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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이완용…저승길에서 살아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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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아 이완용…저승길에서 살아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61] 이완용의 치료

이완용의 상처와 그에 대한 치료, 회복 경과 등은 대한의원 외과 과장 스즈키(鈴木謙之助)가 경성재판소 검사 이토(伊藤德順)에게 제출한 상해 '감정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스즈키는 1887년 의사 시험을 거쳐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뒤 한때 요코하마에서 개업을 했다가 1895년부터는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1900년부터 3년 동안 영국에 유학했던 스즈키는 1906년 광제원 의사로 임용되어(<황성신문> 1906년 8월 11일자에는 그를 "부인병 명의(名醫)"라고 했다) 한국에 왔다. 1910년 5월 19일 대한의원을 사직하고 회현동(旭町, 일제 시대 경성 제일의 환락가였다)에서 스즈키 외과의원을 개업했다.

감정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아, 스즈키가 1909년 12월 23일부터 이듬해 2월 14일까지 이완용이 대한의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주치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완용의 치료를 총괄 지휘한 사람은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菊池常三郞, ?~1921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쿠치는 선임 원장 사토 스스무와 함께 일본 외과계의 최고 권위자이자, 창상(創傷) 치료의 1인자였기 때문이다.

기쿠치는 1880년 도쿄 대학(제국대학으로 불리기 전이었다) 의학부를 졸업하고 1892년 "총창론(銃創論)"으로 도쿄 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제31호)를 받은 외과 의사이다. 일본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은 1888년부터이다. 제1호는 프러시아에 유학했던 내과 의사 이케다(池田謙齋)이고, 사토 스스무(佐藤進)는 제7호(제29회에서 언급했듯이 사토는 이미 1874년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인회(同仁會)의 사실상 설립자인 법의학자 가타야마(片山國嘉)는 제16호, 페스트균을 발견한 세균학자 기타사토(北里柴三郞, 제28회)는 제19호이다. (사토 스스무와 기타사토 역시 의료 침략의 첨병 구실을 한 동인회의 주요 멤버였다.)

그런데 기쿠치에 앞서 학위를 받은 30명은 따로 논문을 내지 않고 경력과 업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경우이다. 따라서 기쿠치야말로 요즈음 우리가 생각하는 정식 의학 박사 제1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쿠치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직후 일본으로 돌아가 니시노미야시(西宮市, 지금은 고시엔 야구장으로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다) 회생병원(回生病院) 원장을 지냈다.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 기쿠치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완용은 행운아였다. 또한 대한의원 설립의 최대 수혜자라고도 할 만하다. 게다가 국왕 순종은 측근을 대한의원에 보내 그의 치료 경과뿐만 아니라 치료비까지 챙길 정도로 이완용에게 알뜰살뜰 배려를 베풀었다.

대한의원의 의료진뿐만 아니라 일제 당국도 이완용의 치료에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완전한 병탄을 위해 일제의 최대 협력자인 이완용이 필요했으며, 이완용이 구축한 친일 인맥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이완용을 살려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의학의 능력을 과시하여 한국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 (왼쪽) 기쿠치가 지은 <실용외과각론-상권>(1908년, 제9판). 1891년 초판이 나온 이래 17년 사이에 9판을 찍을 정도로 당시 외과 의사들의 필독서였다. (가운데) 이 책의 465~470쪽에는 흉부의 천통적(穿通的) 창상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기흉(氣胸)과 혈흉(血胸)에 대해서는 늑골 절제, 세척 소독, 배농, 밀봉 붕대법 등의 처치술이 적혀 있다. (오른쪽) 기쿠치는 이밖에도 <외과수술서>, <총창론>, <붕대론> 등의 외과 분야 베스트셀러를 저술했다. ⓒ프레시안

스즈키가 작성한 감정서 2쪽에는 다음과 같이 창상 소견이 적혀 있다.

(1) 왼쪽 어깨뼈(肩胛骨) 안쪽 윗부분에 폭 7센티미터, 깊이 6센티미터의 날카로운 자창(刺創).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비뼈(肋骨) 사이를 관통하여 늑간동맥(肋間動脈)이 절단되어 많은 양의 출혈이 생겼다. 또한 폐가 손상되어 상처 구멍(創孔)으로부터 출혈과, 호흡에 수반된 공기 출입이 있었다. (혈흉(血胸)과 기흉(氣胸)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이 폐 손상에 의한 것인지 주변 조직의 손상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폐 손상에 대한 치료 기록은 보이지 않아 주변 조직의 손상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2) 오른쪽 등의 11번째 갈비뼈 견갑연부(肩胛緣部)에 폭 3센티미터 깊이 6센티미터의 자창. 근처에 있는 신장에는 다행히 손상이 없었다. (3) 오른쪽 등의 12번째 가슴등뼈(胸椎)에서 오른쪽으로 4센티미터 떨어진 부위에 폭 2.5센티미터 깊이 5센티미터의 자창. (4) 둘째와 셋째는 일견 별개의 상처로 보이지만 하나의 자창이며, 이런 사실은 수술을 하면서 발견한 것이다.


감정서 3쪽에는 손상을 일으킨 흉기로 예리한 첨도(尖刀)가 지목되어 있다. 또 창상의 경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입원 당일인 12월 23일, 창상 안의 삼출물(滲出物)과 응혈을 치료하기 위해 두 군데 자상 부위를 상하좌우로 절개해 내용물을 제거했다. 1월 20일 압통(壓痛)과 탁음(濁音) 등 이학적(理學的) 증상이 심해져 천자술(穿刺術)로 혈성 장액(血性漿液) 700밀리리터를 뽑아내었다. 그 뒤 상태가 점차 좋아졌지만 타진(打診)할 때 여전히 탁음이 들리며 때때로 열이 나는데 이러한 증상은 외상성 늑막염에 기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쪽에는 외상성 늑막염에 따른 증상이 예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염증성 삼출물이 완전히 흡수되면 후유증이 없을 수 있지만, 그 여부는 시일이 좀 더 지나야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감정서가 한국에서 작성된 흉부외과 관련 최초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보다 24년 전인 1886년 알렌과 헤론은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서 폐농양(肺膿瘍) 때문에 제중원에 입원한 40세 여성 환자를 개방성 배농술(排膿術)로 치료하여 좋은 효과를 거두었음을 보고한 바 있었다.

▲ 대한의원 외과 과장 겸 대한제국 황실 전의(典醫) 스즈키(鈴木謙之助)가 1910년 2월 14일 경성지방재판소에 제출한 이완용의 상해 '감정서'. 창상 소견(2쪽), 경과(3~4쪽), 예후(4쪽)가 비교적 상세하게 적혀 있다. ⓒ프레시안

감정서에 따르면, 이완용은 이재명에 의해 두 군데에 자상을 입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재명이 한 진술이나 초기의 신문 보도와는 차이가 있다. 이재명은 이완용을 여러 차례 찔렀지만 그 가운데 두 번만이 유효했던 셈이다.

두 군데 상처 가운데 허리 부위의 것은 그리 심하지 않았고, 왼쪽 어깨 부위의 자상이 상당히 심각했다. 늑간동맥 절단으로 생긴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면 이완용은 절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지혈이 되어 목숨을 건진 것으로 여겨진다. 감정서에 출혈을 막기 위한 처치가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또 늑간동맥이 그리 큰 혈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절단된 늑간동맥은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보다 더 말초 부위의 더 가는 혈관이었을지 모른다) 자연 지혈의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그렇더라도 그 뒤 적절한 의학적 조치가 없었다면 경과는 달랐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능한 의사들이 이완용을 돌보았기 때문에 비교적 순조롭게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 (왼쪽) 이완용이 입은 자상(뒤쪽에서 본 것). 왼쪽 어깨뼈 안쪽과 오른쪽 허리 부위의 상처가 표시되어 있다. 흉강(胸腔) 왼쪽 아래에는 혈성 삼출액(빨간 색)이 고여 있다. 어느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것을 인터넷(http://blog.naver.com/sadces/)에서 구했다. (오른쪽) 흉부(胸部)의 혈관. (A) 대동맥 (2) 왼쪽 쇄골하동맥 (3) 왼쪽 총경동맥 (9) 왼쪽 늑간동맥. 단도가 왼쪽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비뼈 사이를 관통하여 늑간동맥이 절단되어 심한 출혈이 생겼다.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면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따라갔을 것이다. ⓒ프레시안

▲ <Illustrated Catalogue>(1910년경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에 나와 있는 흡입 천자(穿刺)용 바늘. 이완용의 흉부에 생긴 삼출물을 제거한 천자술에도 이런 종류의 바늘이 쓰였을 것이다. ⓒ프레시안

이완용은 피습 이틀째인 23일 낮 12시에 대한의원에 입원하여 수술 등 치료를 받았다. 감정서에는 사건 발생부터 24시간 동안의 치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당시 사건 현장인 명동 성당 가까이에는 지금 세종호텔 근처의 찬화병원(원장 후루시로, 제48회)과 지하철 4호선 명동역 6번 출구 인근의 한성병원이 있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사건 발생 뒤 이들 병원이나 대한의원이 아니라 옥인동의 자택으로 실려 간 것으로 보인다. 조금 불확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건 직후의 상황을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동아일보> 1924년 11월 15일자 기사 "연명한 이완용과 미결수 이동수 (4) 대한의원 외과원장 국지씨(菊池氏) 주치 하에 며누리가 모시고 구병해"이다. (사건 직후 피신했던 "공범" 이동수가 근 15년 만에 체포된 뒤 사건을 되새기는 기사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의 피습 뒤 모두가 우왕좌왕하다 결국 이완용을 들 것에 떠메고 옥인동 집으로 갔다. 집에 옮겨진 이완용은 온몸이 피투성이로 상처 부위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혼수상태에 온기도 없고 사지가 굳어 있어 죽은 듯이 보였다. 그 상황에서 비서 시라이(白井友之助)가 칼로 옷을 찢어 상처가 두 군데임을 확인했다. 감정서와 약간 차이가 나지만 비교적 정확한 관찰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의사에게 연락을 한 것으로 이 기사는 말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24년 11월 15일자 기사 "연명한 이완용과 미결수 이동수". 이 기사는 주치의가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였으며, 부원장 다카카이(高階經本, 도쿄 제국대학 출신의 내과의사)도 진료에 참여했다고 했다. ⓒ프레시안
명동에서 인왕산 아래의 옥인동까지 (이완용 집의 위치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황성신문> 1909년 10월 1일자에 의하면,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0월에 남산의 노인정(제49회)에서 옥인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 것에 떠메고 갔다면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또 집에 도착해서도 한참 지나서야 의사에게 왕진을 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 의학적 조치는 없었다. 따라서 이완용이 죽지 않은 것은 일단은 천운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기쿠치 등의 의술 덕택에 이완용은 50여 일 만에 거의 완쾌될 수 있었다. 즉사를 면한 뒤의 치료는 오늘날에는 크게 어렵지 않지만, 항생제도 설파(sulfa)약도 정맥을 통한 수액요법(輸液療法)도 없었던 당시로는 대단히 까다로운 것이었다.

왜 이완용을 병원이 아닌 자기 집으로 옮겼던 것일까?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아 집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병원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긴 때문이었을까? 1903년 고종의 총신인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 1854~1907년)이 한성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곳에서 테러로 보이는 폭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의 일이 이완용의 병원 행을 막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출혈이 너무 심해 소생의 가능성이 없어보여서 집으로 "모셔진" 것일까? <동아일보> 기사대로 우왕좌왕하다 집으로 가게 된 것이 정답일지 모른다. 항상 피습당할 것을 염려했지만 체계적인 대책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완용이 집으로 옮겨진 뒤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와 외과 과장 스즈키가 밤을 새워 이완용을 치료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앞서 한성병원 의사가 먼저 도착하여 치료를 했다는 설도 있다. 한성병원 의사라면 원장이자 외과 의사인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의 가쿠다(鶴田善重)일 것이다. 가쿠다는 몇 달 뒤인 5월 30일 스즈키의 후임으로 대한의원 외과 과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의 공로 때문이었을까?

집에서 1차 조치를 받은 이완용은 그 다음날 대한의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고 삼엄한 경계 속에서 2월 14일까지 병원에 머물렀다. 예후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일단 거의 완쾌된 상태에서 이완용은 퇴원했다.

▲ <황성신문> 1909년 12월 24일자. 이완용이 23일 낮 12시에 한국인과 일본인 경찰이 도열하여 이동 경로를 경계하는 가운데 담가(擔架)에 실려 (옥인동) 집에서 대한의원으로 옮겨졌다고 보도했다. 또 입원 뒤 원장 기쿠치 이하 의료진이 대수술을 시행하여 생명을 구했으며 맥박, 호흡, 체온 등도 점차 정상으로 회복 중이라고 했다. 대수술이란 스즈키의 감정서에 따르면, 두 군데 자상 부위를 상하좌우로 절개해 삼출물과 응혈을 제거한 것이었다. ⓒ프레시안

이완용의 입원 치료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증언이 한 가지 있다. 대한의원 교육부를 1907년에 졸업한 박계양(朴啓陽)은 50여 년 뒤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완용이 자객에 자상을 입고 대한의원에 입원했을 때 수술실 문은 박종환이 지켰고 병원 외곽은 일본 군경이 삼엄하게 경비했다. 그날 밤 병원 의사들과 함께 큰 방을 차지하고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 급히 달려와 묵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방을 비워주게 되었다." (한국 의학의 선구자를 찾아서 (1), <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7호, 1962년)

박계양은 대한의원의 정식 직원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비정규직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환은 당시 황실 전의로 대한의원 소속은 아니었다. 첫날 이완용의 집으로 전의 2명도 왕진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박종환일 가능성이 있다. 박종환이 일본 유학으로 일본어에 능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진료보다는 통역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천도교도 박종환은 얼마 뒤 사건 연루자로 의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60회)

▲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찍은 것으로 보이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맨 왼쪽)과 친일파 고관들. 해쓱해진 이완용 옆으로 임선준(任善準), 이병무(李秉武), 송병준(宋秉畯)이 나란히 앉아 있다. ⓒ프레시안

지난번 제60회의 이재명 사진은 흥사단의 창단 멤버(제6호 團友)로 미국에서 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양주은(梁柱殷)이 소장했던 것이다. 이재명과 안창호와의 관계를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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