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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덫에 갇힌 진보…모리배들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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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덫에 갇힌 진보…모리배들이 웃는다!

[김영종의 '잡설'·29]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②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②

그러나 이 청년은 '네차예프적 요구'에 짓눌리고 있었다. 그 요구란 직업적 혁명가상(像)을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 사건을 보고 소설 <악령>을 썼을 만큼 이 사건은 어떤 상징성을 띠고 있다. 여기서 잠깐 네차예프(1847~1882)에 대해 알아보자.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 필립 폼퍼 지음, 윤길순 옮김, 교양인 펴냄)

농노의 아들로 태어난 네차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청강생으로 들어가고부터 학생운동에 가담했다(1868~69). 1869년 경찰의 눈을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간 스물두 살의 네차예프는 자신의 활동 이력을 속여 러시아 망명가 사회를 휘젓고 다녔다. 당시 그는 자기가 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한 정치범이며 '러시아 혁명위원회' 대표라고 소개했다(모두 사실이 아니다).

마치 마술에 걸린 듯 망명가 사회는 그를 극진히 환대했다. 저명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바쿠닌은 새로운 종류의 혁명가를 발견했다며 열광했고, 혁명가의 후원자로 존경받는 오가료프도 그에게 휘둘렸다. 예순을 눈앞에 둔 두 사람은 네차예프의 제안에 응해 거금을 마련하고, 글을 쓰고, 여러 나라 혁명가들과 연결시켜주었다. 네차예프는 '세계혁명동맹'이라는 가상의 단체를 만들어냈고, 바쿠닌은 그가 '러시아 지부 비밀 대표'임을 증명해주었다.

이제 네차예프는 저명한 바쿠닌의 후계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바쿠닌과 함께 작성한 <혁명가의 교리 문답>은 이 조직의 이름으로 유포되었는데, 전체 26개조로 구성된 내용은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들에게 직업적 혁명가상을 강력하게 심어주었다. 그중 몇 개 조항만 소개해보겠다.

1. 혁명가는 불행한 운명에 갇힌 사람이다. 혁명가는 자기만의 관심사도 없고, 일도, 감정도, 애착도, 재산도 없다. 심지어 그에게는 이름도 없다. 혁명가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오직 하나, 모든 사고와 열정을 사로잡는 혁명뿐이다.

6. 자신에게 엄격한 혁명가는 다른 사람에게도 엄격해야 한다. 혁명가는 혈육의 정, 우정, 사랑, 고마움, 심지어 존경심까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모든 감정을 혁명의 대의를 향한 냉혹한 열정으로 제압해야 한다. (…)

7. (…) 혁명에 대한 열정이 혁명가에게 항구적인 본성이 되면 이제 그 열정은 차가운 계산과 결합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그는 사적인 생각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보편적인 대의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10. 모든 동지는 자기가 처분할 수 있는 이류 또는 삼류 혁명가, 그러니까 아직 혁명에 완전히 투신하지 않은 사람을 자기 밑에 여럿 두어야 한다. 그는 그들을 전체 혁명자본 가운데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 몫으로 배당된 이 자본을 경제적으로 써야 하며, 늘 그 자본에서 최대한의 유용성을 뽑아내려고 분투해야 한다. 혁명가는 자신도 혁명의 승리를 위해 쓰일 운명인 자본으로 보아야 하지만, 혁명에 완전히 투신한 사람들 전체의 동의 없이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자본으로 보아야 한다.

13. 혁명가가 공적인 세계, 신분 질서의 세계, 그리고 이른바 교양 세계에 침투하는 것은 오로지 하루라도 그 세계를 더욱 완전하게 파괴할 목적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계에 있는 어떤 것에라도 연민을 느낀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이 가증스러워야 하는데 그 세계 안에 있는 지위나 관계 또는 어떤 사람을 제거하는 데 주저한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 안에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있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22. 혁명 조직은 인민, 즉 노동하는 사람들의 완전한 해방과 행복 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그러나 이런 해방과 이런 행복은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인민혁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인민이 더 참지 못하고 대중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도록 모든 힘과 수단을 다해 인민의 고통과 악이 번성하도록 할 것이다.


1869년 그해, 네차예프는 암호로 된 이 문건을 들고 러시아로 잠입하여 모스크바에서 '인민의 복수'를 결성했고, 조직원들은 문건의 행동 강령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11월 초, 네차예프를 '네차예프시나(=네차예프 만행)'라는 보통명사의 주인공으로 만들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네차예프의 조직은 이듬해 농노 해방과 토지 개혁 9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민중 봉기를 일으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활동하기로 했는데, 이바노프라는 한 조직원이 네차예프의 독재적이고 음모적인 방식에 회의를 품고 계획의 허술함과 비현실성을 제기하면서 조직을 탈퇴하자 그를 다른 조직원들과 함께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무렵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역풍 또한 그 이상으로 불어 닥쳤다. 이 사건은 혁명 반대 세력이 혁명 세력을 공격하기에 딱 안성맞춤인 소재였던 것이다.

사건 직후, 네차예프는 또다시 스위스 제네바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의 만행이 알려지면서 망명가 사회는 그를 배척했고 바쿠닌도 그와 결별했다. 1872년 망명자 하나가 네차예프를 러시아 첩자에게 밀고했고, 네차예프는 러시아 정부의 협조 요청을 받은 스위스 경찰의 손에 체포되어 러시아로 압송됐다.

네차예프는 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10년 동안 복역하면서 69명의 교도관과 병사들을 혁명의 동지로 포섭했다. 그리고 '인민의 의지'라는 지하 혁명 조직과 연락이 닿아 탈출 계획을 세웠으나 '인민의 의지'는 그의 비도덕성을 질책하며 도와주지 않았다. 네차예프는 1882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감방에서 사망했다.

'네차예프시나'라는 단어는 낯설겠지만 아마도 그와 같은 이미지는 익숙할 것이다. 영화, 만화, 소설, 게임 등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흥행 요소다. 영화로도 제작된 일본의 장편만화 <20세기 소년>은 네차예프시나와 같은 만행으로 시작한다. 픽션만이 아니다. 한국 정치판에서는 '빨갱이'라는 것을 만들어 역사상 최대의 흥행 실적을 올렸다. 한국 현대사를 가위 누르고 있는 빨갱이의 이미지는 바로 네차예프시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차예프시나'는 반혁명 세력이 흑색선전을 할 때 단골 메뉴로 사용해왔는데, 진실을 말하면 아마도 다들 까무러치게 놀랄 것이다. '네차예프시나'가 사실은 반혁명 세력의 정신세계 바로 그것이요 기본 전략이라는 것을!

ⓒ김용철

그러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먼저 예수회와의 유사성을 알아보자. 제국주의를 가리켜 '한 손에는 총, 한 손에는 성경'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 성경을 든 기독교인들이 예수회다.

"러시아정교회의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는 1860년대 혁명가들이 정교회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네차예프주의는 '불쾌할 정도로 전도된 정교회의 금욕주의가 예수회주의와 뒤섞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온 여러 증거도 네차예프와 그의 동지들이 의식적으로 이런 광신적인 분파주의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만, 네차예프가 걸어간 길에 뿌리 깊은 무의식적 배경이 된 것은 그가 이바노보에서 보낸 불우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형성되었다."

(예수회주의 : 예수회는 1540년 로욜라가 창설한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 네차예프와 관련해 쓰이는 '예수회주의'라는 말은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자기 헌신과 복종을 미덕으로 삼는 예수회 수도사들의 자세, "목적이 수단을 신성하게 만든다"는 선교 원칙을 가리킨다. 즉 네차예프가 조직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복종을 중시하고, 혁명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태도를 가리킨다. (<네차예프, 혁명가의 교리문답>, 75쪽))


'네차예프시나'의 원조는 이처럼 마키아벨리즘과 예수회로, 절대왕정 이래 우파와 파시즘이 일상적으로 구사하고 있는 기본 전략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시대정신(Zeitgeist)>에는 '베일에 가린 사람'(세계 자본주의를 쥐락펴락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꾸미는 네차예프적 계략과 음모의 전모가 폭로돼 있다. 좀 길지만, 일부를 인용한다.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한다.) 이 사람이 '아론 루소'입니다. 한때 정치인이었고 현재 영화감독입니다. 왼쪽은 록펠러가의 '니콜라스 록펠러'입니다. 아론은 니콜라스 록펠러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록펠러 가문의 정체와 야망에 기겁하고 결국 절교합니다.

(지금부터 아론 루소의 육성) 어느 날 친분 있는 변호사가 전화해서 "록펠러가의 한 사람을 만나볼래요?" 그러기에 "네, 좋아요" 했죠. 우린 그렇게 친구가 됐는데, 그가 슬슬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하데요.

어느 날 밤에 하는 말이, "이벤트가 하나 있을 거야. 그리고 그 이벤트 후에 아프가니스탄에 갈 거야. 그러면 카스피 해에서 파이프라인을 연결할 수 있지. 이라크에 가서 기름도 빼앗고, 중동에 기지도 건설하고, 그다음엔 베네수엘라로 가서 차베스를 없애고. 앞에 것 두 개는 했는데 차베스는 아직 안 됐어."

그러고는 하는 말이, "동굴에서 있지도 않은 테러범들을 찾는 걸 보게 될 거야."

그는 낄낄거리면서 '테러와의 전쟁' 얘기도 했어요. 거기엔 실제로는 적(敵)이 없다면서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영원한 전쟁을 일으켜서, 그래야 사람들의 자유를 뺏어갈 수 있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나(아론) : 전쟁이 진짜라는 걸 어떻게 사람들한테 확신시키지?
그(록펠러) : 언론··.· 언론은 모든 사람이 전쟁이 진짜라고 믿게 할 수 있어.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해봐. 그러면 사람들은 결국 믿게 돼 있지. 1913년 연방준비 시스템도 거짓말로 만든 거고, 9·11도 거짓말이고, 9·11을 핑계로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또 갑자기 이라크로 쳐들어가고, 이라크전도 사기지. 이젠 이란으로 갈 거야. 하나가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는 식으로···.

나 : 왜 이런 짓을 하니? 목적이 뭐야? 넌 돈도 갖고 싶은 만큼 있고 권력도 다 있으면서 왜 사람들을 다치게 하니? 좋은 게 아니야.
그러자 그 : 다른 사람을 왜 신경 쓰니? 너하고 네 가족이나 신경 써.
나 : 그래서 궁극적인 목적이 뭔데?
그 : 최종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한테 RFID칩을 박는 거지. 돈을 칩에다 넣고, 모두 다 넣을 거야. 그러면 딴죽 걸거나 우리 법을 어기는 놈들은 칩 꺼버리면 돼.


'네차예프시나'가 이처럼 우파와 파시즘이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기본 전략인데도 반혁명 세력의 흑색 선전용으로 무소불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의 글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에서 보았듯이 가장 큰 이유는 반혁명 세력이 '언어의 조작질'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언어의 조작질은 혁명 세력에게 '증명의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가능했다. 좀 난해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래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혁명 세력은 기득권 세력의 부정부패와 타락을 공격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덕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도덕은 기득권자의 무기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의 기원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계약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한 분노로 가해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니체, <도덕의 계보>). 분노는 손해에 대한 등가물을 찾는다. 즉 고통을 주는 것이다. 손해와 고통(형벌)이 등가라는 사상은 보복의 심리를 보상해준다. 니체가 말한 채권자와 채무자의 계약 관계는 보복 심리의 물질적 기초인 것이다.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은 "니체의 사유를 보면 죄의식은 채무감이고 증오는 그것의 부정이다"라는 해석을 끌어냈다. 돈을 빌려 갚지 않은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빌려준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처럼, 채무자가 채무의식을 부정하기 위해 증오의 감정으로 손해를 조작해내고 채권자를 형벌하는데—최근의 예가 용산 참사다—, 이때 손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해내는 것, 이것이 도덕이다. "부모가 아이를 엄하게 꾸짖는 일은 흉포한 분노에서 비롯되지만 부모는 그것을 가르침이나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이산 펴냄)

이러한 적반하장은 '네차예프시나'의 악용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드러난다. 반혁명세력은 치명적인 자신의 치부(악마/'네차예프시나')를 원래부터 적의 것인 양 흑색선전하면서 분노하고 증오한다. 겉보기에 악을 향한 분노는 정의로운 자의 모습 아닌가? 이렇게 하여 위치가 바뀌고 가해자(악마/'네차예프시나')가 된 피해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이때 증명은 도덕적인 형태를 띠어야 하기 때문에(왜냐하면 형벌이란 반드시 도덕적 태도를 취하니까) 불행하게도 피해자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시에 상대방이 악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본래 사태에서 벗어나 선악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사회의 악덕을 몰아내기 위해 '도덕의 틀'을 깨야 할 자들이 외려 '도덕의 모범생'으로 대중 앞에 서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왜 혁명 세력은 '도덕의 틀'을 깨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반문하겠다. "당신은 당신의 추악한 치부를 부정하려 할 때 도덕이 아닌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는가? 하물며 절대권력을 차지한 사회 세력이야 어떻겠는가?" 당신은 다시 "그렇다면 사회에 도덕이 없어져야 하는가?"라고 물을 텐데, 그런 소모적인 생각은 하지 않기 바란다. 인간사회에서 도덕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문제는 도덕으로 어떤 치부를 감추고 있는가, 부정하고 있는가이다. 혁명 세력이 도덕의 모범생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된 순간, 즉 반혁명 세력과 치부 드러내기 전쟁에 들어가는 순간, 혁명 세력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파멸의 암운에 휩싸이게 된다.

혁명 세력이 도덕적이지 않으면 혁명 세력일 수 있는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 기득권을 쥔 반혁명 세력은 도덕적이지 않아도 되지만, 혁명 세력은 도덕적이어야만 한다(그 이유 중 하나는 기득권은 상대에게 증명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 역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로 도덕이 자본의 운동을 파괴할 수도, 올바르게 할 수도 없다. 혁명 세력은 자본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문화적 부도덕성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여기서 게임은 끝난다. 대중에게 부도덕한 혁명 세력은 부도덕한 반혁명 세력보다 훨씬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대중은 그들 부도덕한 혁명 세력을 향해 분노와 증오를 폭발시킴으로써 자신이 이익을 좇는 대가로 부도덕하게 살고 있다는 채무감을 강력하게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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