱 군정에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

2) 조선 독립은 연합국의 호의 특히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 줄 안다. 미국은 모든 방면으로 더욱 경제적으로 조선을 협조할 만한 힘과 지위에 있으니 조선은 기쁨으로 친선관계를 맺어 나가야 하며 앞으로 독립국가로 완성되는 때에는 미국과 통상 관계를 가지는 것이 필요할 줄 안다.

이상 두 가지 점에 대하여 朴憲永은 찬성의 의사를 표명하고 '朝鮮共産黨은 군정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밝혀 말한 뒤에 그러나 '협력은 하되 군정이 잘못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共産黨에서는 비판할 자유를 가졌고 또한 우리의 의견을 건의하겠다'고 말하니 이 점에 대하여 하지 중장은 찬성의 뜻을 표하고 회담을 마치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17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공산당) 총비서로 선임되고 9월 20일 중앙위원회에서 8월 테제가 채택됨으로써 박헌영은 공산당의 조직과 노선을 장악했다. 그가 공산당의 장악력을 더욱 집중하려 애쓴 사실은 10월 8일 김일성과의 개성 회담에서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승인하지 않으려 한 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이를 결국 승인한 것은 동석했던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의 권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의 성세는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결성으로 크게 떨쳤다. 사실 전평은 현장 노동자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이뤄진 것이고, 그 조직 과정에 공산당의 개입은 별로 없었다. 10월 초 박헌영이 노동조합운동 지도자 7명과 회견했을 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당으로서는 노조운동에 대한 아직 구체안을 갖지 못했다. 지금 직접 노동운동에 관계한 동무와 종래에 그 경험을 가진 동무만을 초청하여 이 사업을 부탁하니, 허성택-김대봉-박세영 3동지를 중심으로 가급적 빠른 기간 내에 운동을 성공시켜 주기 바란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 펴냄), 220쪽)

전평이 비록 공산당의 지도로 조직된 것은 아니지만, 그 간부 중에 공산주의자가 많이 있었고, 노동조합 전국 조직으로서 유일한 좌익 정당인 공산당에서 정치적 배경을 찾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평 결성대회에서 박헌영은 레온치오(세계노동회의 대표), 모택동, 김일성과 함께 명예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전평은 공산당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전국조직이 되었다.

11월 12일 여운형의 인민당이 결성됨으로써 수십 개 정당 중 4개당이 메이저리그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도 좌우익의 인민당과 국민당, 그리고 좌익의 공산당과 우익의 한민당이다. 중도파 정당과 극단파 정당의 차이가 이제 분명해지는 것 같다. 중도파 정당의 무기는 말과 글뿐인 데 반해 극단파 정당들은 더 현실적인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한민당은 돈과 경찰력을, 그리고 공산당은 대중 동원 능력을.

11월 2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의에서 박헌영은 친일파 배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이튿날 따로 기자회견을 열어 이에 관한 이견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공산당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정당과 보조 맞추는 데 신경 쓸 필요 없이 나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의 자신감은 11월 17일 중국 언론 <중앙사> 특파원 쩡언보(曾恩波)와의 인터뷰에서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조선 전체 인구의 6분의 1인 400만 명이 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조선공산당은 8월 15일 이후로는 표면에 나타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어 그 세력이 급격히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조선을 통하여 당원 및 공산청년동맹원의 수효는 1만5000명에 달하였으며, 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망라된 노조원의 수는 50만 명이나 된다. 그리고 농민조합원의 수효는 300만 명이고, 기타 민주주의적 청년단체는 그 중앙기관만은 준비 중이나 이미 그 조직된 인원은 70만 명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같은 책, 242쪽에서 재인용)

11월 20일에는 반도호텔의 하지 사령관 접견실에서 <뉴욕타임스> 존스톤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이듬해 1월 5일 그의 기자 회견을 취재해서 "박헌영은 소련의 일국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언젠가 한국이 소련연방에 편입되기를 바란다"고 보도해 물의를 일으킨 그 존스톤이다. 이 인터뷰에서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조선공산당의 태도를 존스톤이 묻자 박헌영은 임시정부가 한국 민중과 아무런 실제 연관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같은 책, 243쪽)

20일은 김구 일행의 귀국 사흘 전이었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가 3일간의 회의를 개회하던 날이었다. 박헌영은 임시정부와의 정면 대결 태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사흘 전 쩡언보가 김구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의 대답보다도 더 직설적인 것이었다. 쩡언보에게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진보주의자이기를 바란다. 국내 민중은 사상적으로 몹시 진보되어 있으므로 보수적 방법론만으로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해외 민족주의자의 결함이란 보수적이요 반소-반공적이어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천자로서는 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같은 책,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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