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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日이 던진 '석면 폭탄'은 지금도 '재깍재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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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日이 던진 '석면 폭탄'은 지금도 '재깍재깍'

[안종주의 '위험사회'] 재일 한국인의 숨겨진 비극, 석면

"아버지는 한국인으로 이름은 강재희(姜在熙)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와카야마현 출신이며 현재 74세, 일본인입니다. 두 분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오사카 남부의 작은 마을 한난시에 왔다고 합니다. 한난시에 있던 석면 공장에서 부모님이 일을 할 때 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유아인 나를 공장에 데려가 돌보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제 몸에 석면이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석면폐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항상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분합니다. 공장 바로 옆에 있던 사택은 창문을 닫아도 석면 먼지가 날아 왔습니다. 주위에는 4개 석면 공장이 처마를 잇대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근처의 아이들은 공장 주변뿐만 아니라 가끔 공장 안으로 들어가 석면원료 더미에 뛰어올라가거나 하면서 놀았습니다. 그 때는 석면이 햇빛에 반사돼 반짝거려 그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죽음의 먼지를 말이에요."

이런 증언을 하고 있는 여성은 올해 54살의 간호사 출신 오카다 요코. 그의 코에는 산소탱크와 연결된 줄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 일본에서 직접 휴대용 산소탱크를 가져왔고 남이 볼세라 여행가방 속에 넣고선 줄과 연결했다. 그러고서도 증언 도중 자주 쿨럭 거렸다. 이 산소탱크가 들어있는 가방은 그가 화장실을 가거나 잠을 잘 때도 항상 곁을 지키고 있다.

▲ 석면 질환으로 고생하는 오카다 요코 씨. ⓒ환경보건시민센터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옛 서울대 보건대학원 건물 4층 강당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환경 보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한 새로운 시민단체인 환경시민센터 창립식이 있었다. 이 창립식에 앞서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굴절된 한일 관계 속의 석면 피해 비극'을 다루는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해 재일 한국인의 석면 피해 참상을 알리기 위해 일본 오사카 센난 지역의 재일 한국인 2명과 이들을 돕는 활동가, 일본 석면 피해자 모임 대표, 취재차 한국에 온 <아사히신문> 기자 2명 등이 이날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의 증언을 듣던 사람들은 때론 분노로, 때론 탄식으로, 때론 동련상병의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이날 참석자 가운데에는 국내 환경성 악성중피종 환자와 국내 최대 석면 방직 공장이었던 부산의 제일화학에 다니다 석면폐에 걸려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 출신 등이 있었다. 서투른 우리말 인사에 이은 일본말 증언은 이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18살 때 전라북도 군산에서 강제로 끌려서 일본에 왔다고 한다. 강제 징용을 당한 것이다. 100년 전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 병탄된 나라에서 태어난 죄 아닌 죄로 일본까지 강제로 끌려갔던 강 씨는 일본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다 수해 복구 공사 노무자로 와카하마현에 왔다가 일본 여성을 만나게 되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결혼하게 된다.

멸시와 차별을 받던 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소규모 석면 방직 공장이 밀집해있던 센난 지역에서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20여 년 전 석면폐증에 걸렸다. 그리고 얼마 뒤 폐암까지 겹쳤다. 그래도 죽기 직전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찾아 한을 풀었다. 짧은 귀국 뒤에 일본에 돌아가자마자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마지막에는 물만 마시다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마감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66살로.

오카다 씨는 5년 전부터 일본 국가를 상대로 다른 원고 30명과 함께 배상 소송을 벌이고 있다. 원고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재판 투쟁의 선두에 서 있다. 지난 5월 승소했지만 일본 정부가 항소를 해 현재 오사카고등법원에서 2심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못살고 병들어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사죄는커녕 재판부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항소를 하는 정부가 진정 백성을 위한 정부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재일 한국인의 증언에 앞서 일본 센난 지역의 석면 피해 사례를 발표한 유오카 카즈요시 센난지역석면피해시민모임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은 태평양전쟁 전부터 석면폐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으며 1970년 이전에 보험원이 센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석면 공장의 피해 실태를 조사한 바 있어 심각한 피해 실태를 이미 국가가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 등에서 석면 방직 공장 노동자들이 석면폐에 걸린다는 사실이 역학 연구로 드러난 것은 1930년대였다.

오카다 씨에 이어서 함께 66살의 재일 한국인 韓高子 씨(일본 이름 마쓰시마 카나)도 센난 지역 재일 한국인들의 석면 피해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는 처음에는 노동자로 나중에는 자그마한 석면 공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로 석면 관련 일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해당하는 10살 때부터 석면 방적 일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주로 실을 뽑는 방적과 그것을 포로 만드는 직포 일이었습니다. 직장은 심한 먼지로 앞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머리나 속눈썹, 눈, 코에 석면 분진이 눈처럼 쏟아져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체에 치명적인 재난을 일으키는 줄 몰랐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의 남편도 재일 한국인이다. 남편은 4년 전부터 국가 배상을 요구하며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마쓰시마 씨의 어머니도 오래 전에 폐질환으로 숨졌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 석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몸에도 석면이 가득 들어있으며 이 석면이 언제 시한폭탄처럼 폭발할지 몰라 불안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취직 차별이나 저임금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많은 재일 한국인들은 우리 가족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 위해 일본인이 꺼려 한 석면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포들은 차별과 빈곤 속에서 필사적인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간신히 생활이 안정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석면 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어서 열심히 일해 왔는데 그런 자그마한 꿈도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의 절규에서 경술국치 100년의 아픔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못난 우리 조상들과 매국노들의 얼굴이 왜 함께 떠오르는 걸까.

▲ 석면으로 피해를 입은 재일 한국인 마츠시마 카나 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센난 지역은 오사카 남부의 5개 시, 3개 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옛날부터 면화 재배를 하며 섬유 산업이 번창하던 곳이다. 20세기 초부터는 석면 방직 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석면 질환도 얼마 뒤 속출하기 시작했다. 1940년 일본 보험원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12.3%가 석면폐에 걸렸고 20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의 경우 100%가 석면폐 환자였다고 하니 이들이 얼마나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석면 먼지를 많이 들이마셨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재일 한국인이었다. 1920년대 오사카 지역에는 조선인 방직 여공만 3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전쟁 때에는 주로 군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석면 공장을 가동했으며 전쟁 뒤에는 각종 민수품에 석면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센난 지역의 석면 산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했다.

센난 지역 재일 한국인들은 배운 게 석면 방직 밖에 없어 때론 노동자로, 때론 영세 소규모 가내공장 자영업자로 일하면서 석면에 줄곧 노출됐다. 센난 지역 석면 방직업은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005년 6월 구보타 쇼크(석면이 직업병뿐만 아니라 환경성 질환, 곧 공해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에게 널리 각인된 사건) 직후 막을 내렸다.

센난 지역의 비극은 센난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이 지역의 재일 한국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1970년대 자기 고향 부근인 부산과 경남 김해, 마산 등지에 석면 방직 기계를 들여와 석면방직업을 시작했다. 여기에 몇몇 일본 석면 방직 기업도 동참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기업이 대한민국 최대의 석면 직업병 환자를 양산한 부산의 제일화학(지금은 양산공단에 있는 C&S)이었다.

제일화학을 빼곤 대부분 한국에서 성공을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현해탄을 건너 석면 재앙의 씨를 한국에 뿌렸다. 제일화학에서만 100명이 넘는 석면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이미 숨졌다. 자신이 석면의 희생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리고 그 정확한 수는 한국 정부, 회사, 노동자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다.

▲ 센난 지역 한 석면공장에서 일하던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인 동료와 함께 모여 기념 촬영한 사진. ⓒ환경보건시민센터

경술국치로 인한 석면 비극은 석면 방직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제는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193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를 샅샅이 뒤져 석면 광산을 개발했다. 무려 30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석면 광산은 충청남도 홍성에 있던 광천 광산이었다. 당시로서는 아시아 최대 백석면 광산이었다. 지난해부터 언론에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피해자 또한 수백 명씩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충남 지역 석면 광산 주변 지역이 바로 대한민국 최대의 석면 비극의 현장이다.

▲ 가문 전체가 석면 질환으로 피해를 본 정지열 씨. ⓒ환경보건시민센터
정지열 씨 가문이 대표적인 석면 비극을 겪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와 숙부는 1938년 광천광산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석면을 캐내는 일을 했다. 이들은 모두 폐질환으로 숨졌다. 석면 광산 총감독과 노무자로 일했던 당숙 3명도 모두 폐암 또는 폐질환으로 숨졌다. 이들 가운데에는 석면 광산에 일한 적이 없는데도 폐질환에 걸린 경우도 있다. 석면의 위험성과 그 심각한 피해가 알려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어서 이들이 사망할 당시에는 전혀 석면을 의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석면 관련 질환이라는 확진을 받지 못했다. 이들 외에도 당숙의 아들 등 3대에 걸쳐 모두 7명이 폐질환으로 숨졌거나 석면폐로 투병중이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한국의 석면 광산이 처음 개발된 이후 한국에 많은 석면 피해자가 나타나고 있는데 일본에 사는 재일 한국인들에게도 석면 피해가 크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정 씨가 울먹이며 가문의 비극을 말하자 증언대에 선 재일 한국인 여성과 부산 제일화학 피해자들은 청중석에서 함께 흐느꼈다.

▲ 일제 시대 충청남도 광천 광산에서 일하던 조선 노동자들이 갱구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모습. ⓒ환경보건시민센터
이들이 분노와 슬픔에만 머문다면 이는 석면과 석면 기업, 그리고 이들을 돌보지 못한 국가에 패배하는 것이다. 서로 힘을 모으고, 손을 잡고, 피해자를 돕고,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싸워 이겨야만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남편을 석면 폐암으로 떠나보낸 일본 중피종 피해와 가족모임 후루카와 카즈코 부회장은 "지금 저희들은 한국과 일본, 또 아시아로부터 세계를 향해 큰 '아스베스토스 쇼크'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모든 피해자 구제와 공해가 없는 미래 실현을 위해 한층 더 연대가 필요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후루카와의 이 말은 이날 새로 탄생한 환경보건시민센터가 가려고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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