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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하는 목소리, 뒤집어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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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하는 목소리, 뒤집어지는 세상

[프레시안 books] 김진호의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

성서를 읽으면 바보가 된다

"성서는 나쁜 책이다. 사람들의 머리를 화석화시키고 그 의식을 노예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머리는 비어가고 사고는 폐쇄적이 되어간다. 성서를 땅 속에 파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은 빈사 상태로 빠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성서는 그런 책의 구실을 하고 있다. 성서 내면에 담긴 혁명적 영성은 이로써 주살(誅殺)되고 말았다. 성서 자체에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그 성서를 읽는 눈과 그걸 전하는 입이 성서를 그렇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야말로 성서 모독이다.

오늘날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은 교회를 갈 수 없다. 예외가 있긴 하나 교회 강단을 쥐고 있는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너절하거나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도 속아 넘어간다. 교회에 돈을 잘 내는 사람이 축복받고 착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워낙 유치해서 새삼 거론하고 싶지도 않지만, 성서의 메시지를 마구잡이로 왜곡하는 지점까지 가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들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하고 난 다음 성서의 구절을 그에 맞게 대충 끼워 인용하거나 자신의 말에 대한 권위를 세우기 위해 덧붙일 뿐이다. 성서는 이런 목사들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김진호의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삼인 펴냄)는 이런 성서 모독에 정면으로 맞선다. 성서에 담겨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서 그 뜻을 각자가 깊숙이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그래야 교회가 주도하고 있는 성서 해석의 기만적인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성서가 티끌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경전 또는 정전으로 떠받들어지는 바람에 폐쇄당한 해석의 힘을 복원시킨다. 이는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누리고 있는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도전이다. 그래서 그것은 단순히 "성서 뒤집어 읽기"가 아니라 "세상 뒤집기"의 일격이 된다. 본래 예수는 "세상 닮아가기"가 아닌 "세상 뒤집기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점에서 김진호는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다.

욕망의 선전에 앞장서는 한국 교회
▲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김진호 지음, 삼인 펴냄). ⓒ삼인

전부는 아니라는 전제를 달고, 한국 교회의 강단은 성서가 일깨우는 말씀이 아니라 욕망의 선전 문구로 도배되고 있다. 성서는 이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추진력의 날개를 달아주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탐욕을 끌어안고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이들이 지배하는 질서를 축복한다.

이 질서에 저항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니라고 설득 내지는 위협 당한다. 한국 교회, 특히 대형 교회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아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권력 지도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가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보면 드러난다. 이러한 현실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다름 아닌 성서다.

성서는 그 질서가 만든 사다리를 얌전하게 올라가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역할을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없는 권위로 변질되었다. 이에 맞서 성서의 내면을 탐구하는 정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성서를 본다는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으로 비난받거나 이단으로 몰린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는 교회와 정치의 거리를 유지해야한다고 부르짖지만 기득권을 위한 정치에 아낌없는 환호와 지지를 보낸다.

성서는 이로써 짓밟힌다.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강하고 부한 자들에게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진흙탕에 빠져 빈손으로 유랑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성서는 이들 교회의 성서 속에서는 삭제되거나 편집된다. 그런 구절은 성서에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서의 비밀에 대해 사람들은 침묵을 익히거나 강요당한다. 그 비밀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대부분이 가짜이거나 거짓이라는 걸 폭로하는 힘이 성서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누구에게 다가갔으며 누구를 질타하고 무엇을 희망으로 내세웠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성서라고 불리는 책은 물리적으로는 펼쳐질 수는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열릴 수는 없도록 되어 있다. 성서는 열린 책처럼 알려지고 있지만 "닫힌 책"으로 남겨져 있다. 그걸 진실로 열고자 하는 사람은 교회의 권력에 의해 추방되거나 파문되는지 아니면 주변인으로 머물도록 보이지 않는 족쇄가 채워진다.

김진호는 그런 "처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이 닫힌 책을 열고 있다. "성서 구출 작전"을 펴고 있는 격이다.

"막나가는 시장", 그 이름은 교회

이런 작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번 보라. 강남의 한 대형 교회 목사는 자신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강남에서 설교한다"고 "할렐루야"를 외친다. 강북에서 설교하면 저주받은 모양이다. 또 시골에서 가난한 목회를 하는 이들은 할렐루야를 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교회는 또다시 엄청난 돈을 들여 더 큰 규모로 교회를 짓는다고 법석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고뇌하고 아파하는 문제에 대한 성찰과 헌신은 일체 없다. 교회가 커지기만 하면 그로써 임무를 다한 것으로 여긴다. 자기들끼리의 성채를 짓고 그것으로 신나하는 것으로 기뻐한다. 예수는 그런 교회에서는 어느 한 귀퉁이에 서 있을 자리조차 없다.

교회는 그렇게 해서 "막나가는 시장"이 되고 있다. 이른바 잘 팔리는 설교를 통해 신도라는 이름의 소비자를 모아, 이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면서 현실의 모순에 철저하게 눈감도록 만든다. 아편이 따로 없다. 종교는 정치에 무관해야 한다면서 세상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갈망만 있으면 산다는 식이다.

그 하나님 나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고" 하는 예수의 기도는 이 하나님 나라 정체를 밝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후의 세계로 한정되어 있을 뿐, 현실에서 씨 뿌리고 일궈나갈 혁명적 대안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예수도 만일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고했다면 십자가는 하늘이 내린 그의 운명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와 그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은 신도들을 자기들 말을 그대로 받아먹는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소멸시키고 있다. 신앙인은 어느새 그런 과정을 통해 노예가 되고 있는 중이다.

노예는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다.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는 지배하기 쉽다. 그런 까닭에 적지 않은 곳이 물음을 던지지 않고 굴종적으로 순응하는 노예들이 사는 마을이 되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는 책을 읽어도 그건 글자와 내용을 읽을 뿐이지 그로 인해 새로운 생각을 다듬어나가는 체험은 생각하기 어렵다.

성서는 그냥 책이어야 한다

김진호는 이런 현실을 "독서 행위는 있으나 독서는 없다"라는 말로 압축한다. 성서 텍스트깊이 읽기는 이런 독서 행위에서 탄생하지 못한다.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성서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정전 해체"를 주장한다.

모든 인위적 권위를 무장 해제시킴으로써 성서는 "그냥 책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발언에는 이 책이 인간의 숨결과 어울려 그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독선적인 자기 형성에 이르지 않도록, 타자에 대한 배려와 자기 형성이 어우러지는 성서읽기"가 될 수 있는 방법에 고뇌한다.

이런 김진호의 주장과 발상은 예수의 발상과 그대로 일치한다. 예수는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경전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신약이라고 부르는 예수 운동의 증언 속에 우리는 예수가 성서 인용보다는 일상의 삶과 체험에 녹아있는 이야기들을 보다 많이 풀어내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씨 뿌리고 고기 잡고 나무가 자라며 누룩이 번지는 그런 일상의 세계,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멀리 갔다가 돌아오고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살아나는 그런 삶 속에 숨 쉬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원형을 볼 수 있도록 각자의 성찰이 요구되는 이야기들을 했던 것이다.

그건 그저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속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의외의 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걸 깨우치는 힘은 경전에 대한 권위에 머리 숙이고 그걸 떠받드는 종교 행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건 잘 듣고 잘 읽고 잘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능력이다. 이야기를 읽거나 접한 이들의 주체적 성찰의 차원이 주시되는 것이다.

김진호 역시 이런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다. 그래서 교회가 공식화한 해석의 틀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거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놓쳐버린 목소리를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잘 듣고 그 목소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성서 읽기의 귀중한 목표로 설정한다.

교회의 전통이 격하시켜온 인물들

가령 그는 아브라함이 후손이 없어 사라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취하는 이야기에서 "타인의 꿈으로 그 인생이 소모된 여인"을 본다.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사라는 정통이요, 하갈은 방계라고 구별 짓고 하갈의 삶은 무시해도 좋은 것쯤으로 격하시켜왔다. 그러나 김진호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씨받이로 소모되는 그 아픔을 파고들어 하갈의 침묵당한 육성을 듣는 일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하갈이 정통적 권위를 갖지 못했다고 설정하는 순간, 하갈의 인생에 대한 주시와 평가는 주변부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시선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이렇게 소모되고 버려지는 이들에 대한 시선으로 이어져 그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기르게 된다. 한국 교회는 이런 시선 위에 서 있다.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의 쟁투에서도 김진호는 야곱에게만 주목하는 성서 읽기에서 조연처럼 취급받는 에서의 침묵 안에 있는 목소리를 듣는다. 야곱과 에서의 재회에서 김진호는 에서가 야곱을 형제애로 받아들인 그 모습에 담겨 있는 화해와 평화의 정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김진호의 성서 읽기는 주류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미 공식화한 틀을 깨고 그것이 놓치고 있는 성서의 육성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유랑하고 있던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뜨거운 희망을 전했던 방식을 닮아 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억눌린 이들의 가슴에 맺힌 아픔을 풀고 해방의 복음을 완성시켜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해방의 고고학"과 제3지대

김진호는 그것을 "해방의 고고학"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 안에 은폐되거나 억눌린 이들의 목소리를 탐색해나가는 작업이다. 당연히도 이런 작업에 눈을 뜬 이들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언론이나 방송, 또는 여론이나 권력의 현실 규정 속에서 은폐된 진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그의 성서 읽기는 성서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읽기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김진호의 책이 영화와 소설에 대한 해석과 병행되어 있는 이유도 그런 해석의 유기적 논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김진호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독자 자신이 책을 읽고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통해 모든 것이 해명되었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책의 훌륭한 점이다. 그는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까지 최선을 다해 도달하고 거기서 새로운 질문을 찾아낸다.

그 질문은 놀라운 것이다. 성서조차 내버리고 은폐해버린 이들의 삶은 어찌할 것인가 하는 물음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면서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던 그 절규에 담긴 의미는 이로써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의 예리한 칼 앞에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태로 서 보는 일이 된다. 그 칼 앞에 오늘날 한국 교회도 한번쯤 서 본다면 지금의 민망한 모습은 다소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성서의 가치를 아예 외면하고 있는 이들 역시도 그 칼과 마주하면서 아득히 잊고 있던 혁명을 꿈꾸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제3의 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는 젊은 신학자 김진호의 이러한 시도가 끊임없이 충격을 주어 한국 교회의 고정관념이 세운 벽에 조금씩 틈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균열일지라도 계속 하다보면, 돌 하나도 남지 않는 날이 반드시 온다.

그 위에 예수의 몸으로 세운 교회가 새로 세워지고 그 몸이 피와 살로 쓴 역사가 시작되는 "그 날"이 오리라. 우리 손에 쥐어진 성서는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우리의 영혼에 기록된 혁명의 지침이 될 수 있다. 그 혁명을 통해 이 땅에 오는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자들에게만 성서는 불온하고 나쁜 책이 될 것이다. 불온하지 않으면 성서는 성서가 되지 못한다.

세상을 뒤집는 방법에는 이런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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