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좀 지나쳐 보이는 남명 선생의 말씀은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리학의 이론적 완성자라 부를 수 있는 주자와 정자 이외에 이론적 논의에 힘쓰지는 말라는 이 말씀은 경(敬, 개인적 학문적 수양) 중심의 조선 유학의 담론에서 실천적 의(義, 경의 실천적 표출)를 동시에 강조한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침 퇴계와 고봉의 리기논변(理氣論辯)이 지루하게 계속될 때이니, 공허한 이론적 말싸움을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고 이름을 훔친다'라는 말씀과 이를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는 행위'(欺世盜名)라 하심과 같은 연장선에 있을 것입니다. 훗날 임진왜란에 영남에 불같이 일었던 의병들이 거의 선생의 제자들인 점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 <욕망하는 천자문>(김근 지음, 삼인 펴냄). ⓒ삼인 |
저는 아들이 신물 나게 배워 온 서구 중심 담론에서 타는 목을 추겨줄 교양의 텍스트로 이 책을 선물했습니다. 천자문은 중국의 고전에서 핵심을 추려 시적 언어로 쓴, 동아시아 지역에 '독서 공동체'를 만든 위대한 책입니다. 양나라 때 주흥사가 만들었다 하나, 많은 사람들이 편집했을 것이고 중국의 모든 지식과 문화가 만들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네 글자가 한구로 모두 250구로 이루어졌으며 우주, 역사, 정치, 인륜, 생활, 처세, 학문, 예악 등이 총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왕인 박사가 일본에 전했다는 것을 봐서 우리나 일본에 오래 전부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공통된 문화 텍스트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관통하는 텍스트인 동시에,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피로써 유전하는, 우리와 동아시아 지역의 사상적 관점과 토대 그리고 오랜 사회적 문화적 관습과 규율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코드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아들에게 권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좀 실용적인 전공을 선택 할 수밖에 없겠지만, 보다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애비의 마음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양의 텍스트로 말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길로 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제가 아버지에게 고등학교 때 선물 받은 것도 천자문이었습니다. 시골 학교 훈장이었던 아버지는 세상의 이치에 둔감하고 사물의 이치에 어두웠습니다. 40년 전의 기억이지만 우리 집 재래식 화장실에는 고상하게도 한자투성이 채점된 시험 답안지가 주류였습니다. 다른 집의 신문지 자른 것 혹은 국회의원 달력보다는 수준이 있었습니다. 아마 한문을 가르쳤던 모양입니다.
저는 화장실에서 해마다 1번 문제로 출제되는 <논어>의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를 수년 동안 외었습니다. 무슨 도를 얼마나 듣고 깨쳤는지, 아니면 도에 철전지 원수를 졌는지 모르겠지만(공자님 말씀은 모두가 도를 같이 실현하려는 염원이라고 배웠습니다.ㅎㅎ), 암튼 이 양반 입으로는 도를 말하면서 돈 한 푼 내놓지 못했고 전기 두꺼비집 한 번 열어본 적 없고 심지어 빚쟁이가 쳐들어오면 도망가기 일쑤였습니다.
당연히 저는 아버지를 미워했고 성장하면서는 노골적으로 대항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내민 카드가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꽤 따라 했고 이어 <논어>도 보게 되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에 '왜 유학에는 효는 강요하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은 강조하지 않느냐?'등의 유치한 저항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흉계라 생각했습니다. 효당갈력(孝當竭力)하고 충즉진명(忠則盡命)하라(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해야 하고 충성함에 있어서 목숨을 다해야 한다)/ 림심리박(臨深履薄)하고 숙흥온정(夙興溫凊)하라(깊은 물을 앞에 두고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고 일찍 일어나 따뜻한지 시원한지를 살핀다) 등을 읽으며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효도와 충성에 죽는 힘을 다하고 오로지 그 충효만을 위해 개인을 보전해야 한다거나 모든 생활에 충효만을 생각하게 하는 고전에 힘입은 교육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유국양(恭惟鞠養)하니 기감훼상(豈敢毁償)하리오(살피고 길러주심을 공손히 생각하니 어찌 감히 헐고 다치게 하겠는가)라는 구절도 있어 내 몸을 다치는 것도 불효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김근의 <욕망하는 천자문>은 '지금 여기'에서 천자문을 다시 읽고 해석합니다. 저자는 효가 인륜의 근본이지만 도를 지나쳐 형식이 내용에 앞서고 효에 진력을 다하면서도 충에는 목숨을 다해야 한다는 봉건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실을 분석합니다. 신체발부가 부모의 은혜이니 감히 헐고 다칠 수 없다는 것은 이른바 명철보신(明哲保身) 무사안일(無事安逸)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 지적하고, 조심하면서도 창의력과 모험심을 갖춘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권면합니다. 아울러 천자문에 숨어있는 가족 이기주의와 봉건 이데올로기, 중화주의를 해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앞서 주자와 정자가 있어도 퇴계와 고봉이 있고 남명이 있듯, 천자문이 있어도 새롭게 천자문 책을 쓰고 만드는 이유입니다. 더불어 한 시대와 호흡하며 책을 만드는 우리 출판인들이 '지금 여기'에 더욱 치열해야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계략은 불행히도 제 아들까지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문으로 된 천자문을 불민하게 읽었지만 제 아들은 김근 선생의 천자문을 읽은 탓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몸과 피를 이루고 있는 감각과 생각과 사회 문화적 코드를 소중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냉철한 비판적 사유를 통하여 이미 버릴 것과 취할 것의 경계를 알게 되니까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의 흉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으니, 세상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겪지 않아야 할 일을 겪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제 친구의 아들 상가에 다녀왔습니다. 어떤 필설로도 자식을 가슴에 묻는 부모의 마음을 견줄 수 없습니다.
실컷 울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은 그저 건강하게 살아있는 자식이 그토록 예쁘고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감훼상(豈敢毁償)…(자식이) 감히 어찌 헐고 다치겠냐는 천자문이 떠오르고 팔순의 아버지 생각에 겨우 참았던 눈물을 다시 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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