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내가 "용태 형"이라고 하는 이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전 회장 김용태다. 그날은 2010년 7월 29일부터 8월 9일까지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렸던 <현실과 발언> 30주년 전시회의 거의 마지막 날이었다. 임옥상의 부름에 이끌려 찾아 나선 전시회장에서 분명 그를 봤는데 정작 뒤풀이 자리에서는 어디 있나 했다.
그 옆자리에 출판사 현실문화의 대표 김수기가 앉아 있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용태 형이 다시 입을 연다. "아까 나 주려던 그 책, 이 친구 줘." 덥석 받아든 보따리 뭉치에는 <오윤 전집>(현실문화 펴냄) 세 권이 묵직하게 들어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내 손에 난데없이 들어오게 되었다.
첫 권은 "세상 사람, 동네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대한 글 모음, 그가 쓴 글, 그가 한 말의 기록들이 있는 620쪽의 책이고, 두 번째 권은 "칼을 쥔 도깨비"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작품집, 세 번째는 "3115, 날것 그대로의 오윤"이라는 제목의 그의 스케치가 고스란히 담긴 자료집이다. 그날로 읽기 시작한 오윤 1권은 나를 그의 세계로 정신없이 빨려들게 했다.
오윤의 작품도 그 안에 우뚝 자리한 <현실과 발언> 전시회는 1979년 겨울, 유신 체제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예술적 발언을 모색했던 이들이 준비하고 그 다음 해 1980년, 모두가 전두환 정권의 폭력 앞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정말 감히 겁도 없이 민중 예술의 장을 연 작업이었다.
그 일이 벌써 30년이 지났다. 인사아트센터 현관에는 화엄경을 한글 서체로 풀어 만든 임옥상의 청동 부처 조각이 걸린 채 범상치 않은 기를 뿜고 있었고, 6층 전체에 걸쳐 <현실과 발언>의 역사와 작품들이 한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현실과 발언>을 이끌었던 이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민중 미술 1세대인 주재환, 손장섭, 김건희, 김정헌, 민정기, 안규철, 성완경, 김대식, 윤범모, 심정수 등이 작가와의 대화에서 등장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사학자이자 이제는 겸재박물관 관장이 된 이석우 등도 모습을 보였다.
오윤의 아들 둘도 함께 했다. 그렇게 모인 광경을 보니 <현실과 발언> 30주년 기념 전시회는 지난 세월의 자취가 아니라 일그러지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한 현재 진행형의 목소리였고 아직도 여전히 할 일이 있다는 일깨움을 주는 현장이 되었다.
▲ <오윤 전집>(전3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
문제적 인간 오윤
오윤은 바로 이 <현실과 발언>이 있기 10년 전인 1969년, 그의 예술적 기의 힘을 알아본 김지하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현실 동인 선언"을 하면서 기존 미술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발걸음을 내보인 이였다.
그때 이미 그는 우리의 춤과 굿거리, 추사를 비롯한 옛 글의 힘과 민중 속에서 질퍽하게 녹아나 있는 아픔과 갈망의 노래를 어떻게 하면 형상화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뇌했던 이른바 "문제적 인간"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시대 민중 예술의 표준이 될 경계선을 그은 존재가 되었다. 오윤에게, 저 불끈 힘이 솟아오르는 판화의 빚을 지지 않은 1980년대 이후의 운동이 과연 어디 있던가?
<오윤 전집>의 1권에는 그가 맺은 인간관계, 벗들의 모습, 그의 삶, 그의 미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종합적으로 엮어져 있다. 그래서 인간 오윤과 함께 그의 작품이 끼친 미술사적 의의가 파노라마처럼 섬세하게 펼쳐진다. 오윤과 동갑내기인 김용태, 그리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김정헌이 오윤이 몸이 아파 진도에서 요양하며 지낼 때 찾아가 홍주를 마시던 이야기와 함께, 그의 개인전을 여느라 이 두 사람이 수고했던 일화를 처음 접하면서 한 예술가의 인연이 어디까지 닿아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였는가를 대면하게 된다.
조선의 옛 예술 정신과 멕시코 민중 예술의 세계를 소개한 그의 선배 김지하로부터 판화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진화시켜나간 그의 후배 이철수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 만나 이루어냈던 세계 속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깊고 다채롭다. 그의 아버지가 소설가 오영수라는 사실도 오늘의 세대에게는 어느새 낯선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그의 외가 쪽은 더욱이 동래 학춤의 명인 가문이라는 사실도 오윤의 피 속에 흐르는 문학성과 춤꾼 기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술판의 좌중을 쥐고 흔들었다는 놀이꾼으로서의 폭발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알게 한다.
생명의 기력을 불러들이는 굿거리
▲ 오윤의 <자화상>(목판, 1974년). ⓒ현실문화 |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미술 운동들 속에서 이런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동안 말없는 벙어리가 되었었다."
그랬던 그가 엄청난 에너지로 쏟아낸 작품들은 고개를 숙인 듯했다가 번쩍 치켜들면서 사악한 것을 베어내고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둥실 둥실 춤추면서 앞으로 어깨 걸고 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현재화하는데 성공한다. 그건 사물과 사람에 대한 피상적 관찰을 넘어서서 그 안에서 웅성거리며 결국 뿜어내지는 기운(氣運)을 포착해낸 이에게만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힘의 근원을 근육의 구조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석굴암의 금강역사처럼 기(氣)의 표현으로도 가능한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삶의 꿈틀거림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적 정신세계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오윤에게 예술은 숨겨진 생명의 가락을 찾고 그 가락이 기로 드러나 누구에게도 분명한 진실을 말하는 순간을 미술 속의 이야기처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윤의 작품을 단지 저항적 민중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는 것은 그의 예술적 지평의 크기를 축소시키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런 말을 토해낼 수 있었다.
"운다는 게 뭡니까? 예술에 있어서 진짜 만남만이 울 수 있는 겁니다. 감동당해 본 적도 없고 감동하기도 싫고, 만날 데는 한 군데 밖에 없어요. 예술이 살아남는 길은 하나 밖에 없어요. 마치 무당이 신 내림을 받을 때처럼, 문제하고 만나든 대상하고 만나든, 어떤 사물하고 만나든, 진정함이라고 하는 것 그것 하나 믿고 싶다는 겁니다."
이리하여 그의 결론은 굿으로 간다.
"전 지금도 예술이 제대로 굿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생명의 진정성을 현실 속에 불러들이는 신들린 동작이 오늘의 미술 속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윤이 살아생전에 춤사위에 대해 그리도 관심을 쏟았던 이유는 그의 외가 쪽 학춤의 흐름도 있겠거니와,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구치고 꿈틀거렸던 생명의 기력을 신내림처럼 판화에 쏟아내고 싶은 원초적 갈망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그의 삶과 발언을 통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꽉 찬 긴장 속에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이 휘몰아치는 칼의 번뜩임을 잡아낸 <칼노래>라든가 춤추는 군중의 힘을 보여준 <춘무인 춘무의>, 그리고 역사의 비극을 더는 반복할 수 없다는 <원귀도>같은 비장한 작품만이 아니라 <남녁땅 뱃노래>와 <도깨비>같은 경우를 보면 오윤이 짚어낸 삶의 영토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알 수 있다.
▲ 오윤의 <대지5>(목판, 1983년). ⓒ현실문화 |
책 표지와 오윤
그런데 무엇보다도 오윤의 판화가 대중들의 시선에 놓이게 된 것은 책 표지에서였다.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목회자로 수고하고 있는 한윤수가 1970년대 중반에 출판사 청년사를 차려 그의 작품을 선보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은 지금 돌아봐도 감동스럽다.
<암태도 소작 쟁의>의 삽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한 이단아의 등장쯤으로 여길 만한 사건이 미술사 전반에 걸친 충격과 그 이후의 미술사적 사건으로 이어지는 고리에 출판과 미술이 하나로 결합시키는 애씀이 있다는 것은 두고두고 성찰해볼 일이다.
미술이 대중의 일상 속에 존재하도록 하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윤의 예술 철학과 한 시대의 고뇌를 담아내려한 출판 운동이 만난 지점에서 태어난 이 작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그건 미술과 사유, 그리고 언어가 하나가 되어 한 시대의 메시지로 작동할 수 있는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미술 평론가 최열은 오윤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맥락을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역사의 한 대목을 속박시켰던 포승줄을 풀고 생명의 기운을 펼쳐낸 점을 주목하도록 한다. 이는 최열이 고암 이응로와 오윤을 하나로 묶어 해제하려한 노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이건 결국 하나의 맥박이다. 그래서 칼을 부리는 솜씨가 빼어났다는 그의 목판화는 맥이 힘차게 뛰는 인상을 강렬히 남긴다. 오윤이 쓰다 말았다는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리던 산맥이 섬진강에 부딪혀 멈칫하고 선 곳에서는…" 그렇게 그는 맥박이 흐르는 길과 그 진로에 관심이 높았고 그건 사물이나 사람이나 역사나 춤이나 그 어디에도 다 적용이 되는 시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윤이 오래 살지 못해 그의 기량을 충분히 다 보여주지 못했고 그의 생각이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도 입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지만 그의 작품들은 그 이후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할 지 이미 다 말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오윤의 <칼노래>(목판, 채색, 1985년). ⓒ현실문화 |
생명의 혁명적 춤사위
그렇지 않아도 오윤의 작품 속에 깃든 굿의 힘, 무당 같은 신 내림의 경지에 대한 갈망은 김정헌의 증언 내지는 평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테라코타의 조각) 얼굴을 보면 표정이 (판화에도 그런 것들이 나오는데) 눈 꼬리가 탁 올라붙었어요. 무당기가 있는 사람들을 거의 정형화시킨 거죠."
오윤이 찾고 싶었던 얼굴은 바로 그렇게 이 세상의 아픈 이들의 심정을 자기 마음처럼 절절히 알고, 그 사연을 신 내린 혼으로 자기 사연처럼 풀어내서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는 이라고 하겠다. 그런 모습, 그런 기운이 아니고서는 죽음의 기운이 판을 치는 세상을 바로 세울 수 없다고 여긴 탓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오윤에 대해 증언하고 평론한 이들의 이름은 여기 일일이 다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만큼 그는 살아생전에 주변 누구에게나 관심을 받는 매력적인 인간이었고 그의 생각과 그의 작품은 새로운 화두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현실과 발언>의 젊은 일꾼이었고 이제는 60대 중반에 접어든 성완경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래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윤은 마치 부릅뜬 노인의 눈 같기도 하고, 저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 진 한 같기도 한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적 삶의 몰골과 역사의 한 많은 뼈마디를 훑어내면서 우리를 어머니의 체취에, 그 정직하고 절대적인 가난에 닿도록 한다. 다시 말해 오윤 예술의 생명은 비로 그가 맥을 잡을 주는, 맥을 짚고 그 책을 살려내는 화가라는 점에 있다는 말이다.
(…) 그것은 인간의 잃어져가는 모습과 잊혀가는 삶의 도상에 우리를 대면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다. (…) 사라져 가는 기억의 재생이요, 맥의 재생이며 이 점에서 아주 소중한 '도상의 구비 문학'이다."
그래서 오윤은 탈을 만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탈은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 아니야. 한번 얼굴에 대고 고개를 움직이며 놀아봐. 살아있는지 죽어 있는지 보게." 70년대 탈춤 세대의 문을 연 채희완의 증언도 오윤의 삶을 조명하는데 한 몫을 한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오윤의 예술은 모든 잊혀져가고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것들의 생환에 그 초점이 모아진다. 누워있던 것이 일어서고 멈췄던 것이 다시 춤을 추고 숙였던 고개가 번쩍 하고 치켜든다. 이건 "생명의 혁명적 춤사위"다. 비로 오윤의 작품이 온전한 평가를 할 만큼 많지 않고 고인에 대한 미화 의식으로 인해 과도한 칭찬을 받을 경우가 있다 해도 바로 이 미술 속에 생명의 혁명적 춤사위를 이야기로 박아놓은 것만큼은 빼어난 예술적 성취다. 그건 오늘날의 예술에서도 계속 진행되어야 할 의식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윤 전집>의 발간은 오늘의 자리에서 더욱 깊이 새겨지는 감격이다. 민중 예술이라는 것이 메시지에 몰두한 나머지 예술적 성취가 약하다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힘겹게 여겨지는 시대에, 오윤의 미술사적 생환은 예언적이다. 그건, 우리가 들어야 할 칼과 붓, 우리가 추어야 할 춤, 우리가 남겨야 할 목소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깨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과 발언>이 30주년 기념 전시회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발언하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길을 뚫어내는 계기로 만드는 거다.
지금은 우리은행으로 바뀐 상업은행의 종로 5가 지점에는 오윤이 작업한 테라코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아직 보지 못했다. 꼭 가서 봐야겠다. 오윤의 벗 용태 형, 고맙수. 이런 책이 내 손에 굴러들어오게 해줘서 말이요.
오윤의 판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어느새 내 안에 역동하는 기운이 스멀스멀하고 일어선다. 오윤의 판화는 그런 기운이 찍힌 신 내린 부적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