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곳은 집이지만 몸이 아픈 노인 환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독일의 재간 간호 시스템은 노인들이 평생 자신이 살아온 집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입원 치료보다 효과가 좋다는 점을 반영한 제도이다. 재간 간호 요양은 주로 종교단체나 개인병원에서 맡아 하고 있다.
파독 간호사인 최영숙 씨가 이 일을 한 지는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원하는 날짜로 근무시간을 정해서 한 달에 그저 5, 6일 정도 일한다. 공식적으로는 작년에 정년을 넘긴 '연금 생활자'이지만 계속 일을 하기로 했다. 아직 건강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크기 때문이다.
▲ 최영숙 한민족유럽연대 대표. ⓒ한민영 |
최영숙 씨는 1966년 11월에 독일로 왔다. 그 이전 1960년 초부터 민간 차원에서 한국의 간호사들이 독일 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과 독일 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 간호사들의 파독 근무 절차 합의 협정을 맺었다. 따라서 공식 차원의 파독 간호 요원으로는 비교적 선두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최 씨의 첫 근무지가 베를린이었다.
최영숙 씨는 한국에서 간호대학을 나오고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파독 모집에 응했다. 외국에 대한 호기심, 당시 한국 병원보다 보수가 많다는 점에 크게 끌렸다. 그때 함께 온 간호 요원이 모두 125명. 그가 처음 바라본 베를린의 하늘은 흐리고 비까지 내렸다고 기억한다.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도착했었어요. 거의 이틀간 비행기를 탔던 것 같았는데 공항에 내리니 병원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지요. 제가 간 병원에는 전부 17명이 함께 가게 되었는데 버스를 타고 베를린 시내 바깥으로 한참 갔어요. 낙엽이 깔린 거리에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가 처음 근무한 병원은 베를린 근교의 결핵 병원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병동 근무를 하지 않고 괴테 하우스를 다니며 독일어 공부에 전념했다. 기숙사에서 한방에 2명씩 지내면서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수업을 받고 그 후에는 주로 숙제를 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게 일과였다. 첫 외국 생활 치고는 그리 힘든 편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 서툰데다가 통역도 제대로 없었으니 그 점이 몹시 불편했다.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했지요. 3개월 지나고부터는 간호조무사와 함께 팀을 짜서 병동에 배치가 되었는데 주사 놓고 투약하는 일을 맡았지요. 처음에는 우리 간호사도 청소하는 일을 했어요. 결핵 병실이니 객담을 닦는 일을 해야 했는데 들통 들고 걸레질을 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울기도 했지요. 말을 못하니 이런 일도 해야 하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우리가 늘 하던 주사와 처치 일을 하게 되었지요. 우리 한국 간호사들이 일을 참 잘했어요. 독일은 당시 경제부흥 시대여서 간호사 같이 강도 높은 직종은 대중이 기피했지요. 대부분 독일 간호사들은 50대였어요. 우리는 갓 스물이 될까 말까 했고요."
ⓒ한민영 |
"더러 독일 간호사들이 질투를 하기도 했었어요. 하하하."
그는 1981년까지 근무하고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일단 병원 근무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쉬다가 2000년에 일을 다시 시작했다. 재간 간호병원 여러 군데에 원서를 냈다. 적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병원에서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전 병원에서의 근무 성적이 좋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 간호사에 대한 인상이 여전히 좋았기 때문이다. 한국 간호사들은 친절하고 담당 환자들과의 약속 시간을 잘 지키고, 매우 성실하다는 평을 늘 받아왔다.
"간호 업무란 게 자전거 타기나 수영이나 같은 거예요. 잊어먹지 않는 거지요. 제가 일을 쉬는 동안 독일 간호 시스템이 많이 변했어요. 우리가 왔을 당시만 해도 이곳 간호 업무 수준이 우리 능력에 비해 수준 차이가 났던 게 사실이지요. 그때 우리는 간호사들의 실력이 월등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간호사에 대한 지원이 많았었지요."
그동안 독일 간호계에서 국제 수준에 맞추려는 노력도 많이 있어왔고, 1970년대 석유 파동 이후 간호사를 지원하려는 국내 수요가 늘어났다.
"요즘은 서류 작업이 많이 늘어났어요. 지금도 환자 간호 업무 자체는 크게 힘들지 않아요. 특히 제가 일하는 재간 간호병원은 치매 환자들이 많은데 그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 재미있어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고 할까. 노인 치료 할 때는 부모님 생각이 나요.
독일에 오래 살다보니까 환자들을 보면 이제 외국인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나이든 병자로만 보여서 측은지심이 많이 들어요. 젊었을 적에는 그저 부지런히 일만 했는데 이제는 환자에 대한 이해심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한민영 |
독일로 건너온 다른 한국 간호사들에 비해 최영숙 씨가 병원 근무를 오래 했다고 할 수는 없다. 30~40년 죽 병원 근무로 정년을 맞은 사람이 많다. 그 대신 그는 독일 사회에 한국을 알리고 또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자신의 시간을 통째 바친 사람이다. 그 시작은 여성회 모임이었다.
"1977년 당시 재독 여성 모임이 결성되기 전이었는데, 국제 결혼 세미나 즉, 국제 결혼에 대한 사회 인식, 문화적 이질감, 자녀 교육 등 그런 주제의 모임이었는데 가서 보니 너무 똑똑한 여성들이 많았어요. 그동안 난 뭘 하고 살았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간호사로 와서 공부한 사람도 있었고 유학생으로 온 여성도 있었고, 다들 눈빛이 반짝반짝했어요."
정기적으로 열리던 그 모임 가운데 '파독 간호사 송환 반대 서명 운동'이 일어났다. 애초 파독 간호사의 근무 계약 연한은 3년이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될 때까지(1966~77년) 독일 내 체류 연장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독일 병원 측으로서는 이제 언어도 자유롭고 실력까지 뛰어난 한국 간호 인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연장은 거의 자동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들어 경기가 나빠지면서 독일 국내에서도 간호사 인력이 충분해졌다. 이제 더 이상 외국 간호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들을 각자 본국으로 내보내고자했다. 남부 독일 쪽에서 체류 연장이 되지 않아 17명의 한국 간호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가 생겼다.
"우리는 화가 났어요. 처음엔 순한 천사라고 치켜세우더니만 이젠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는 것이었어요. 서명 운동을 시작했어요. 독일에서는 1만 명이 서명하면 연방의회로 안건 상정이 되거든요. '간호사로 근무한 지 5년이 지난 이들에게는 장기 체류 허가를 내주고 7~8년이 지난 이들에게는 국적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지요.
독일 사회에서 반응이 좋았어요. 우리가 병원 앞에서 서명을 받으려고 서있으면 독일 환자 보호자들이 우리더러 가지 말라고, 무조건 있어 달라며 앞장서 서명을 했으니까요. 독일 각 단체와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서 이곳 정치인들을 초대해서 심포지엄을 했지요.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필요할 때 가져왔다가 필요 없으면 버리는 그런 상품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면 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살아가기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것이고, 우리가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겠다', 그랬지요. 마침내 법안이 통과되어서 지역마다 한국 간호사들의 장기 체류, 영주권 취득이 가능했지요."
간호사 송환 반대 운동은 그에게 처음으로 사회운동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뭉치니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간호사라서가 아니라 누구든 뭉치면 할 수 있다는 사실, 여성들이 뭉쳐서 뭘 해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아주 컸어요. 재독 여성회 활동을 하면서 여성 문제에 대해 많이 인식하게 되었지요. 한국에 있을 때는 그냥 한 여자로 살았는데,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여성으로서 자아가 확장 된 것이라고 할까요."
ⓒ한민영 |
"처음엔 간호사가 하이칼라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한국 여성 노동자, 농촌 여성에 대해 공부하면서 우리도 노동자라는 인식을 하게 된 거지요. <공장의 불빛> 연극하면서 다 우리 이야기라고 울었어요. 농촌에서 서울 공장으로 돈 벌러 가는 것과 우리가 독일로 온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최영숙 씨는 특히 이점을 강조했다.
"우리 활동은 이념 아니라 심정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에요. 모두 각자 발등에 떨어진 문제라고 생각되어 공부하게 된 거죠. 내가 왜 독일로 오게 되었는지, 당시 내 조국의 상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전에는 독일행이 그저 개인적인 이유라고 생각했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같은 것은 몰랐지요.
공부하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가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이곳에서 여성운동도 그렇고 민주화운동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된 거예요. 우리의 활동을 이념의 잣대로만 설명하려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죠."
고향이 경상북도이고 대구에서 대학까지 다닌 그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세대에 속한다. 여성회 활동하면서 한국 정부 비판이 나오면 가슴이 쿵쿵 뛸 정도로 무서웠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자신의 레드 콤플렉스를 없애주는 계기가 되었다. '도저히 저럴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저 일에 반대하는 일은 무서운 일도, 그 무엇도 아니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한인 교포 사회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는 호소문을 냈다. 욕설과 협박을 섞어 전화를 걸어오는 교포도 있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소장파 유학생과 집회를 하고 단식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독친선회 결성도 이 당시 이뤄졌다.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이 그의 삶의 주제가 되었다. 지금 맡고 있는 한민족유럽연대 단체는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쪽에 뜻을 같이해 온 이들의 모임이다. 한국 문화와 민주화정신을 같이해 나가자는 게 단체의 취지다.
신년초가 되면 직장에서 가장 먼저 휴가 신청을 하는 게 연례행사인 독일 사람처럼 최영숙 씨도 매년 1월이 되면 자신의 휴가일을 미리 잡아둔다. 5월 민중제가 있는 5월 18일을 앞뒤로 해서 잡아둔다. 수십 년 똑같은 휴가 기간이다. 1981년부터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주민주화운동을 매년 기념하는 해외 단체로는 독일이 유일하다. 이곳에 사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5·18 5월 민중제는 하나의 명절이다. 한인 1세에서 2세들, 그 후손들 모두가 함께 하는 큰 행사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변함없이 5월이 되면 다들 모인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5월 민중제는 대동단결의 의미이지요. 1년에 한번씩 만나서 우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바쳐 해 온 일이 의미가 없지 않다는 확인, 한국과의 끈을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동포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 줄 수 있는 끈이지요."
독일 사회에서 열성적으로 해온 한국 민주화 운동이 그의 개인적인 삶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클 것이다.
"한국에 살았더라면 이런 것을 모르고 평생 살았겠지요. 여기 와서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게 힘은 들었지만 제가 사회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 사회인식을 하게 된 것은 제 인생에서 플러스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지요. 특히 자식들에게 인정받는 어머니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점도 자랑스럽고요."
어릴 적에는 아이들을 늘 데리고 다녀야했으니 두 아들이 엄마의 활동을 훤히 알고 있다. 이제는 장성해 일가를 이룬 큰아들이 결혼식 때 어머니를 소개하기를 '데모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했단다.
"내가 한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 운동하느라 애들을 소홀히 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데 아이들 인생에 내가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참 다행이고 고마웠지요."
꽃다운 처녀의 나이로 독일에 와서 고국민주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그는 이제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 여린 한 여성으로 독일 땅에 발을 디딘 그가 이제는 넉넉한 품을 가진 어머니가 된 것이다.
ⓒ한민영 |
독일 한인 사회, 특히 베를린에서 최영숙 씨는 한국 문화를 알리는 운동에 일찍이 앞장선 사람으로도 기억된다. 1970년대 말부터 독일 사회에 한국을 알리자는 움직임이 점점 커졌다. 그때 독일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문화 행사를 통해 알리기로 하고 여성풍물패를 만들어 탈춤, 농악, 고전무용을 익혔다. 한국에서 오는 이들이면 누구나 붙잡고 배웠다. 김덕수, 홍성담, 김영동 등등 고국의 쟁쟁한 예술인들이 독일 방문 때마다 기꺼이 그들의 좋은 스승이 되어 주었고 이곳 한인 교포들의 노력 덕분에 이제 한국 문화는 그 기반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최영숙 씨는 이제 5월 민중제와 6·15 행사로 상반기를 바쁘게 보냈다. 그러나 쉴 틈이 없다. 올해 9월에는 한국의 인권단체가 독일로 이주민 인권을 위한 연수를 하러 오기 때문이다. 독일 이주민 관련 단체와의 연락, 각종 준비 모임으로 그의 일정은 빼곡하게 짜여있다. 그는 이주민 인권에 대해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한다고 강조한다.
"독일 사회에서 일하면서 외국인이라서 월급을 낮게 받은 적이 없어요. 제가 지금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서, 만약 어떤 환자가 내게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쓴다든가 하면 그 환자에게 저를 보내지 않지요. 그만큼 저를 보호해 준다는 거죠. 지금 한국에서 아이 4명 중 1명이 혼혈 아동이라고 하는데 학교나 사회에서 그렇게 왕따를 시키면, 나중에 그 애들이 성인이 되어서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었을 때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활동은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부드러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시작한다. 딱딱한 이론을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에 힘이 더 실려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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