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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고객은 갑이 아니라 을!"

[정치경영연구소 유럽르포]<8>"자영업자들에게도 저녁 있는 삶을…"

'정치경영연구소의 유럽르포'는 우리 시민들로 하여금 유럽의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에 친밀감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연재물입니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해방 후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미국 편향적인 모델을 지향해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시점에 즈음하여 우리 시민들도 이제 새로운 모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경쟁과 성장 그리고 효율성의 가치만을 강요해온 과거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연대와 분배 그리고 형평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는 우리 시민들이 이제 미국이 아닌 유럽사회를 유심히 관찰해보길 원합니다. 특히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가 어떻게 그곳 시민들의 삶을 그토록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길 바랍니다.

'유럽르포'의 작성자들은 현재 유럽의 여러 대학원에 유학 중인 정치경영연구소의 객원 연구원들입니다.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유럽을 배우러 간 한국의 젊은이들이 보고하는 생생한 현지의 일상 생활을 <프레시안>의 글을 통해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유러피언 드림'을 같이 꾸길 염원합니다. 필자 주


일찍 문 닫는 가게

일찍 문 닫는 가게, 유럽 배낭여행을 해 본 한국 사람이라면 색다르게 보았을 특징이다. 유럽 전반이 그러하듯, 네덜란드도 일찍 가게 문을 닫는 데 있어선 예외가 아니다. 물론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는 늦게까지 문 여는 상점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그래도 한국에 24시간 개장하는 대형슈퍼마켓, 또는 매일 밤 10시까지 영업하는 백화점들에 비하면 여전히 일찍 닫는 편이다. 지방 소도시들로 가면 더하다. 저녁 6시가 넘으면, 북적대던 거리는 어느새 차분해진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시간대는 다를 수 있어도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는 건 유럽의 특색인 것 같다.

네덜란드에 짐을 푼 다음날 겪은 문화 충격이 생각난다. 인터넷으로 열심히 슈퍼마켓 위치를 찾아두었는데, 막상 걸어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저녁 9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때는 8월이라 밤 10시가 되어도 바깥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아니, 슈퍼마켓이 벌써 문을 닫나?' 별수 없이 그대로 돌아와야 했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자취방에 필요한 식재료를 사러 나가면 언제든지 가게 문이 열려 있었던, 그래서 장을 볼 시간을 굳이 따로 낼 필요가 없었던 서울에서의 생활습관은 바뀌어야만 했다. 필요할 때마다 즉흥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장을 볼 시간을 미리 계획해서 가는 습관으로 말이다. 덕분에 매장의 위치와 개장시간도 표시해주는 웹사이트를 자주 찾게 되었다. 구글 지도로는 2퍼센트 부족하다.(네덜란드 전국 주요 매장의 영업시간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웹사이트 www.openingstijden.nl)

'영업시간 확인'이란 개념을 머리에 탑재한 후에도 충격적인 경험이 몇 번 더 이어졌다. 온 지 얼마 안 되어 하루는 신발을 사기 위해 신발가게에 들어갔다. 한창 신발을 고르고 있는데, 어느새 주인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나를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문 닫을 시간 5분 전. '어, 나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생각하고 여유 있게 들어온 건데, 왜 그러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게 주인도 계산대를 정돈하고,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폐점시간보다 적어도 5분에서 10분 가게를 일찍 나와야 하는 것이 이곳의 상식이었다. 어떤 가게는 공지된 폐점시간보다 길게는 20분에서 짧게는 10분 전부터 출입구를 통제한다. 그 시간은 이미 쇼핑을 하고 계산을 마친 사람들이 나오는 시간이지, 새로운 고객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아닌 것이다. 폐점시간은 곧 가게주인 또는 직원들을 위해 존재하는 '퇴근'시간인 것이다.

▲ 왼쪽은 델프트 쇼핑거리 토요일 오후 3시경, 오른쪽은 오후 7시경 모습이다. 북적이던 거리가 어느새 한적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빛나래

고객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곳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손님에게 고개를 숙이던 가게주인의 모습을 여기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우표와 엽서를 사기 위해 책과 문구류 등을 파는 잡화점에 들어갔다. 나 말고는 손님이 없다. 그러나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물건에 바코드 찍는 작업을 계속한다. 내가 "저기요, 이거 좀…"이라고 이야기하니, 직원이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하던 일 끝내고요. 잠시 기다리세요." 그러더니 직원은 정말 하던 일을 끝낸 후에야 물건 값을 계산한다.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줄이 길 때는 계산대 직원의 손이 느리다고 불만을 할 수도 없다. 고객이 화를 내면, 직원도 똑같이 화를 낼 것이다. 이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이며, 직원은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 고객에게 휘둘리지 않고 우선 순위를 정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 따지다가 가게 직원이 강경하게 나와 꼬리를 내려야 했다. 조르거나 따지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계속 원칙을 앞세우는 직원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순간 여기가 네덜란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는 직원과 눈을 맞추고, '고마워요' 라거나 '좋은 하루 되세요' 등의 인사를 한다. 네덜란드에서 살면서 받은 인상은 고객은 갑(甲)이 아니라, 가게 주인 및 직원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때로는 을(乙)의 입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고객이 을이 된다는 말은 고객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그것을 공급해주는 상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서비스공급자가 갑이고 고객이 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객은 직원에게 어떤 요청을 하더라도 공손하게 해야 한다.

물론, 앞서 말한 일련의 경험은 유럽 전체로 보편화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고객과 서비스공급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문화는, 유럽 내에서도 네덜란드가 특히 더 강한 것 같다. 또 '폐점시간'이 곧 '퇴근시간'이라는 말은, 네덜란드 내에서도 에이치엔엠(H&M)이나 이케아(IKEA), 알버트헤인(Albert Heijn)같은 대형 브랜드 매장에는 곧이곧대로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매장들은 폐점시간 바로 전까지 고객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해주거나, 폐점시간 이후에 직원들이 매장을 정리할 시간이 1~2시간 더 필요하기에, 조금 늦게 나가는 고객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대형 상점일수록 고객입장에서 편리를 더 잘 봐준다. 한편, 중소규모의 상점은 가게 주인과 직원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더 당당하다. '진상 고객 놀이'를 할 수 없는 문화와 이 곳 사람들의 몸에 기본적으로 베인 태도를 더 깊이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도 아닐뿐더러 필자의 역량 밖인 것 같다. 이제부터는, 왜 가게들이 이렇게 일찍 문을 닫는지, 왜 영세 상인들이 문을 일찍 닫아도 먹고살기 괜찮은 것인지 그 배경에 있는 제도적인 요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통업 영업시간 규제와 지방정부 별 조례 : 기본 취지와 뼈대

유통업 영업시간 규제는 그 역사가 길다. 1904년부터 법제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해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발효시킨 것은 1930년이다. 당시 몇몇 지방정부들에서는 이미 도심 유통업 영업시간 규제를 위한 조례를 시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직원을 둘 수 있는 가게 주인은 어떤 이유에서든 직원을 둘 형편이 안 되는 가게 주인에 비해 영업을 더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다. 최대 영업시간을 일괄 규정함으로써 경쟁이 지나치게 격해지지 않도록, 경쟁을 하더라도 그 환경을 어느 정도 동일화해 경쟁의 출발선을 같게 만드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지방 정부에 차별 없이 강제하는 법안 발효를 통해 도시 내 중소 유통업자 간의 경쟁뿐 아니라, 서로 인접해있는 지방정부별 상업지구 간의 경쟁까지도 공정하게 규율하고자 했다. 1930년 법은 영업 최대 허용시간을 평일 오전 5시부터 오후 8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10시까지로 규정했고 일요일 영업은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이후 사회가 변화하면서 이 법에도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1996년 시장 자율화라는 큰 흐름과 유통업 폐장시간법 개정 착수

현재 법은 1996년도에 발효한 유통업 영업시간법(Winkeltijdenwet)을 일부 개정한 것으로, 이 법은 발효와 함께 그전에 있던 1976년 유통업 폐장시간법(Winkelsluitingswet)을 대체하였다. 1996년 법은 사실 자주색 내각으로 불리는 빔 콕 제1차 내각(1994-1998년)이 연정파트너들 간의 중요한 합의사항으로서 천명한 규제간소화를 실행에 옮기는 취지에서 비롯했다. 기존의 영업시간 규제가 너무 엄격하고 예외 규정을 더하면서 지나치게 복잡해졌다고 보고, 중앙정부 차원에서 꼭 필요한 규제와 시 조례 차원에서 지역 사정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을 더 확실하게 구분하자는 의도였다.

당시 중도좌파 정당인 노동당(Partij van de Arbeid; PvDA, 당시 37석)과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민주당(Volkspartij voor Vrijheid en Democratie : VVD, 당시 31석, 이하 자민당), 중도우파로 분류하나 자민당과 다소 강조점이 다른 민주66당(Democraten 66 : D66, 당시 24석)이 연정을 구성했다. 자민당은 제1여당인 노동당과 연정을 이루는 조건으로 '시장자율화'와 '규제완화', '민영사업기회의 확대'라는 기조 합의사항을 내걸었다. 연정이 이뤄지고, 내각이 출범한 후 곧 기존 유통업 폐장시간법을 대폭 개정하는 안을 합의사항 이행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는 다시 1994년 겨울부터 1995년 여름까지, 경제부가 주체가 되어 초안을 작성하면 사회경제협의회(Sociaal-Economisch Raad)와 네덜란드지방정부협회(Vereniging van Nederlandse Gemeenten) 등 주요 협의단체들이 의견을 내놓고 토론하는 조율과정으로 이어졌다.

▲ 왼쪽은 제1차 빔콕 내각의 구성(http://nl.wikipedia.org/wiki/Kabinet-Kok_I)이고, 오른쪽은 1994년 선거 당시 노동당과 자민당이 사용한 포스터( www.verkiezingsaffiches.nl/Affiches/1994) 이다.

주요 정치적 공방과 법안 통과 과정

주목할 것은 그렇게 해서 하원에 올라온 개정법 안을 두고 오고 간 정치적 공방이다. '시장자율화'라 하더라도 얼마나 자율화할지는 법안의 세부조항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면도 크기에 조항 하나하나를 두고 각 정당 별로자기네 입장을 치열하게 표명하였다. 당시 토론에 부쳐진 법안은 기존에 주당 영업허용시간을 최대 52시간까지 제한했던 것을 철폐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허용시간을 늘리며, 일요일 및 각종 법정휴일 영업은 금지를 기본 원칙으로 하나, 그 예외 제정은 지방정부의 권한에 맡기는 것이 골자였다. 기독민주당(Christen-Democratsich Appèl : CDA)을 위시한 기독정당들과 사회당은 사회질서유지와 안정을 중요하게 여겨, 일요일 휴식의 전통을 잠재적으로 약화시킬 것으로 보이는 개정안에 대하여 사회당(Socialitische Partij : SP)과 함께 반대하는 편에 섰다.

개인이 사업을 할 자유와 전반적인 규제완화를 옹호하는 자민당은 법안 수정과정에서 사실 한 술 더 떠 평일 영업시간을 최장 오후 10시까지가 아니라, 밤 12시까지로 늘리고 싶어 했다. 당시 기독민주당, 기독개혁당(Staatkundig Gereformeerde Partij : SGP), 기독인연합당(Christen Unie) 등 기독정당들은 사회경제협의회(Sociaal-Economisch Raad)의 권고를 받아들여 '오후 8시까지 영업'을 못 박았다.

사회경제협의회의 권고는 소상공인연합회와 같은 사용자측과 유통업 관련 노조 측의 의견을 모아 도출한 것이었다. 한편, 의석 최다 확보 정당으로서 당시 연정파트너였던 노동당은 일요일 및 휴일 예외 영업허가를 연 12회까지만 지정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고 싶어 했다. 노동당과 사회당과 같이 당령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강력히 옹호하는 정당들은 남들 다 쉬는 법정 휴일에 일부 노동자가 일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법안에서 일요일 및 휴일 예외영업허가를 전적으로 지방 정부 권한에 맡기자는 내용은 국가자문위원회(de Raad van State)에서도 우려를 많이 했던 부분이었다. 지방정부 권한에 맡겨버리면, 지방정부 간 상권경쟁으로 무분별하게 예외를 남발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그 '연 12회 제한'이란 조건을 법안에 넣지 않으면, 아예 법안 전체를 거부해버리겠다고 압박하였다. 결국 1995년 겨울 하원에서는 자민당과 기독정당들의 타협안인 '오후 10시까지의 영업허용', 노동당의 강경한 의견대로 '일요일 및 법정휴일 예외 영업허가 연 최대 12회로 제한' 항목을 넣은 수정안이 과반수인 76표 이상 찬성을 얻었다. 이렇게 상원으로 올라간 수정안은 승인을 통해, 1996년부터 3월부터 '유통업 영업시간법'이란 이름으로 발효됐다.

1996년 유통업 영업시간법의 내용

1996년 법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앞서 소개한 골자에 더해, 여러 예외조항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업을 금지하는 일요일 및 각종 법정 휴일에는, 주민 만 5000명당 오후 4시부터 밤 12시까지 기본 음식을 팔 수 있는 가게 한 군데를 지방정부 차원에서 지정할 수가 있다. 이 밖에 병원관련 편의점들, 약국, 공항, 기차역, 박물관 및 라마단 준수와 관련한 식료품점도 예외 적용을 받는다. 한편, 관광객 편의 등을 위해 지방 정부에서 예외허가조례를 제정하고자 한다면, 지방의회는 다음 사항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첫째, 지역 차원의 일자리 문제 및 경제활동과 영업점 주인뿐 아니라 직원들의 이해관계에 미치는 영향. 둘째, 종교기관의 주일 안식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 여부. 마지막으로 지역 차원의 삶의 질과 안전, 공공질서 유지에 유익한지 여부이다.

유통업 영업시간규제가 현실에서 지켜지는 한 가지 이유 : 유연안정한 노동시장구조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런 제도와 큰 불편 없이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 1976년 법에서 주당 총 영업시간을 최대 52시간까지만 허용한 데서 비롯한 평일 저녁 특별 쇼핑시간인 코옵아폰트(koopavond)의 전통이 지방 정부의 법정 개입 없이도 자발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즉, 대부분의 가게들은1996년 법에서 허락하는 범위를 다 사용하지 않고 통상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또는 6시까지 영업하기 때문에, 평일 저녁은 물론 토요일 저녁에도 문을 닫는다. 대신 평일 딱 한 번은 일제히 오후 9시까지 문을 연다. 코옵아폰트 요일은 도시마다 다르지만, 주로 목요일이나 금요일로 지키고 있다. 그리고 월요일 오전에는 가게들이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오전 11시나 오후 1시쯤에나 문을 연다. 1996년 법에서 허락한 최대치를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유통업자나 소비자가 제한적인 유통업 영업시간에 대한 불만이 크지 않은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큰 불편 없이 잘 지내는 이유는 네덜란드 특유의 노동시장 구조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네덜란드는 2011년 기준 파트타임 노동자가 일하는 전체 노동자 중 48.3퍼센트에 육박한다. 파트타임이라 해서 다 비정규직인 것은 아니다. 정규직이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노동자들도 많으며, 풀타임 노동자라 하더라도 일주일에 하루는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종도 상당하다. 즉, 평일 오전·오후에 장을 보거나 쇼핑을 할 수 있는 수요가 많다는 뜻이다. 파트타임으로 일해도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이 관철되고,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상쇄시켜주는 제도가 네덜란드 소비자들로 하여금 밤늦게 허겁지겁 쇼핑하지 않아도 낮에 느긋이 장을 볼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해주는 것이다.

▲ 한국의 다이소에 해당하는 잡화점인 '블로커(Blokker)'의 개점시간을 보여주는 웹사이트

1996년 유통업 영업시간법과 민생정치, 비례대표제

자민당이 발의할 때 큰 틀에서 내 건 시장자율화라는 거창한 구호에 비해서, 1996년 법 내용은 사실 급진적이기보다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1996년 법 서문에서는 사회변화 및 규제를 줄이고 간소화할 필요와 관련해서 1976년 법을 1996년 법으로 대체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그 뒤 이어서 나오는 조항들은, 곧 자민당 뿐 아니라 의회 내 군소정당들의 전략적 입장을 반영한 타협안이 채택된 결과이다.

네덜란드에서 상대적 다수당으로서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고자 하는 정당은 반드시 반대쪽 정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전국구 비례대표제, 즉 정당들이 득표한 비율대로 하원 의석을 차지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원내 특정당이 절대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현실에서 극히 적다. 이 제도는 선거구에서 최다득표를 한 후보만 원내로 진출하고, 다른 정당 후보를 지지했던 국민들의 의사는 사표(死票)가 되어 실질적으로 원내에 반영되지 못하는 다수대표제에 비해서, 국민의 의사를 원내 의석수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장점이 있다.

다수대표제가 양당제를 고착시키는 경향이 크고 의석자리보전을 위한 정쟁을 촉진한다면, 비례대표제는 정치를 국민들이 실제 원하는 것, 즉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쟁과정으로 국민들에게 가까이 데려오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각 정당지지자들의 생활문제를 보다 실질적으로 고민하는 정당들이 출현하고, 그 정당들이 정견을 의회 밖에서가 아니라 의회 내에서 구체적인 법안으로 관철하는 데에는, 비례대표제의 확대가 톡톡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1996년 유통업 영업시간법 발효과정에서도 작은 예지만 엿볼 수가 있다.

영업시간규제의 정신

사실 레스토랑과 카페와 같은 요식업은 유통업 영업시간법의 통제를 받진 않는다. 이는 지방 정부 차원에서 조례를 통해 영업시간을 규제한다. 레스토랑과 카페는 영업시간대가 일반 가게들보다 다양하고, 밤늦게까지 여는 경우도 많은데, 지방 정부마다 정책이 있고 큰 원리는 앞에서 말한 유통업 영업시간법과 비슷하다. 지방정부에서 정한 정규영업시간 외에 예외적인 영업연장을 원할 경우 3주 전에 미리 신고해야 하고, 소정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며, 연 12회까지 예외신청이 가능하다.

한편, 요식업은 요식업허가권(horeca exploitatievergunning)을 수수료를 내고 신청해 발급받아야 하는데 이 때 아침-낮 시간대 또는 낮-저녁 시간대, 저녁-새벽 시간대 식으로 영업시간 카테고리를 정한다. 이벤트 등을 위해 연장영업을 하는 경우는 지역일반조례(Algemene Plaatselijke Verordening)에 따라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

왜 정부가 나서서 영업시간을 규제하는지, 그 이유를 필자 나름 생각해보았다. 사실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영업시간을 늘리고 싶을 것이다. 남들 다 닫을 때 나만 열면 어딘가 있을 수요를 내가 끌어들이기도 쉬울 것이다. 그렇다고 허용해야 할까? 하나둘씩 늦게 여는 상점들이 늘어나다 보면, 너도나도 열게 되고, 결국 손님이 잘 오지 않는데도 문을 열고 있게 될지 모른다.

장사가 잘되면 기쁘지만, 만약 경쟁에 밀려 장사가 잘 안되면 제한 없는 영업시간이 오히려 불안감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긴 영업시간 및 영업경쟁에 따르는 장기적 사회비용을 고려할 때에 다음과 같은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 다 같이 쉬자' 약속하고, 경쟁의 마지노선을 정해놓은 다음, 그 공적인 약속에 따라 다 함께 쉬어버리는 것이다. 나만 쉬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쉬어야만 하니까, 다리 쭉 펴고 평일 저녁을 즐길 수 있고, 법정 휴일에 조금이나마 더 맘 편히 쉴 수 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중앙 정부에서 큰 원칙을 잡고, 지방 정부는 그 지역 사정을 고려해서 예외를 허락하는 경우들을 지방의회에서의 토론과 의논을 통해 정한다.

※ '정치경영연구소 유럽르포-네덜란드' 편, 下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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