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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를 쫓겨난 김 씨, 공부도 취업도 못했던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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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를 쫓겨난 김 씨, 공부도 취업도 못했던 사연은…

[근대 의료의 풍경·64] 의학교의 설립

지난 몇 회에서는 시의에 따라 "경술국치"에 관련된 사실들을 언급했다. 다시 원래 논의했던 곳으로 돌아가 의학교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에서 의학교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醫學校)"를 의미한다. 아래 언급하는 "병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의학교"의 설립은 1898년 7월 15일의 만민공동회에서 표출된 민중의 열망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지만(제7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지석영이 그해 11월 7일 학부대신에게 보낸 건의서(上學部大臣書)였다.

지석영의 건의서에는 다음과 같이 의학교의 구체적인 운영 방안과 전망이 담겨 있었다. 이 가운데 실행되지 않거나 변경된 것들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 <의학교 관제>와 <의학교 규칙>, 그리고 실제 운영에 반영되었다.

① 의학교의 설치 장소(시급히 서울에 의학교를 설립, 亟設醫學校於都下), ② 교수 확보(서양말도 잘하는 일본인 명의를 교사로 초빙, 雇聘日本名醫之兼通西語者 以爲敎師), ③ 학생 선발(일어와 영어를 배우는 우리나라 학생들 중에서 한문에도 뛰어난 총명한 몇 명을 골라 학도로 선발, 選我日英語學生中 稍優漢文之聰俊幾人 以爲學徒), ④ 교사의 관리와 학생 교육(교사들은 정부 책임으로 편안하게 하고 학도들은 교사들이 도맡아 지도, 敎師則政府自當安之 學徒則敎師自當囿之)

⑤ 졸업 후의 활용(열심히 배우게 한 뒤 졸업하게 되면 그 중에서도 빼어난 인재를 선발하여 태의(太醫)와 군의(軍醫)의 직분을 내려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각 도에 파견, 使之勤篤講習 待其卒業 拔其尤勝 太醫軍醫之材品 綽有餘裕而派送各道), ⑥ 의학 교육과 의사 양성의 전국적 확대(다시 각지에 의학교를 설립해서 학생들을 교육, 設校授徒), ⑦ 국민 건강에 미치는 효과(곧 뛰어난 의사들이 나라 안의 모든 지역에 두루 퍼져나가게 될 것이니 모든 군인과 민중들이 두루 장수(長壽) 마을에서 살게 되는 셈, 靑囊國手遍于闔境 上下軍民共躋壽域).

▲ 지석영이 학부대신에게 보낸 의학교 설립 건의서. 지석영의 의학관, 의학 교육관이 잘 나타나 있다. ⓒ프레시안

학부대신 이도재는 지석영의 건의서가 제출된 지 불과 이틀 만인 11월 9일자로 의학교 설립을 위한 비용을 1899년도 예산에 포함시킬 것과 1899년 봄에 의학교를 창설한다는 내용이 담긴 회신서(學部大臣答書)를 지석영에게 보냈다.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회답이었다.

의학교의 설립이 시대의 요청과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음은 <제국신문>을 비롯하여 당시의 신문 기사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前) 관찰사 지석영 씨가 우리나라에 의술하는 학문이 업슴을 개탄히 넉여서 의학교를 설시하자고 학부대신 리도재 씨에게 청원하엿더니 리 대신이 지령하기를 금년에는 예산이 업서서 할 수 업스니 명년도에 경비를 마련하여 가지고 의학교를 설시하겟노라 하엿다 하니 우리는 그 학교가 속히 설시되기를 바라고 지석영 씨가 위생에 대단이 유지(有志)함을 치하하노라. (<제국신문>1898년 11월 17일자)

그리고 정부는 학부대신 이도재의 약속대로 의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 6030원(교직원의 봉급은 포함되지 않은 것)을 1899년도 정부 예산안에 편성했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를 설립비라고 추정하면 설립 첫해의 운영비는 3000원 가량인 셈이다.

이러한 운영비는 같은 해 성균관(2870원), 한성사범학교(2790원), 각종 어학교(영어학교 2348원, 일어학교 1179원 등)와 엇비슷하거나 그에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1896년도 의학교 비용으로 예산에 계상되었던 6906원(설립비 3050원, 운영비 3856원)과도 비슷한 규모이다.

예산 배정에 이어 학부는 1899년 2월 28일자로 대신 신기선(申箕善)의 명의로 <의학교 관제 청의서>를 제출했으며, 법안 심의를 맡은 중추원은 3월 8일 이를 통과시켜, <의학교 관제>가 3월 24일 칙령(勅令) 제7호로 반포되었다.

의학교의 교장과 교관 등을 선임하고, 교사(校舍)와 설비를 마련하고, <의학교 규칙>을 제정하고, 공개적으로 학생을 선발한 조치들은 모두 이 <의학교 관제>에 의한 것이므로 1899년 3월 24일을 의학교의 공식 설립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날은 의학교의 설립일일 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의학 교육의 탄생일로 한국 근대 의학 130년 역사에서 뚜렷한 획을 긋는 날이기도 하다. 1880년대 우두 의사를 교육하고 배출했던 경험이 20년 뒤에 더 큰 성과를 낳은 것이다.

▲ <황성신문> 1899년 3월 8일자. 의학교는 내외 각종 의술을 전문으로 교수하는데, 그 가운데 내과는 서양(泰西)과 동양의 의술을 서로 참조하여 가르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프레시안
<의학교 관제>는 제1조에서 의학교의 성격을 "국민에게 내외(內外) 각종 의술을 전문으로 교수하는 곳(處)"으로 규정했는데, 여기에서 내외 각종 의술이란 내과와 외과를 포함한 여러 가지 의술이라는 뜻이다. 기본적으로는 근대서양의학을 가르치되 내과는 동·서양 의학의 장점을 취하여 교육한다는 정부의 계획을, 관제 반포에 앞서 의학교 설립을 보도한 <황성신문>3월 8일자 기사 "(의학교 설립) (…) 내과는 태서(泰西)와 동양 의술을 참호(叅互)하야 교수한다더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학과목은 동물, 식물, 화학, 물리, 해부, 생리, 약물, 진단, 내과, 외과, 안과, 부인과 및 소아과(婦嬰), 위생, 법의, 종두, 체조 등 16과목으로(<의학교 규칙> 제2관 학과 및 정도), 요즈음 식으로 말해 기초과학, 기초의학, 임상의학 과목이 골고루 포함되었다.

다음 제2조에는 "의학교에 수업 연한은 3개년으로 정함이라" 하여 교육 기간을 3년으로 했는데,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의학교 규칙> 제3조의 "국내 의술이 발달한 후에는 연한을 경정(更定)하야 심절(深切)한 술업(術業)을 교수함이라"에 보이듯이 형편이 나아지면 연한을 연장할(아마도 4년으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의학교의 직원으로 학교장 1인, 교관(교수) 3인 이하, 서기 1인을 두었고(제5조), 학교장은 의학에 숙련된 사람으로 임명하되 학교 업무 일체를 관장하도록 했으며(제6조), 교관에게는 학도를 가르치고 감독하는 임무를 부여했다(제7조).

위의 직원 이외에 필요에 따라 외국인 교관도 둘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임무는 학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한정했다.

또한 제12조에는 "지방 정황에 의하야 의학교를 지방에도 치(置)함을 득(得)함이라"고 하여 장차 근대식 의학 교육을 전국적으로 확대할 계획을 나타냈지만, 이 역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점은 꼭 한 달 뒤인 4월 24일 칙령 제14호로 반포된 <병원 관제> 제13조의 "지방 정황에 의하야 병원을 각 지방에 치함을 득할 사"가 나타내듯이 국·공립 병원의 전국적 확대 계획과 짝을 이루었다. 요컨대 당시 정부는 전국 각지에 의학교와 병원을 건립할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그러한 계획은 좌절되었다.

▲ 1899년 3월 24일자로 반포된 <의학교 관제>(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맨 왼쪽 윗 부분에 국왕 고종의 서명이 있다. ⓒ프레시안

그리고 <관제> 제4조 "의학교에 학과 및 정도(程度)와 기타 규칙은 학부대신이 정함이라"에 따라 7월 5일 학부령(學部令) 제9호로 <의학교 규칙>이 제정되어 공포되었다. 이 규칙은 당시까지 제정된 학교 관련 법령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받는 등 교육사적으로도 의의가 크며, 실제 학교 운영도 대체로 이 규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규칙>은 제1관 총칙(6개조), 제2관 학과 및 정도(3개조), 제3관 학급·학기·학년(3개조), 제4관 입학·휴학(7개조), 제5관 재학·퇴학·출학(黜學)·처벌(3개조), 제6관 시험·졸업(3개조), 부칙(3개조) 등 총 6관 31조 부칙 3조로 구성되어 있다.

<규칙>에 의하면 (학교는) 생도에게 교과서를 빌려주고(借給) 필기도구를 지급하도록 했다. 그리고 교과서는 학부에서 편집한 것과 학부대신이 검정(檢定)한 것을 사용했다.

학과 과목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해부, 생리, 내과, 외과 등 16과목이었으며, 하루 수업 시간은 체조 시간을 제외하고 5시간이었다.

학기는 봄 학기(1월 6일부터 여름방학 시작 때까지)와 가을 학기(개학일부터 12월 25일까지)로 나누었고, 새 학년은 가을 학기의 첫날에 시작했다.

입학일은 봄 학기초와 가을 학기초 두 차례를 두었으며, 입학 자격은 중학교 졸업장이 있는 사람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이 규칙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중학교 졸업자가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단 현금간만 중학교 졸업생이 무(無)함으로 문산(文算)이 초유(稍裕)하고 재지(才智)가 총명한 자를 특시허입(特試許入)함이라"는 단서 조항을 두는 치밀함을 보였다.) 입학 시험은 한문(독서, 작문) 국문(독서, 작문), 산술(比例, 式答) 세 과목에 대해 치렀다.

의학교의 입학 자격을 중학교 졸업생으로 규정한 것은 소학교(초등학교)-중학교(중고등학교)-대학교라는 근대식 교육 체계 가운데 의학교를 최고 학부로 설치한다는 의미였으며, 이 또한 초유의 일이었다. 그만큼 의학 교육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9년 4월 4일자로 반포된 <중학교 관제>(칙령 제11호)에 의하면 중학교의 수업 연한은 심상과(보통과) 4년, 고등과 3년 등 7년이었다. 또한 1900년 9월 3일 공포된 <중학교 규칙>(학부령 제12호)에는 "중학교 고등과 졸업생에게 판임관과 전문학(專門學)에 입학할 자격을 준다"(제3조)라는 규정을 두어 소학교-중학교-대학교 체계를 분명히 했다.

▲ <규칙>에 의거해 1899년 7월 14일부터 여러 차례 관보에 게재된 의학교 입학시험 광고문. 광고는 의학교가 사회적 공식성을 얻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선례에 따라 관립학교뿐만 아니라 많은 사립학교들이 관보나 민간 신문에 학생 모집 광고를 게재하여 공개적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는 새로운 시도였다. ⓒ프레시안

퇴학과 출학(黜學) 등 처벌 규정은 대단히 엄격했다. 중도에 자퇴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했으며, 질병이 있거나 부득이한 사고가 있는 경우에도 생도와 보증인이 연서하여 청원하면 질병과 사고를 검사하여 확인한 뒤에 교장이 허락하도록 했다. 졸업 전에 다른 학교로 전학한 경우, 품행이 좋지 않아 여러 차례 경고(屢度戒飭)했는데도 뉘우치지 않는 경우, 교칙을 위반한 경우, 학업이 부진해서 연속 3학기를 진급하지 못한 경우, 무단결석이 일주일이 넘는 경우 등에는 교장이 출학을 명한 뒤 학부에 보고하여 관보에 싣도록 했다. 게다가 출학 처분을 받으면 관립뿐만 아니라 사립 각종 학교에 취학치 못하도록 했고 각 관청(府部院廳)에 알려 취업하지도 못하게 했다.

시험은 월종(月終) 시험, 학기말 시험, 학년말 시험 세 가지가 있었으며 세 가지 시험 결과 모두 학부에 보고토록 했다. 학기말 시험과 학년말 시험에 진급하지 못한 생도와 질병이나 부득이한 사고로 시험을 보지 못한 생도는 유급을 시켰다. 그리고 졸업시험은 3학년 말에 모든 학과목을 대상으로 치렀다. <규칙>에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필기도구 외에 어떠한 물품도 지니지 못하도록 했다. 의과대학은 시험이 많고 엄격하기로 유명한데, 이때부터 확립된 관행이었다.

▲ <의학교 규칙> 중 재학·퇴학·출학(黜學)·처벌과 시험·졸업에 관한 규정. 지나치다할 정도로 엄격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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