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이런 저런 사회적 책무를 벗은 후엔 강변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오래 전부터 꾸어왔다. 농사를 지을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강변에 살면서 그림도 그리고 벗들도 불러 귀하게 담근 술 한 잔 서로 건네며 정담을 나누는 미래를 갈망하게 된다. 읽고 싶은 책 쫓기듯 읽지 않으면서 맑은 강바람에 씻긴 흙냄새에 취해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살다 어느 날 아무런 집착 없이 평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하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인생이 어디 그리 쉽게 얻어질 수 있겠는가? 나이 들면 낯선 시골살이를 제대로 감당할 힘은 이미 없고, 그때쯤이면 웬만한 땅은 비싸져 엄두가 나지 않을 듯하고 무엇보다도 여기저기 강변이 유락 시설로 채워져 남아나는 곳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벌써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슬그머니 생긴다. 또 이런 생각과 꿈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그 틈을 뚫고 나가는 경쟁률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오늘날의 이런 현실은 과거를 돌아보면 기이하기조차 하다. 너도 나도 어떻게든 도시로 올라와 사는 것이 낙오하지 않는 길이라고 여기는 시대에 낙향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일찌감치 한 이들은 오늘날 도리어 선두에 서 있다. 자연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문명의 성취와 수준은 높아진다고 믿었던 때에 시골은 "후진 곳"이며 단지 개발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사고방식이 도리어 "후진 것"이 되었다. 예기치 못했던 역전(逆轉)이다.
정작 후진 것은 무엇인데?
▲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 : 역사지리학자 최영준의 농사일기>(최영준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
그런데 그 기록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무려 20년이다. 그건 어찌 보면 때가 되면 그리하겠노라가 아니라 마음먹었을 때부터 어떤 식으로든 시작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시작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수십 년을 도시의 논리에 맞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탈출하면 해결책이 자연스레 나온다고 여기는 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최영준의 글을 처음 마주한 것은 지난 해 여름에 나온 한길사 무크지 <담론과 성찰>의 원고를 통해서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 꿈꾸는 시골 생활이야 나이 들어 슬슬 시작하지 하던 생각이 뭘 모르고 하는 것임을 새삼 깨우친다. 일기란 그 사람만의 일상세계라는 점에서 자칫 읽는 이와 밀착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홍천강변이 보이는 듯 했고 흙냄새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은 나만이 아니라 그의 글을 읽은 이 거의 모두에게 유기농 양식이 되었다.
요즈음은 도시에 살다가 궁벽한 산골에 들어가 지내는 이런 농촌 생활기가 뭐 그리 희귀한 글은 아니게 되었다. 낙향이 아니라 귀농이라는 말로 압축되는 생활상의 변화가 지난 세월동안 우리 사회 내면에서 진행되어온 까닭이다. 그런데 최영준의 이 일기가 주목되는 까닭은 그 호흡이 어느 대목에서도 조급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며 긴 시간을 통해 홍천 시골 사람이 되어가는 변화가 차분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경야독이라…
어느 모임에서 초면으로 만난 최영준에게 글 잘 읽었다며 독자로서의 감상을 전했더니 겸손하고 소탈하게 웃는다. 농부가 된 지리학자의 미소는 그가 가꾸는 흙만큼 정겹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 읽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생활이 길러온 기운이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소박함과 진지함이 그 안에 숨 쉬고 있었다. 차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던 홍천강변 협곡 20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저력의 강이 그의 삶 속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좀 괜찮은 땅 있으면 알아봐줘, 하는 식의 질문이 던져진다면 그런 물음에 그의 대답은 이렇다.
"농토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우선 땅을 사랑해야 하고, 작물을 가꿀 만한 체력이 있어야 하며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또 작물이 자라는 과정을 애정으로 지켜보는 인내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산골 생활 20년의 체험을 장황하게 끼적거렸으나 이로써 내 기록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땅과 함께 하는 생활을 계속할 것이며, 하루하루 진정한 촌사람으로 변해갈 것이다."
땅에 대한 사랑, 작물을 길러낼 체력, 겸손함 그리고 애정이 깃든 인내라는 농부의 깨달음 속에서 그는 매일 "진정한 촌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꿈꾼다. 강남 고급 아파트와 명품에 대한 욕망으로 온 몸을 두른 이들이 "촌놈"이라는 말 속에 담는 경멸을 보기 좋게 되받아치는 격이다. 이런 기세가 사라진 시대에 그의 글은 흙과 강, 그리고 산과 나무와 밭을 선택한 이의 자존심과 그걸 미덕으로 만들어온 세월의 힘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준다.
조롱당했던 적막강산
그렇지 않아도 그는 책머리에 이런 소회를 적고 있다.
"내가 시골에서 단조로운 생활에 빠져 있는 동안 옛 친구들 중에는 고관으로, 경제적, 문화계의 저명인사로 이름을 낸 인물들이 적지 않다. (…) 그들 중 상당수는 폭넓은 사회생활을 즐겨왔다. 그런데 이제 모두들 은퇴하여 활동을 접게 되자 오랫동안 눈에 뜨이지 않았던 서생의 존재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니 기이한 일이다."
"협곡의 궁벽한 적막강산"에서 지내면서 그가 일구어낸 20년은 세월이 흐르니 누구나 탐내는 보물이 되었다. 그건 그가 한때 주변에서 "조롱"당했던 선택이었다.
최영준이 표현한 그 궁벽한 적막강산은 어떤 모양인가?
"팔봉산 기암절벽을 휘돌아 남쪽으로 내려온 홍천 강물이 원의 반 바퀴를 돌아 반복교에 도달하면 강폭이 넓어져 망상류(網狀流)를 이룬다. 강물은 병풍산지 앞을 지나고 쉼바위를 만나 흩어졌던 물길과 합치면서 방향을 남으로 돌려 뒷들을 스친 후 황새여울을 통과하고 밭베루산 자락 앞에서 둥글게 유로를 바꾼다. 여기서 홍천강 유로는 북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강변까지 바싹 다가선 절터산 줄기의 벼랑을 만나 다시 큰 포물선을 그리면서 모곡(茅谷)으로 흘러간다."
아, 가보고 싶지 않은가? 강원도 정선 동강 길을 따라 걷다보면 절경이 펼쳐지는 것을 가슴 벅차게 느끼게 되는데, 그와 닮은 최영준의 협곡 묘사나 그가 손수 그린 그림에서 우리는 안개내린 산봉우리와 푸른 잎 비취는 맑은 물가 그리고 겹겹이 이어진 계곡의 미로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저 가고 싶은 대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다. 알고 보면 이런 풍경은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이미 당시 개발되기 이전의 양재천 시골 땅을 준비해두었다가 도시 계획으로 그곳을 포기한 이후의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한길사 |
부창부수까지
당시 양재천 시골을 가자면 최영준의 말대로 그의 집이 있는 동대문에서 한나절이 꼬박 소요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때부터 그는 이런 식의 시골살이의 불편함을 일찍이 감수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건 실로 시대를 앞선 부러운 안목이고 진지함이다.
도시 계획으로 접은 그의 낙향의 꿈은 1990년 4월 홍천 산골의 어느 낡고 남루한 시골채를 구입하면서 새롭게 써진다. 도시 생활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 여성들과는 달리 미술가인 그의 아내가 홍천 계곡의 풍치에 반해 기뻐한 것도 단단히 한 몫을 한다. 찰떡 부창부수(夫唱婦隨)다.
그가 산골 늙은 농부에게 땅을 거저 붙여먹도록 하면서 농사를 배우는 이야기라든가 썩는 냄새가 나는 퇴비를 어느새 구수하다며 손으로 집어 뿌리게 되는 익숙함을 몸에 익히게 되는 과정이라든가 흙 속에서 인생 철학을 깊이 다지는 모습 등이 적혀 있는 그의 일기는 "일상이 주는 감격"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실패도 적혀 있다. 풋내기 농부의 고구마 농사 실패기도 있고 시골집 관리의 어려움도 고민한다. 그에 더해 사냥이나 투망에 대한 분노, 관행 농업에 대한 일침, 도시인들의 허세와 고생에 대한 젊은이들의 회피도 그의 시선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손에 책이 멀리 있는 적이 없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읽는 책은 유달리 강한 인상으로 그의 뇌리를 일깨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한 대목은 이렇게 짚어진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반입되는 모든 농산물은 생산지에서 깨끗이 다듬으면 농산물 찌꺼기를 토양으로 되돌려 비옥하게 하고 도시에서는 쓰레기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서울 가락동 시장 산더미처럼 쌓인 채소 쓰레기의 악취 풍기는 광경을 보면서 그의 시골살이에서 얻은 농사의 지혜가 이어진다. 책은 이렇게 해서 그의 몸이 된다.
이들 부부가 사는 모습도 부러운 대목이다.
"수년 동안 우리 부부는 거의 매주 시골로 주말 나들이를 해왔다. 좁은 차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화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 우리는 주말 대화의 소재를 찾기 위해 꾸준히 글을 읽는다. (…) 오늘 아내와 나는 앞으로는 남과 다투지 말고 지나치게 부를 축적하는 데 집착하지 말자고 했다."
주말 시골살이로 시작했던 홍천길이 이제는 그들의 전적인 삶이 되었다. 그러면서 지난 스무 해를 꼬박 서로 사랑하고 아낀다.
이런 대목도…
그의 일기에는 단지 홍천강변의 세월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치·사회적 격변과 변화에 대한 그의 생각과 소견도 끼어 있다.
나와 그의 생각은 여기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건 그대로 존중하고 싶다. 마음이 맑고 착한 이들이 격류가 흐른 역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리 투영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자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젊은 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보수 꼴통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4·19 때는 청와대 입구 통의동에서 시위대에 참여했다가 총격을 받고 숨진 청년의 시신을 옮긴 적이 있다. 교사 시절에는 박 정권의 철권통치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하여 경찰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나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는 천상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기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역사의 격동이 가져오는 힘겨움이 그에게 반가울 리 없고 그런 와중에 목격하게 되는 이들의 위선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건 그에게 "세상의 소음"으로 다가온다. 이 점은 언젠가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저 소음이기만은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지금은 그에게로부터 배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그의 삶은 여백이 있고 정직하며 흙 앞에서 겸손하기 때문이다.
최영준이 산골살이에서 깨친 대목 하나에 이런 것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밭갈이 하는 농부가 쟁기를 끄는 황소와 대화하고 심지어 논밭의 작물과 야생동물들과도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러한 대화는 일방통행적이어서 어찌 보면 정신 나간 사람의 독백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분명 인간이 자연과 친밀해지는 방법임에 틀림없다.
우리 시골사람들이 내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기까지는 5~6년이 걸린 것 같은데 내가 그들의 마음을 읽기까지는 아마도 10여 년이 걸린 듯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들만큼 감정이 순수하고 생각이 단순한 사람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 것이며 최 선생(그곳의 농부)은 아마도 촌사람화한 내 모습에서 친근감을 느낀 것 갈다."
ⓒ한길사 |
흙의 마음
진실에 속성은 없다. 소통에 거드름은 악이다. 자연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기까지도 적지 않은 세월과 체험이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우리 사회는 유행과 시장의 논리로 선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 까닭에 최영준의 20년이 지닌 가치는 소중하다. 도시가 농촌에게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진정으로 태어날까 싶다.
아무리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고 내로라는 지식을 과시한다 해도 흙의 마음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없다면, 또는 그 마음이 되지 못한다면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숱한 모순과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그러자면 흙을 사랑하고 그 흙과 마주해서 버틸 체력이 있어야 하고 애정과 인내를 배워야 한다는 최영준의 말은 되풀이 곱씹고 싶다. 오늘날 세상은 돈을 사랑하고 욕망을 채울 체력을 기르며 조급함에 너무도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한길사를 통해 홍천강변의 그의 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다른 일로 놓치고 말았다. 아쉬웠다. 그러나 그의 책으로 반의반쯤은 그 언저리를 다녀왔으니 언젠가 그곳에 가면 분명 낯설지 않은 풍경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는지 또한 기대가 된다.
이런 척박한 시대에 그의 20년 일기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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