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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주눅 들지 마세요!"

[親Book]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연속극을 보면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띠링' 문자가 왔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이란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선생님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추천해주세요."

얼마 전 독서회에 새로 들어온 부지런한 회원의 문자입니다. 저는 15년째 시립도서관 독서회에서 책을 소개하고 토론을 주재하는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바람에 종종 이런 식은땀 나는 질문들을 받곤 합니다. 문자를 보낸 회원만 해도 자신이 읽었으니 '선생님'은 당연히 읽었겠지 하고 물은 것이지만, 사실 저는 탁석산의 <한국인의 정체성>(책세상 펴냄)을 읽은 적이 없었고, 당연히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 뭔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밥 먹다말고 부랴부랴 집 앞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충 읽고 답장을 보내고 나니 온몸에 기운이 쪽 빠지더군요.

안 읽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일이 그리 단순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선생인 제가 안 읽었다고 하면 회원들은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란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훨씬 더 많은 상황에서 툭하면 읽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선생에 대한 기대를 짓밟는 일이니 조용히 그만두는 것만 못하지요.

문제는 독서회를 그만둬도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한 이런 고민은 계속될 거란 겁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은 척을 하고 조마조마해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게 싫어서 죽어라고 읽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점점 책 읽는 게 부담스럽고 전처럼 독서가 즐겁지 않습니다.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그런데 이 답답한 심사를 단번에 날려준 고마운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대학교의 프랑스 문학 교수이며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바야르가 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이라는 책입니다. 내용이 제목을 따르지 못하는 책을 하도 많이 봐서 별 기대 안 했는데, 이 책은 진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기특한 책입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는 책을 읽지 않고도 이런저런 논평을 하는 다양한 사례들이 나옵니다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경우는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폴 발레리입니다. 이 책을 보니 그는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작가에 대해 비평을 하고 추도 연설을 할 만큼 배짱이 두둑했더군요.

예컨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로 유명한 프루스트를 기리며 쓴 글에서는, "그의 대작 가운데 한 권 정도 겨우 아는 처지요 그 예술 역시 거의 이해할 수 없지만"이라고 솔직히 밝힌 뒤 그의 작품에 대해 비평을 늘어놓습니다. 뻔뻔해 보이지만 필자 바야르의 시각은 다릅니다.

바야르는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해서 발레리의 비평이 무의미하거나 부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런 불철저한 독서야말로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작품과 거리를 두는 이런 독서법을 통해 책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정독을 최고로 치는 독서 풍토를 비판하면서,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이는 독서는 대상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장애가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구 해석에 매달려 책의 취지도 현실적 의미도 놓치는 독서가 얼마나 많은지 떠올리면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다른 한편, 읽었지만 읽지 않은 것과 진배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망증 때문에 읽고도 잊어버려서 내용은 물론 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데, <수상록>으로 유명한 몽테뉴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사실 몽테뉴의 사례는 날마다 이런 일을 겪는 저 같은 독자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그리고 "독서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며 "우리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망각과 대면하는 것"이라는 필자의 정의에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독서란 자아를 형성함과 동시에 자아를 해체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심오한 경우와 달리 그저 진땀나는 상황도 있습니다. 가령 작가를 만났다거나 또는 모르는 책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작가를 만났는데 그의 작품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는 없고 얘기를 하자니 읽은 적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편집자로 일할 때 자주 겪은 일이라 필자의 대답이 궁금했는데, 바야르는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지 말고 좋게 말해주라"고 답합니다. 작가라고 해서 그가 쓴 책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니며, 어차피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니 자세히 이야기할수록 작가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거지요.

독서회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이지 똑같은 책도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다양한 책을 많이 읽으면 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독서력이 향상되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책은 독서력만으로 읽는 것이 아니니, 독서에는 읽는 이의 성격과 관심과 그의 현재 상황, 나아가 그 책을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읽게 되었는지도 영향을 미칩니다.

바야르는 그것을 '화면 책'이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책과 그 책들에 대한 담론들을 통해 자기 앞에 놓인 책을 재구성하며, 나아가 진짜 책 대신 책에 대한 담론과 견해들만을 상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가 아니라, 그 책을 '왜' '어떻게' 읽느냐 이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독서 현실은 여전히 필독의 의무와 독서 목록의 확장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학생들이 읽은 책 목록을 기록해 관리하겠다는 독서 이력서 제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책을 읽는 것을 책의 내용과 주제의 습득쯤으로 여기는, 그래서 어떤 책을 읽으면 어떤 인간이 된다고 믿는 투입→산출의 경제 논리에서 나온 것이 독서 이력서요, 국방부의 불온 도서 목록이요, 00대 선정 고전 100선 같은 리스트들이지요.

전문적인 문학비평가인 바야르가 "나는 <율리시즈>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면서까지 비독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는, 독서에 대한 바로 이런 기계적 관념에 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독서를 하기보다 타인이 알아주는 독서를 하기에 급급하고, 왜 읽는지도 모르는 채 독서 목록을 늘려가는 풍토를 비판하기 위해, 필자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당당하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에서 바야르는 인용된 책들 중 대다수는 '대충 뒤적거려 본' 책이며 최고의 영문학 작품으로 꼽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읽지도 않았다고 고백하지만, 최근의 인터뷰에서는 이 책 속의 '나'는 바야르 자신과 동일인이 아니며 자신은 읽지도 않은 책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으려면 가정과 학교에 의해 강압적으로 전파되는 흠결 없는 문화라는 강박적 이미지, 일생동안 노력해도 일치시킬 수 없는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진실보다는 자기 진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내면을 억압적으로 지배하며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 즉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자기 진실에 이를 수 있다."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자기 생각을 말하라는 필자의 주장은,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책 앞에 주눅 들지 말라는 주문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나 혼자 하는 독서마저 타인의 시선에 저당 잡혀 스스로를 외롭게 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책 읽기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위한 전(前) 과정이라는 그의 말처럼, 책을 읽는 것은 내 안의 불안과 열망을 읽는 것이며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읽은 책들의 목록이 쌓이는데도 정작 내 자신이 누구인지 오리무중이라면, 읽던 책을 덮고 세상으로 나아갈 일입니다. 나는 책 속의 존재가 아니라 결국 세간(世間)의 존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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