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어제 강의 시간에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신디 메스턴·데이비드 버스 지음, 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공저자이자 내 스승인 미국 텍사스 대학교 교수 데이비드 버스를 언급하면서 정작 그의 최신 저서가 얼마 전에 번역·출간되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책 제목만 들은 학생들이 그 제자인 나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사실, 여자든 남자든 섹스를 하는 이유는 빤하다고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쾌락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을 사랑해서, 혹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다. 그 밖의 다른 이유는 없거나, 있어도 아주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저자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여성의 성애를 연구하는 심리생리학자 신디 메스턴과 인간의 짝짓기 전략을 연구하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5년에 걸쳐 3000명이 넘는 피험자를 조사한 대규모 협력 연구를 통해 여성의 복잡하고 다양한 성적 동기 237가지를 밝혀냈다.
빈번하게 언급된 동기로서 "섹스가 즐거워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 "상대를 만족하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의 외모에 반해서" 등이 있었다. 많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동기로서 "에이즈나 헤르페스 같은 성병을 옮겨주기 위해", "두통을 없애려고",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직업을 얻기 위해", "관계를 끝장내려고", "섹스를 하면 돈을 준다기에", "내기에 져서", "강제로 복종 당하고 싶어서",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 "경쟁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다이어트 하려고", "나 자신을 벌주기 위해", "남편이 하도 들볶아서" 등이 있었다. 이 책은 다채롭기 그지없는 여성의 성행위 동기 237가지를 상대방의 특성, 성적 쾌감, 정서적 유대, 정복, 질투, 의무감, 자부심 상승, 교환 등 열한 가지 묶음으로 크게 나눈 다음, 각각의 묶음들을 진화 이론, 임상 의학, 심리학, 생리학 등의 이론 틀로 상세하게 분석한다.
▲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신디 메스턴·데이비드 버스 지음, 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
예를 들어 보자. 자원을 얻는 대가로 섹스를 허락하는 교환 행위의 한 가지 예로 저자들은 다음 반응을 든다.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남편이 반대할 것 같으면 섹스를 해 줍니다. 그를 설득하거나, 방임 하에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수를 쓰는 거죠." – 이성애자 여성, 31세 (271쪽)
"여자라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에 배우자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 줘야 하는 상황이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어디 가서 저녁을 먹을지 결정하는 일부터 말이죠." – 이성애자 여성, 25세 (272쪽)
이토록 생생한 목소리를 들은 독자들은 성을 매개로 자원을 얻는 교환 행위는 정직한 연애 혹은 매춘으로 딱 부러지게 경계를 짓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결론에 기꺼이 동의하기 마련이다.
이 책의 의도가 여성이 왜 섹스를 하는가 살펴보기 위함이니만큼, 여성의 성행위 동기들을 열한 가지로 세분한 다음에 장마다 설명을 담는 형식이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인지 필자로선 이 책이 하나의 단일한 이론 틀을 바탕으로 탄탄하고 야무지게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다.
특히, 두 저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저술한 게 아니라, 각자 업무를 나누어 어떤 장은 메스턴이 맡고 어떤 장은 버스가 맡는 바람에 진화심리학과 심리생리학의 유기적인 결합은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어떤 장은 진화심리학 설명이 대세이고 다른 어떤 장은 심리생리학 설명이 대세임을 눈치 챘을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진화심리학과 심리생리학이 번갈아 나오는 코스 요리이지, 두 학문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상승효과를 내는 창조적인 퓨전 요리는 아니다.
성적 희열과 오르가슴을 논의하는 2장('그 짓의 즐거움')을 예로 들어보자. 저자들은 (사실은 메스턴) 여성이 성적으로 흥분하고 오르가슴을 느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부, 젖가슴, 생식기, 음핵, 질의 생리적 변화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오르가슴에 따른 심리적 변화, 오르가슴을 잘 느끼는 방법, 일부 여성들이 오르가슴 장애를 겪는 까닭도 친절히 알려준다.
하지만, 여성의 오르가슴에 대한 진화적 설명은 2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두세 쪽에 걸쳐 언급될 뿐이다. 그전의 심리생리학 부분에서 나오는 여러 흥미로운 사실들–예컨대 여자는 삽입 성교보다 음핵 자극을 통해 훨씬 더 쉽게 오르가슴에 도달한다, 여자는 남자와 달리 오르가슴을 누리는 방법을 열심히 학습해야 한다 등–을 그냥 나열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 사실들을 진화적인 관점에서 설명할지 함께 논의했더라면 더 유익했을 것이다.
메스턴과 버스는 종종 미묘한 불협화음도 낸다. 저자들이 머리말에서 밝히는 대로,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교 심리학과 건물에서 메스턴 심리생리학 실험실과 버스 진화심리학 실험실은 바로 이웃해 있다. 두 저자는 무척 친한 사이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신디 메스턴은 여성의 성행동 장애를 주로 탐구하는 심리생리학자이자 임상심리학자일 뿐, 인간 심리에 대한 진화적 접근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는 아니다.
그래서일까, 메스턴이 주로 쓴 것으로 보이는 몇몇 장들에서 진화적 설명은 그저 고만고만한 여러 설명 가운데 하나로 건조하게 취급될 뿐이다. 예컨대 6장('의무감')에서 저자는 대개 남편이 아내보다 섹스를 더 바란다고 전제한 다음에 "남자들이 더 높은 성 충동을 갖도록 진화했고, 섹스를 주도하면서 더 편안함을 느끼도록 사회화되었다면 불가피하게도 여자들은 원하지 않는 섹스에 응해야 할 때가 더 많을 것이다"(205쪽)라고 설명한다. 다른 곳에서 저자는 "여성들은 보살피는 사람이 되도록 사회화된다"(209쪽)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인간 행동을 설명하고자 할 때 본성과 양육의 이분법을 일단 높이 설정하는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설명 방식이다. 즉, 성 충동을 만드는 호르몬이나 뇌의 배선 양식은 어느 정도 생물학적 진화에서 기인할지 몰라도 본성의 영향력은 거기에서 멈춘다. 인간이 정작 어떤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사회화되느냐에 따라 최종적인 행동 결과물은 양육에 의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이른바 '빈 서판 주의(Blank slatism)'이다.
메스턴은 인간 행동이 사회화나 학습, 문화에 의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진화적인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할 연구 대상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섹스를 주도하게끔 사회화되기 쉬운지, 왜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남을 잘 보살피게끔 사회화되기 쉬운지는 궁극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할 현상들이다.
진화심리학자인 필자로서는 데이비드 버스가 주로 쓴 것 같은 장들이 어쩔 수 없이 더 편안하게 다가왔다. 인간 성행동의 진화심리학 연구 내용은 버스의 저서 <욕망의 진화>(전중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같은 여러 책을 통해 국내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지식이 또 재탕 되지나 않았을까 봐 우려되어 책을 선뜻 들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다행히, 버스는 배란 주기에 따른 여성의 욕망 변화 같은 최신 연구 성과들을 충실히 반영하여 여성의 성행동에 대한 한층 더 새롭고 흥미로운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다. 특히 1장('여자는 무엇에 흥분하는가?')는 국내에 번역된 다른 어떤 진화심리학 대중서보다 여성의 배우자 선호에 대해 가장 신선하고 업데이트된 설명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여성들은 연인을 고를 때 어떤 냄새가 나는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삼는다든지, 여성들은 어깨 대 엉덩이 비율이 높은 이른바 V자형 몸통에 성적으로 끌린다든지, 노래 잘하는 남성보다 바리톤의 그윽한 저음 목소리를 가진 남성에 더 끌린다든지 등의 발견들은 남녀 독자들 모두에게 유용한(?) 지침을 제공할 듯하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여성이 섹스하는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 진화 심리학과 심리 생리학의 관점에서 유쾌한 설명을 제공한다. 두 학문적 시각이 완전히 섞이고 어울리기보다는 종종 서로 데면데면하게 따로 논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우리가 모두 궁금해 하는 주제에 대해 부담 없이 한 번 쭉 훑어보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버스나 지하철에서 대놓고 펼쳐 읽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한국 여성 100명에게 '왜 하느냐' 물었더니… "왜 섹스를 합니까?" 이 도발적인 질문에 한국의 20~40대 여성의 46%는 "육체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라고 답했다. "남편, 남자친구와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서"(36%), "남편, 남자친구가 졸라대서 할 수 없이"(22%),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거나 표현하기 위해서"(20%) 등의 대답이 뒤를 이었다. '프레시안 books'와 사이언스북스가 여론조사 전문 기관 '디오피니언'에 의뢰해 20~49세 여성 100명에게 '여성이 섹스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 조사는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정병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출간에 맞춰 이뤄진 것이다. 조사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성들이 섹스를 하는 이유로 많이 답한 응답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육체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46%), "남편, 남자친구와 애정 확인을 위해서"(36%), "남편, 남자친구가 졸라대서 할 수 없이"(22%),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거나 표현하기 위해"(20%) 등이 많았다. 이런 한국 여성의 응답은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에서 많이 언급된 성적 동기와 일부 겹친다. 버스, 메스턴 교수의 연구에서도 여성은 "상대에게 애정을 느껴서", "육체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등의 응답이 가장 많았다. 한국 여성의 소수 응답도 흥미롭다.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6%), "아이 출산을 위해서"(3%), "화해하기 위해서"(2%), "스트레스 해소"(2%). "남편과의 유대감 강화, 부부의 삶을 유지해 주는 수단이므로"(2%),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1%), "다이어트"(1%), "나도 여자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1%) 등의 응답이 있었다. 연령대별로 살펴본 성적 동기의 차이도 흥미롭다. 20대 여성은 "육체적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51.6%), 30대 여성은 "남편, 남자친구와 애정 확인을 위해서"(45.7%), 40대 여성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11.8%)라고 답한 비율이 다른 연령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특히 40대 여성은 다른 연령대와 비교했을 때 섹스를 하는 이유도 좀 더 다양하게 응답했다. "화해하기 위해서"(5.9%), "스트레스 해소"(5.9%), "남편과의 유대감 강화, 부부의 삶을 유지해 주는 수단이므로"(5.9%)와 같이 섹스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번 조사는 지난 9월 9일에서 11일 사이 20세에서 49세 여성 100명(20~29세 : 31명, 30~39세 : 35명, 40~49세 : 34명)을 상대로 이뤄졌다. 이들 100명은 질문("여자가 섹스를 하는 이유")에 복수로 응답했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9.8%P이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