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일한 병합 조약"이 절차적으로 불법이고 무효라는 근거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신한민보> 1926년 7월 8일자에 게재된, 전 궁내부 대신 조정구(趙鼎九)가 전했다는 순종의 "유조"(遺詔, 유언)이다(순종은 유조가 보도되기 두 달 반 전인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일명(一命)을 겨우 보존한 짐(朕)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詔勅)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幽因)에 곤(困)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병이 심중하매 일언(一言)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나 지금 경(卿)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曉然)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라. 여러분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1926년 7월 8일자. 융희 황제(순종)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정구(趙鼎九, 1862~1926년)에게 내렸다는 유언(遺詔)이 실려 있다. ⓒ프레시안 |
순종의 이 유조가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 이 기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부터 논란이 있었다. 기사의 신빙성을 의심케 하는 근거를 든다면 가령 이런 것이다. "특별히 전 판돈녕부사 조정구의 상(喪)에 장수(葬需) 및 제자료(祭粢料)로 일금 500원을 하사하였다."(<순종실록 부록> 1926년 4월 5일(음력 2월 23일)자) 즉 <신한민보>에 순종의 유조를 전했다는 조정구가 순종보다 20일쯤 앞서 사망했다는 왕실 기록이다.
▲ <순종실록 부록>. 1926년 4월 5일(순종이 별세하기 20일 전) 순종이 "조정구의 상(喪)에 일금 500원을 하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프레시안 |
보도의 사실 여부를 떠나,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씁쓸했다. 망국(亡國)에 가장 책임이 큰 "황제"가 "종사의 죄인이 되고 2000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라고 한 마디 수사를 덧붙이기는 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모든 잘못을 일본과 신하들에게 미루고 자신은 피해자인 양 하는 모습에서 허망함과 측은함을 느꼈던 것이다.
한국인은 1919년 고종의 시신을 땅에 묻으면서 왕정도 함께 과거에 매장시켰다(제1회). 시대착오의 산물인 "대한제국"을 버리고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다. 이태왕(李太王, 고종)은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다 치고, 살아 있는 이왕(李王, 순종)을 정치적으로 매장한 것이다. 프랑스처럼 굳이 국왕의 목을 베지 않고도 그 이상의 효과를 보인 것이었다. 망국의 주역에 대해 냉엄한 평가를 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의 절차적 위법성에 대해서도 당연히 문제 제기를 하고 또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아니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은 경술국치의 의미를 오늘의 현실 속에서 성찰하고 반추하는 것이다.
그러면 경술국치의 현장을 둘러보자.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오후 4시 무렵, 남산 북쪽 기슭의 통감 관저 2층에서 일본 측 전권위원(全權委員)인 한국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 1852~1919년)와 한국 측 전권위원인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1926년)이 "일한 병합 조약"을 조인했다. 한국 측에서는 일본어를 못하는 이완용을 보좌하기 위해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1860~1919년)이 배석했다.
▲ (왼쪽) 한국 통감 관저. 1910년 8월 22일 오후 이 건물 2층에서 "일한 병합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건물은 1939년 지금의 청와대로 옮길 때까지 조선 총독의 관저로 쓰였다. (오른쪽) 예장동 서울소방재난본부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오솔길로 100 미터가량 올라가면 경술국치의 현장인 통감 관저 터가 있다. 이 일대에는 5·16 쿠데타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런 표식도 없이 나무만 무성하다. 오솔길은 일본 국화인 벚꽃(사쿠라)이 다른 나무들로 대치되었을 뿐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함이 없다. ⓒ프레시안 |
이완용은 이날 일기(一堂紀事)에 이렇게 적었다. "황제 폐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흥복헌(興福軒)에서 예알(禮謁)하고, 칙어(勅語)를 받들어 전권위임장을 받아 곧장 통감부로 가서 데라우치 통감과 회견하여 일한 합병 조약에 상호 조인하고, 동 위임장을 궁내부에 환납하다."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기는 데에 대해 아무런 가책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8월 29일 일본군이 철통 같이 경비하는 가운데 조약 체결 사실이 세상에 공포되었다. 이로써 조선국(대한제국)은 518년 만에 운명을 다했고 조선인(한국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했다.
▲ "일한 병합조약"을 조인한 직후의 데라우치. 바로 이 방이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통째로 바치는 조약"을 조인한 방이다. 데라우치는 그 날 일기에서 조인 과정이 "순조로웠다"라고 기록했다. ⓒ프레시안 |
▲ (위) 조선헌병대 사령부. 1908년 조선주차군 사령부가 용산(지금의 미군 기지 자리)으로 이전할 때까지는 두 사령부가 이곳을 함께 사용했다. 조선헌병대는 1919년 3·1운동을 가장 잔인하게 진압한 부대였다. 또 제3대 총독 사이토(齋藤實, 1858~1936년)의 "문화 통치" 이전인 1910년대에는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한 "헌병 경찰"의 중추로서, 경찰 담당인 위생 업무도 강압적으로 수행했다. 1910년 8월 29일 "일한 병합 조약"을 공포할 때에도 무력 시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 (아래) 지금은 그 자리에 남산골 한옥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안내판에는 조선헌병대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프레시안 |
▲ (위) 통감부 청사. 통감부는 1906년부터 1910년 병탄 때까지 대한제국 최고의 무소불위 권력기관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통감부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허수아비 기구였지만,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 관료가 없지는 않았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안의 새 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조금씩 확장해 가며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했다. (아래) 지금은 그 자리에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앞쪽 길가에 서 있는 "통감부 터 표지석"에는 통감으로 하세가와, 이토가 부임했다고 잘못 적혀 있다. 하세가와(長谷川好道, 1850~1924년)는 조선주차군 사령관과 제2대 조선 총독을 역임했으며, 통감으로 임명받은 적은 없고 임시 통감대리를 지냈다. 제1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년), 제2대는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1849~1910년), 제3대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852~1919년)이다. ⓒ프레시안 |
▲ 병탄의 자취. A : 통감 관저 터. 예장동 서울소방재난본부 입구에서 동쪽으로 난 오솔길로 100 미터가량 올라가면 통감 관저 터가 있다. B : 통감부 청사 터.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자리. C : 조선주차군 사령부 및 조선헌병대 사령부 터.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 D : 경성일보사 터. 매일경제신문사 자리. 경성일보사는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데 앞장섰다. E : 총독부 정무총감 관저 터. 한국의집 자리. ⓒ프레시안 |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침략주의와 평화주의 간의 투쟁을 민족과 민족, 종교와 종교 사이의 분쟁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인식일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식민주의, 침략주의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이며 또 그것들의 자양분으로 이용당하는 것이다.
일제의 지배를 35년(통감부 시기까지 포함하면 근 40년)이나 받고도 "왜놈"에 대한 증오심만 있을 뿐 막상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본질과 위력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제국주의 문제가 어찌 일제의 한국 병탄에 그치는 것이겠는가. 오늘날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일제 강점의 역사는 새기고 또 되새겨야 할 과제이다.
일제의 한국 병탄은 물론이고 모든 제국주의 침략은 절차와 형식의 적절성, 합법성 논란 이전에 원천적으로 인류에 대한 만행이고 배반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피침략국뿐만 아니라 침략국의 국민들마저 노예와 반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고 교훈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그리고 그 주도자들과 일본·한국의 하수인들은 병탄과 강점을 통해 한국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또한 죄 없는 대부분의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을 서로 원수의 사이로 만들었다. 일제는 우선 한국인들, 그리고 일본인들도 피해자로 만든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죄과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반성 없이는 그 폐해는 사라지지 않고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 일제의 모든 만행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일차적인 주체는 당연히 국가로서의 일본이다.
그와 더불어 태프트(미국 육군장관)-가스라(일본 총리) 밀약(1905년),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프랑스-일본 협정(1907년) 등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열강과 그 하수인들의 공범 행위에 대해서도 응당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가톨릭 조선교구장 뮈텔(Gustav Charles Marie Mutel, 1854~1933년)이 안중근을 모멸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옹호한 것은 뮈텔 개인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언행의 주인공이 어찌 뮈텔 한 사람뿐이랴.
뮈텔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토 공작의 이번 암살은 공공의 불행으로 증오를 일으켜야 했음에도 그러한 모습은 일본인들이나 몇몇 친일파 한국인들에게서만 보일 뿐이고 일반 민중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제국주의는 일제의 패망으로 운명을 다한 단지 과거의 문제이며, 우리는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의 피해자일 뿐인가?
경술국치 100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이 문제들을 거듭 묻고 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미래의 청사진이고 설계도이기에.
▲ 누가 역사의 주인인가? (위) 병탄을 기념하여, 부부 동반으로 일본에 근대문명을 배우려고 "견학"간 한국인 고관대작들. (아래) 일제 침략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이름 없는 한국인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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