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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시체들, 그만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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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시체들, 그만 길을 잃다

[프레시안 books] 김중혁의 <좀비들>

<좀비들>(창비 펴냄)은 등단 11년차에 접어든 김중혁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가의 문학적 야심은 마지막 쪽, 작가의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것은 좀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랄 만한 말은 아니다. 좀비 이야기는 언제나 좀비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불가해한 타자에 대한 공포이거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은유였다. 그렇다면 김중혁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대답은 바로 다음 문장에 있다.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좀비들>이라는 제목을 쓰고 있지만 장르의 공식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신실한 독자의 입장으로 작가의 말을 따라 읽는다면 <좀비들>의 되살아난 시체는 잊히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고 사람이며 그들의 죽음일 것이다.

▲ <좀비들>(김중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통신 회사 '에볼(EVOL)-LOVE를 거꾸로 쓴 것? 혹은 '소닉유스'의 세 번째 앨범 제목?-감식반에서 일하는 '나', 채지훈은 외로운 남자다. 업무용 밴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비게이션에 표시되는 안테나 수신 감도를 측정하는 그에게는 돌아갈 집과 가족이 없다. 해가 있는 동안엔 차를 달리며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차에서 잠을 잔다. 그는 돌아보지 않기 위해 고립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옛날 이야기를 해야 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옛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를 지워버려야만, 어제 이전의 모든 일들을 깊은 땅속에 묻어버려야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5쪽)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과거와 절연된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유일하게 깊은 땅속에 묻어버리지 않은 것은 형이 남긴 50장의 엘피판(LP)뿐이다. 그것은 박제된 기억이다.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과거의 기념품. 하지만 체호프가 이야기했듯 "작품에 총이 나온다면 그 총은 발사되어야만" 하고 엘피판이 나온다면 그것은 플레이되어야만 한다. 김중혁은 여러 단편들에서 선보인 바 있는 기발한 상상력을 다시 한 번 펼친다. 차량용 턴테이블인 '허그 쇼크(Hug Shock)'가 바로 그것. 우연히 광고를 보고 찾아간 '나'에게 대리점의 판매원은 설명한다.

"충격 완화의 신기원을 이룬 제품이라고 설명하면 어떨까요. (…)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충격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거예요.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12쪽)

<좀비들>의 이야기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허그 쇼크'를 장착한 순간. '스톤 플라워'의 엘피판을 플레이하는 순간.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어제로부터의 노래, 죽음과 이어진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오르페우스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지옥까지 쫓아가 기어이 뒤를 돌아보는 존재다. 따라서 형이 사랑하던 스톤 플라워의 음악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가사를 모두 외울 지경"이 된 순간 시작되는 '나'의 모험은 애써 외면해왔던 기억, 형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온몸으로 마주보고 끌어안기 위해 떠나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이 될 것이다.

허그 쇼크는 내 삶도 바꾸었다. 형이 없었다면 LP가 없었을 것이다. LP가 없었다면 허그 쇼크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허그 쇼크가 없었다면 홍혜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홍혜정이 없었더라면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14쪽)

'나'의 말처럼 도미노는 계속해서 쓰러진다. 스톤 플라워는 역사 도서관으로, 사서인 뚱보130에게로, 스톤 플라워 리더의 자서전을 번역한 홍혜정에게로, 그녀가 사는 곳이자 어떤 통신도 잡히지 않는 '무통신 지역' 고리오 마을로, 의문의 노인인 케겔과 제로에게로, 마을 사람들이 죽는 순서를 맞추는 '다이토 게임'으로, 홍혜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녀의 딸 홍이안에게로 쉼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딸깍, 마침내 좀비가 등장한다. 103쪽. 홍혜정을 추억하며 홍이안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뚱보130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2층을 향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죽음 이후의 냄새"를 풍기며 앉아 있는 좀비를 마주한다. 그는 말한다.

혹시 좀비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건 엄청난 경험이다. 좀비와 대면한다는 건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 (105쪽)

작가가 좀비의 등장을 최대한 늦추며 그려왔던 '나'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비록 뚱보130과 홍혜정, 홍이안을 만나며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죽음이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 같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67쪽)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죽음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다이토 게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엄마처럼 따르던 홍혜정까지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좀비를, 죽음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소설적 순간. 그것은 독자에게 잠시 책장을 덮고 호흡을 가다듬을 것을 요구하는 마주침이다. 하지만 다시 펼친 책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히려 뚱보130을 독려하며 좀비와 맞서는 '나'의 모습이다.

"모르겠어. 침착해야 돼. 우선 해치우고 보자. 네가 몸 위쪽을 맡아. 내가 다리 쪽을 공격할 테니까." (106쪽)

"야, 찌르지 말고 머리를 후려쳐." (107쪽)

침착하게 머리를 후려침으로써 비교적 간단하게 좀비를 막아낸 '나'는 좀비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정당방위였다는 자기 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숨을 막히게 했던 죽음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는 방망이 끝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쾌감을 느끼며, 마을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뚱보130의 제안을 거절한다.

"일단 여기서 상황을 좀 지켜볼게. 저게 좀비인지 뭔지는 알아야지. 저게 어째서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그건 알아야지. 짐을 싸도 그때 싸야 할 것 같아." (114쪽)

바로 이 지점부터 소설은 길을 잃는다. 아니, 전혀 다른 소설이 된다. 초반 100쪽 동안 우리가 만난 주인공은 분명 죽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 받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그를 그답게 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흔한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물론 인물은 변한다. 문제는 변화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경구를 패러디라도 하는 것처럼. ("사는 대로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대처법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미노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빨라진다. 좀비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군인들이 마을을 봉쇄한다. 고립된 상황에서 홍이안과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음모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장군(정 장군)이 등장하고 좀비와 고리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이 차츰 윤곽을 드러낸다.

불가해한 실재의 침입이었던 돌아온 시체들의 존재는, 이제 진부한 군사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설명된다. 좀비들이 (작가의 말에서처럼) 마을 사람들이 잊고 있던,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궁금한 점. 군부대에서 좀비를 구해내 지하실에 가두고 특수 제작한 리모컨을 통해 그들의 공격성을 제어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과연 윤리적인가?)

사이사이 주인공은 엄마와 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으며 초반에 등장했던 '나'와의 연속성을 회복하려 들지만 그럴수록 이야기의 균열은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대면하기 위한 '나'의 오르페우스적 여정은, 어느 순간 '악의 축'인 '정 장군'과의 대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의 내면에 공감하지 못한다. 단지 복잡하게(동시에 익숙하게) 꼬인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것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학습된 관습적인 궁금함이다. <좀비들>에서 그 궁금증이 해소되는 과정 또한 그런 매체들이 제시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른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우는 동시에 삶이라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용기를 배운다. 그간의 깨달음을 정리하는 마지막은, 그것이 그리고 있는 장면 자체로 꽤나 감동적이다. 결국 이것은 다 큰 남자의 성장담이고(어디까지나 영화 <다이하드>를 존 매클레인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그리고 등가로서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오래된 교훈이다. 피할 수 없다면 마주보아야만 한다. 깨달음의 계기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아무려나, 채지훈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형이 없었다면 LP가 없었을 것이다. LP가 없었다면 허그 쇼크도 없었을 것이고, 허그 쇼크가 없었다면 홍혜정과 홍이안과 뚱보130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처음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이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도미노는 무엇일까. 마지막 도미노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375쪽)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도미노를 닮았다. 고만고만한 사건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하지만 우리가 도미노를 보며 기대하는 것은 블록이 넘어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형태지 376쪽만큼의 직선이 아니다. 흔한 음모론을 향해 달려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속에서 장르의 쾌감은 물론, 잊고 있던 기억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까지도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김중혁이 <펭귄 뉴스>(문학과지성사 펴냄)와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펴냄)에서 보여주었던 솜씨를 생각하면 그저 애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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