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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없는 나라는 수치" vs "외국인에게 약 구걸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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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없는 나라는 수치" vs "외국인에게 약 구걸해서야…"

[근대 의료의 풍경·73] 의학교

1899년 3월 24일 칙령 제7호로 <의학교 관제>가 반포됨으로써 시대적 요청이자 민중들의 소망이었던 "의학교"가 드디어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신문들은 입을 모아 정부의 의학교 설립 조치를 환영했다. 여기에서는 <독립신문>과 <제국신문>의 보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현금 셰계에 문명한 각국들은 인민의 위생을 위하야 졍부에셔 무슈한 돈을 들여 의학교를 셜시하고 병원을 만히 두는대 대한셔는 의학교라 하는 명색이 당쵸에 업고 근년에 와셔 영 미국과 일본에셔 나온 몃몃 의원이 병원을 셜시하고 젹지 아니한 쟈본을 허비하야 가며 대한 사람들을 위하야 혹 학도를 뽑아 의슐도 갈으치며 병인을 극진히 치료하되

본국에셔는 본국 인민을 위하야 의학교와 병원을 셜시한 것이 한 곳도 업는 것은 대한에 참 슈치가 되는 일이라 우리가 졍부에셔 의학교를 셜시한다는 말을 듯고 얼마큼 치하하며 고명한 의원을 고빙하야 잘 실시되게 하기를 발아더니 지금 의학교를 실시하랴고 반포한 규칙을 본즉 졍밀하기로 또한 반갑게 녁여 좌에 긔재하노라. (<독립신문> 1899년 3월 29일자)


<독립신문>은 미국과 일본의 의사들이 한국에 병원을 설립하여 환자를 극진히 진료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있는데, 막상 한국 정부는 그 동안 그러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나라(대한)의 수치"라고 표현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언급이 실제와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 아니며, <독립신문>의 특정한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은 또한 정부가 많은 예산을 들여 의학교와 병원을 설치하여 인민들의 위생을 증진시키는 것을 문명국이 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때늦긴 했지만) 의학교 설치를 위해 법률을 제정, 공포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독립신문>은 1896년 12월 1일자 논설에서 처음으로 근대식 의학교 설립을 주장했는데, 이제 2년여 만에 그 주장이 실현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독립신문>은 1896년의 논설에서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의학교에 대해 언급한 것인 양했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른 것이다. 더욱이 조선(한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국가가 의원(醫員)들을 직접 교육, 양성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독립신문> 논조의 특성과 한계를 알 수 있다. 조선(한국)은 "근대식" 의학 교육에는 뒤늦었지만 아예 의학 교육과 의술이 없었던 미개국이 아니었다.

▲ <독립신문> 1899년 3월 29일자. 의학교 설립을 치하하는 기사와 함께 <의학교 관제> 전문을 게재했다. ⓒ프레시안

<제국신문>은 조금 뒤인 1899년 4월 19일, 1면과 2면을 거의 모두 할애하여 의학교의 설립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학의 가치, 본질, 문제점 등에 관해 장문의 논설을 게재했다. 당시 사장인 이종일(李鍾一, 1858~1925년)이 직접 집필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 논설의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의원이 병을 다스림이 법관이 죄를 다스림과 갓하야 병의 허하고 실함을 의원이 자셰히 삷혀셔 보하고 샤하는 술법을 극진히 하야 다스리지 아니하면 한셰샹 사람이 다 병이 들고야 말터이오 (…) 그 생살지권을 가짐은 의원과 법관이 일반이라

이 논설은 우선 의술이 생명과 직접 관련되는 일이므로 의사(의원)가 의술을 극진히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의사와 법관의 역할을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렬국때 편쟉(扁鹊-인용자)의 의술이 후셰에 유공하기가 요슌때 고요(皋陶-인용자)의 형법이 만고에 유젼함과 등분이 업거니와 그 공평함은 도로혀 의원이 법관보다 나흐니 의원의 병을 다스림은 친쇼가 업서 자긔 부모나 남의 부모나 자긔 쳐자나 남의 쳐자나 병을 곳치기만 쥬의하야 재됴를 숨기지 아니하되

이어서 이 논설은 의원은 법관보다 더 공평하여 친소(親疎)와 무관하게 환자들을 차별하지 않고, 또 자신의 재주를 감추지 않고 성심껏 잘 진료해 준다고 했다. 이 구절은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의사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단방을 무르면 말하지 안코 자긔 뎨형 슉질이라도 가릇처 주지 아니하야 자긔 혼쟈만 두고 리를 취하니 차 소위 쳥기와 쟝사라 야만의 풍습을 면치 못함이니

내가 보기에 이 논설에서 가장 근대적인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는 "비방(秘方)"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형제, 숙질(叔姪)과 며느리, 사위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자신만의 처방이 많을수록 명의(名醫)로 통했던 것이 전통 시대 의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논설의 필자는 그러한 비방의 독점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을 것을 촉구한다.

근일에 우리 졍부에셔 또한 백셩의 위생하기를 위하야 의학교를 셜시한다하니 새로 학교에 입참하시는 학도는 쟝찻 공부를 도뎌히 하야 백셩으로 하여곰 외국 사람의 병원으로 약을 엇으러 가는 수치를 면하게 하려니와 긔왕 의술노 쳔명하던 이도 더옥 공부를 힘써셔 셰샹의 요사함을 건지는 공효를 당시에 세우고 백병 통치하는 방문이 잇거던 학도를 가릇처 일홈을 후셰에 드리워 병을 다스려 사람 구하는 권리를 법관이 죄를 다스려 백셩을 구하는 권리의게 사양하지 마시오. (<제국신문> 1899년 4월 19일자)

마지막으로 논설은 정부가 의학교를 설치한 것을 치하하는 한편 그곳에서 새로 의학을 공부할 학생들의 열공을 당부하며, 그럼으로써 한국인들이 그 동안 외국인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던 수치를 면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독립신문>은 그 동안 의학교와 병원이 없었던 것을 수치라 여긴 데에 반해, <제국신문>은 외국인에게 약을 얻으러 다녔던 것을 수치라고 하여, 두 신문의 논조의 차이를 보여준다.) 더불어 기왕의 (한)의사들에게도 공부에 힘쓸 것과 처방(백병 통치하는 방문)의 공유와 전수를 요구했다. 요컨대 이 논설은 "서양 의학"의 보급뿐만 아니라 "공공성"과 "개방"이라는 근대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제국신문> 1899년 4월 19일자. 여기에 게재된 논설은 "서양 의학"의 보급뿐만 아니라 "공공성"과 "개방"이라는 근대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프레시안

국민과 언론의 환영과 기대 속에서 의학교 설립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5월 달에는 학교 위치가 훈동(勳洞,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으로 정해졌다. "의학교는 즁셔 훈동으로 뎡하고 슈리하기를 장대히 하고"라는 <제국신문> 1899년 5월 20일자 기사가 그것을 뒷받침하며, 그 뒤의 각종 자료에도 의학교의 위치가 훈동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중외일보> 1929년 10월 23일자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5) 지석영 씨"에는 그와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지석영의 술회에 따라 작성되었을 그 기사에 의하면 "지금 재동에 잇는 녀자고보 자리에 한성의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재동의 여자고보(경기여고) 자리라면 1885년 4월부터 1886년 11월초까지 제중원이 있었던 곳이다. 또 1900년 10월부터 7년 동안 광제원이 자리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의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의학교가 존속한 8년 내내 교장을 지낸 지석영의 증언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기록들은 모두 "훈동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의학교의 위치가 훈동으로 결정되기 전에 옛 제중원 부지와 건물을 사용할 논의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70대 중반에 이른 지석영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던 것일까?

<중외일보> 기사에는 그밖에도 사소하지만 몇 가지 부정확한 언급이 있다. 우선 지석영이 이도재에게 의학교 설립을 건의한 해는 병신(丙申)년이 아니라 무술(戊戌)년, 즉 1898년이었다. 그리고 지석영이 의학교 교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햇수로 치더라도 9년이다. (지석영이 대한의원 시절에도 교장으로 자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학교의 정식 명칭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의학교"였다.

지석영이 훈동을 재동으로 잘못 말했거나, 지석영을 인터뷰한 기자가 잘못 듣거나 적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기사에 언급된 여자고보는 1910년부터 1933년까지 훈동(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동덕빌딩 자리)에 있었던 동덕여자고보(현재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동덕여중고의 전신)를 가리키는 게 될 것이며, 아직도 불확실한 의학교 위치의 확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중외일보> 1929년 10월 23일자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5) 지석영 씨." 이 기사에는 사소하지만 부정확한 부분이 몇 군데 있다. ⓒ프레시안

▲ <조선총독부의원 20년사>(1928년 발행) 48쪽. 의학교가 중부 관인방 훈동의 전 총리대신 김홍집의 옛 집을 교사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년사>에 의하면 일제는 대한의원 설립을 조선총독부의원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며, <의학교 관제>도 제멋대로 "경성의학관제(京城醫學官制)"로 지칭했다. ⓒ프레시안
한편, <매천야록> 제3권에는 "의학교를 설립하여 고 김홍집의 집을 교숙으로 하고(設醫學校 以故金弘集家爲校塾)"라고 되어 있다. 매천 황현의 이 기록이 맞는 것이라면, 갑신정변 때 참살당한 급진 개화파의 리더 홍영식의 집이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이 되었듯이, 아관파천 때 역시 참혹한 죽음을 당한 온건 개화파의 수령 김홍집의 집이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의과대학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김홍집이 박영효와 더불어 1895년에 시도했던 의학교 설립이 자신의 집을 빌려 실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총독부의원 20년사>에도 김홍집의 집을 의학교 교사로 사용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매천야록>을 참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의학교의 위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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