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저런 아젠다는 넘쳐나는데 뚜렷한 쟁점이 없다. 유권자를 정권재창출을 원하는 쪽과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쪽으로 구분할 때, 이들을 가르는 기본 쟁점이 없다.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을 투표동기로 추동하는 쟁점이 없다는 뜻이다. 말은 살벌하나 구도는 밋밋하다. 이대로는 단일화가 성사되어도 야권이 승리하기 어렵다.
쟁점이 없다는 말은 곧 야권과 야권 후보가 무능하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등 진보 아젠다에 대한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쟁점을 없애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른바 정책선거가 아닌 인물선거를 지향하고 있다. 인물 요인에서 앞서고 있어 불가피한 전략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캐릭터 선거로 가면 투표율을 끌어올릴 동인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책 쟁점을 중심으로 여야 간에 분명한 전선이 형성되지 않으면 야권이 승리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이제 야권은 '단일화'(unification)와 더불어 '차별화'(differentiation)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사실 3자 구도가 갖는 단점은 여야 간의 차이가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는 것이다. 야권의 두 후보 간에 어떻게 다른지를 봐야 하기 때문에 여야의 차이가 도드라지게 노출되기는 어렵다. 쉽고 단순하지 않으면 정치 정보가 거의 없는 다수의 보통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쉽지 않다. 지금의 3자 구도는 여 대 야, 야 대 야의 이중 대립이기 때문에 미묘하고 복잡하다.
물론 단일화가 되면 구도도 간명해 질 것이다. 그러나 굵고 선명한 선이 그어지려면 단일화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부터 여야 간에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즉, 차별화가 추진되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투표시간 연장이다. 투표권의 법적 허용이라는 '형식적 참정권'을 넘어 누구나 먹고 사는 문제 등으로 투표권 행사에 제약을 받지 않는 '실질적 참정권'으로 나아가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가난한 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제다.
이런 말이 있다. '투표(vote)하지 않으면 대표(representation)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투표해야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갖게 된다.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과연 누가 대변하고 대표하고 책임지겠는가.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투표가 개인의 의지나 덕성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투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권은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강제다.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하려면 그 유권자 앞에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대안, 즉 정당과 후보가 존재해야 한다. 유권자는 제시된 대안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당과 후보가 차별화되지 않으면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기 어렵다.
투표시간을 늘려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투표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주는 것도 필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투표할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누가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랴" 하는 정서는 정당과 후보 간에 차이가 없거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런 정치불신, 정치 효능감의 상실은 대체로 비(非)보수 정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지금 여론조사를 보면 정권재창출 희망 대 정권교체 열망이 4:6의 구도다. 여야 후보의 지지율도 4:5의 구도다. 야권이 유리한 구도다. 그런데 후보 이름을 집어넣어 조사하면 1:1 대결에서 여야가 박빙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단일화를 하더라도 박근혜 지지나 기권으로 이탈하는 표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왜 이탈하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다.
정권교체의 열망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생겨났다. 그런데 야권의 후보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여당 후보와 다른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또는 다른 해법이 있더라도 다수의 유권자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야권의 후보가 돈 없고 힘 없고 백 없는 사람들에게 아직 다른 대안으로 서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결과 정권재창출을 거부하나 대안을 찾지 못하는 유권자들이 이탈하는 것이다.
▲ "젊은 층과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익숙한 기권의 무기력을 딛고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야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야권의 후보들이 정치개혁 경쟁을 벌이고 있다. 좋은 일이다. 정치개혁이란 우리 정치의 낡은 관행이나 제도, 행태 따위를 개선하자는 게 아니다. 정치의 '기능'이 바뀌어야 한다는, 즉 정치가 삶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경제적 문제가 아닌 다른 이슈를 중심으로 정치가 이뤄지는 것에 대한 반성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권이 정수장학회에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보수야 어차피 사회경제적 문제가 아닌 다른 이슈에 기초한 프레임을 짜야 하기 때문에 북방한계선(NLL) 따위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진보는 다르다. 정치·도덕적 이슈에만 매달려서는 곤란하다. 먹고살기 힘들어 정치를 어렴풋이 '발견'하는 유권자들이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정권교체를 원하고 있는데, 그들의 열망에 부응하지 않는 쟁점에 끝도 없이 긴박되어서야 되겠는가.
이제 야권이 승리하려면 국면을 바꿔야 한다. 프레임을 새롭게 짜야 한다. 단일화로 국면을 바꾸고, 차별화로 프레임을 재편해야 한다. 야권은 이제 단일화 국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단일화 국면은 논의단계와 협상단계, 실행단계로 나눌 수 있다. 당장 협상 단계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논의는 시작해야 한다. 안철수 후보가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더 늦어지면 여야 간 전선이 아니라 야-야 간 전선이 넓어질 것이다. 온당치 않다.
야권의 후보가 둘이든 심지어 셋이든 여야 후보들의 차별성이 선거의 제1 전선으로 부각되어야 한다. 여와 야의 정당·후보 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드러나야 유권자들이 움직일 것이다. 이 차별화는 정당과 후보들의 의지가 관건이다. 야권 후보들은 서로 간의 차이는 별개로 하고, 자신들이 여당 후보와 어떻게 다른지 드러내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에서 연대해 여야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할 때 비로소 승리할 것이다.
대선을 40여 일 앞둔 지금, 이제 단일화는 빠를수록 좋다. 단일화 프레임이 작동해야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의 지지층이 승리에 대한 기대를 키워나갈 수 있다. 단일화는 차별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여야 간에 1:1 대결구도가 되면 양자의 차이와 지향을 쉽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훨씬 용이하다.
단일화와 차별화를 위해 문 후보는 민주당의 인적 혁신을 이번 주에 반드시 마무리해야 한다. 안 후보는 단일화 프레임을 수용해야 한다. 안 후보가 차별화해야 할 대상은 문 후보가 아니라 박 후보다. 야권이 국민들에게 문안드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야권의 후보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젊은 유권자들을 '분격시켜야'(fire up) 한다. 젊은 층과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익숙한 기권의 무기력을 딛고 떨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야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법이다. 단언컨대,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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