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프먼과 카밀은 친구였지만, 전쟁 중에 각각 히틀러 유겐트의 우수 생도와 유대인 청년조직 일원으로 성장하며 서로를 증오한다. 이들의 비극은 또 다른 아돌프인 히틀러가 사망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다. 1970년대 중동 전쟁으로 배경을 옮긴 만화의 마지막 장에서 누구보다 전쟁을 싫어했던 카밀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학살자로, 카우프먼은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의 일원으로 재등장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두 아돌프의 말로에서 오늘날 중동을 둘러싼 모순이 읽힌다. 전쟁으로 그토록 모진 수모를 겪은 유대인이 지금 팔레스타인을 강제 점령하고, 그곳에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회색 장벽을 둘러치고 있으니 말이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유대인에게 반전 ·평화주의의 씨앗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저지르는 짓에 대한 면죄부가 되고 만 것일까?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민중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홀로코스트는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모른다
방금 던진 질문은 수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썼지만, 실제로 그러한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소리는 청자에 닿았을 때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과연 팔레스타인으로부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서점에 나가보자. 매주 수십 권 씩 쏟아져 나오는 책 가운데 중동을 다룬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가운데서도 팔레스타인은 작가들의 발걸음이 가장 뜸한 곳이다. 관심 부족은 무지, 편견, 오해로 이어진다. 오로지 미국 언론을 젖줄로 삼는 한국 국제 뉴스의 현실, 성경은 익숙하게 느껴도 코란엔 고개를 갸우뚱하는 현실 속에서 아랍 세계는 종종 '테러'와 동의어다.
그래서일까,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김재명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오수연·키파 판니 등 26명 지음, 열린길 펴냄, <대화>),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안영민 지음, 책으로여는세상 펴냄, 이하 <물들다>), 이 세 권의 책을 단순히 '팔레스타인 관련 서적'으로만 묶어 소개하기엔 모자란다.
세 권의 책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운 담론의 현실을 교정하려는 노력이다. 한 독자는 <눈물의 땅>을 일컬어 중동 문제를 보는 시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켰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한국 언론과 지식인이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갈등을 문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문서나 자료로만 봐왔던 게으름을 지적한 것이다.
이 세 권의 책의 저자들은 팔레스타인 곳곳을 여러 차례 취재하고(김재명, <눈물의 땅>), 현지 문인들과 마음을 터고 편지를 교환하며(오수연 등, <대화>),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 직접 들어가 살면서(안영민, <물들다>) 그곳의 현실을 직접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이 세 권의 책에 담았다.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김재명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프로네시스 |
<눈물의 땅>의 저자 김재명은 이 표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입장이 실려 있다며 '아랍 저항 세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라 낙인찍고, 미국 언론이 이 입장을 대변하며, 한국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는 현실을 비판하며 "테러라 하더라도 그 배경과 동기를 함께 보도해야 옳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눈물의 땅>은 그 '배경'과 '동기'에 대한 설명서다. 저자는 이 지역에 기습 공격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역사와 현재 상황, 두 나라가 입장차를 보이는 쟁점과 협상의 우여곡절, 팔레스타인 사람의 항쟁과 그들이 느끼는 분노를 모두 입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좌절과 분노의 현장에서'(1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나 르포를 썼고, 그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2부)를 톺았으며, '중동, 미국, 그리고 평화의 전망'(3부)을 통해서 현실의 국제 관계 속에서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이후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불법 점령하는 현실이 있다. 또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중동 평화 협상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좌절이 있고, 이스라엘 정부의 정착촌 건설로 농지와 집터를 빼앗긴 그들의 분노가 있다.
저자는 그런 현실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하마스가 엄청난 군사력에 기반을 둔 이스라엘에 저항하려면 자살 폭탄 공격과 같은 테러리스트의 전술을 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마스는 자살 폭탄 공격을 통해 세계의 눈길을 중동에 쏠리도록 만들고, 이스라엘 점령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높이고자 한다.
하마스를 창설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에 따르면 테러라 불리는 하마스의 전략은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에 맞선 균형"이며 "이스라엘 무단 통치를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이요,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야신은 2004년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이 지시한 공격으로 표적 살해됐는데, 팔레스타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것이 '국가 테러'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저항을 이해하는 코드는 좌절과 분노"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죽임을 당하는 모습, 또 그들이 살던 집과 농토가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거나 겪었다. 이런 좌절의 고통 속에서 분노가 폭발하는 과정을 놓친다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없다면 중동 평화는 물론 지구촌 평화도 없다"며 '나와 내 이웃의 문제'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고민할 것을 호소한다. 한반도에서는 1945년 8월로 식민지배의 시계가 멈췄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이 독일 나치 정권의 최대 피해자인 이스라엘에 의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억압과 피억압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다시 등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눈물의 땅>을 읽는 일은 그 깨달음의 첫걸음이자 수전 손택이 인류가 잃었다고 지적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는 계기이다.
"한반도가 곧 팔레스타인이다"
▲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오수연·키파 판니 등 26명 지음, 열린길 펴냄). ⓒ열린길 |
그들도 우리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생소한 것일까? 소설가 김남일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편견으로 내면화한 그들은 "검은 두건 속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비겁한 테러리스트"이거나 "날아온 총탄에 맥없이 쓰러져 아무렇게나 널부러지는 시체"일 뿐이다.
역시 이 책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시인 키파 판니는 아랍 예술가들에 대해 "서구 식민화에 저항하여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악마의 화신처럼 매도당한"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아랍을 묘사하는 뉴스 문법과 서구 문화 위주의 편식 습관이 안 그래도 소원했던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를 더 어렵게 만들던 것이다.
예술은 피아(彼我)를 이어주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다. <대화>는 서로 다른 현실이지만 '저항'이라는 행위로 연대할 수 있었던 한국과 팔레스타인 예술인이 교환한 서신집이다. 2006년 7월 말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프레시안>에 연재된 원고를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문화 교류 모임인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가 엮었다.
책 속에는 오수연, 신경림, 황인숙, 전성태 등 22명의 한국 문인과 자카리아 무함마드, 키파 판니, 아다니아 쉬블리, 바쉬르 샬라시 등 4명의 팔레스타인 문인의 글이 한 편씩 오간다. 판이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두 나라의 작가들이 어떤 고리로 교감할 수 있을까. 의외로 현실은 다른 듯 비슷했다.
팔레스타인엔 회색빛 분리 장벽이 이 마을과 저 마을을 막는다면 한반도에는 서슬 퍼런 철조망이 남북을 가른다. 바쉬르 샬라쉬는 한국의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서 "국외로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국경에서 울타리를 가운데 두고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만 빼면 두 장면은 너무나 똑같아서 서로 뒤바뀔 수도 있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는 두 나라에서 "국제 도박사들이 지도를 갈라 친구와 적을 만들어 놓았으며,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과 소망을 희생하여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땅과 농장에서 내쫓기는 풍경은 이 책이 쓰인 2007년 당시 평택 대추리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겹쳐진다. 작가 김순천은 대추리에서 아다니아 쉬블리에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8미터 장벽을 세워 아름다운 노을을 빼앗고 장벽 건너편 오렌지 밭에 농사짓지 못하게 했다지요? 이스라엘이 야금야금 당신의 땅을 먹어치우듯 정부는 철조망을 쳐서 농민들의 땅에서 그들을 분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작가들이 고발하는 현실은 비단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들은 "옥수수 공장에서 쫓겨난 멕시코 농민들, 전쟁 한가운데 있는 이라크인들"(김순천, '사회적 고통으로 섬세하게 떨리는 것들') 역시 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겪는 부조리와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마주 비추고, 또 다른 고통과 이어지는 <대화>를 읽다보면 앞서 <눈물의 땅>이 던져준 '나와 내 이웃의 문제'라는 감각이 한층 실감나게 다가온다.
작가들이 아랍어와 한국어를 각각 영어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다시 번역하고 나서야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는 지난한 <대화>를 이어간 이유는, 현실에 저항하는 최고의 방법이 연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가 오수연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키파 판니에게 건넨 작별 인사처럼, "독재와 불의는 세상 어디에서나 얼굴이 똑같으며 인간은 어디서나 자유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는 한 우리는 결국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팔레스타인은 지금도 살고 있다"
▲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안영민 지음, 책으로여는세상 펴냄). ⓒ책으로여는세상 |
'팔레스타인 평화 연대', '경계를 넘어' 등 평화운동 활동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려온 저자 안영민이 지난해 현지에서 90일간 머무르며 경험하고 느낀 일들을 사진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민단체를 통해 소개 받은 40대 노총각 '와엘'의 집에서 지내면서 소소한 일상과 분쟁 지역의 위험을 동시에 마주한다.
팔레스타인은 비록 지도 위에선 사라졌지만 저자의 글 속에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낮에는 칠면조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한 뒤 밤에는 마을 친구와 알콜 0%의 이슬람 맥주를 나눠 마시고, 쉬는 날이면 TV 드라마를 보는 생활은 다른 나라의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스라엘이 전기를 끊어버려 촛불 아래서 저녁을 먹고, 길을 다닐 때마다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몸 검사를 받으며, 이스라엘 군에게 갑자기 욕을 먹거나 걷어차이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이다.
이 모든 일을 저자는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그 뿌리에는 거대한 억압이 존재함을 함께 고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일상과 그 일상을 뿌리째 흔드는 억압을 온 몸으로 기록하면서, 한국의 독자가 그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점령의 역사와 현주소를 곁들인다. 관찰과 성찰이 교차하고 웃음과 분노가 뒤섞이는 글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팔레스타인은 '우리의 문제'로 다가온다.
<물들다>가 그리는 세계는 "나도 예루살렘에 가봤는데 아무 일 없던데요"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관광객'이 놓치는 현실이다. 또 팔레스타인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보지 않고, 은연중에 미국이 취하는 친(親) 이스라엘 시각을 따라가는 국내 언론 기사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입체적인 풍경이다.
저자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이 나라 핸드폰을 저 나라에 팔 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서로의 아픔을 알고 나누는 것에도 해당되는 말이 되었으면"이라고 희망하며,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맺는 이해와 평등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그렇게 90일 동안 저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연대를 실천하는 동안, 그들이 내비친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경제적 풍요에 대한 열망이나 이스라엘의 패망에 대한 바람은 찾을 수 없다.
"우리 마을에 와서 살아봤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꼭 이야기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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