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지난해 초 독재자 무바라크가 시민혁명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사실상 군부독재라고 할만큼 군최고위원회라는 기구가 실권을 휘둘렀다.
그중에서도 군최고위원회 위원장 후세인 탄타위는 무바라크 치하에서 국방장관만 20년째, 그리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도 새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초대 국방장관 자리를 내줄 만큼 최고 실세로 알려졌다. 그런 인물을 대통령이 전격 해임한 것이다.
중동 소식에 정통한 <알자지라>의 현지 특파원은 "누구도 예상 못한 조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할 만큼, 그동안 소위 '이집트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소식통들이 예상한 것과 동떨어진 행보다.
▲ 이집트의 새 대통령 무르시가 군부 최고 실세를 전격 해임하는 등 군부에 대한 강력한 반격을 가하자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무르시의 초상화를 치켜든 채 환호하고 있다. ⓒAP=연합 |
서방언론들, 군부가 수용할 조치인지 의심할 정도
무바라크가 퇴진한 이후 처음 자유선거로 치러진 대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의 후보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승리하고 무르시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그동안 '식물대통령'이라는 조롱을 받아왔기 때문에 <뉴욕타임스> 같은 서방언론들은 이번 발표가 나온 직후 "군부가 수용할지 불확실하다"는 식으로 어리둥절해 했다.
무르시 대통령이 취임 한달 반만에 군부에 이처럼 '한판승'에 가까운 조치를 군부의 반발 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탄타위는 일주일 전 시나이 반도에서 무장세력에 의해 국경수비대 군인들이 사살된 사건이 벌어진 뒤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할 때도 국방장관이 동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대통령과 군부가 긴장관계이기는 해도 어쩔 수 없이 함께 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관측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집트 대통령실 발표에 따르면, 탄타위 뿐 아니라 군부의 2인자로 불리는 육군참모총장도 동시에 해임하면서 이 조치는 즉시 효력을 발휘한다고 밝혔다.
'식물대통령'으로 만든 임시헌법도 즉각 폐지
그뿐이 아니다. 군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임시헌법도 무효화시켰다. 이집트 군부는 사법부를 장악해 무슬림형제단이 창당한 자유정의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총선을 위헌으로 판결하게 만든 뒤 의회를 해산했고, 임시헌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임시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군최고통수권자이지만, 군최고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전쟁선포도 할 수 없게 돼 있다. 그래서 임시헌법 하에서 이집트의 대통령은 '식물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하지만 군부에 반격을 가할 기회는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지난 5일 시나이반도에서 국경수비대원 16명이 무장괴한에게 살해된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이다.
성지순례지로 유명한 시나이 반도는 남한의 절반보다 큰 곳으로 원래 이곳은 국제적인 협약에 따라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곳이다. 이집트 군부가 강력할 때는 치안도 잘 이뤄진 편이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정권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이 지역 주변은 온갖 무장세력들이 충돌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무장세력들의 해방구'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시나이반도 혼란 사태, 군부 문책 기회로 삼아
국경수비대원들이 무장괴한의 공격을 받아 숨진 뒤 이틀 뒤에 다시 국경 검문소 한 곳이 피습을 받는 등 무장세력의 공격이 이어지자 이집트군은 아파치 공격용 헬기를 동원해 무장세력이 탑승한 차량 3대를 폭격하는 작전까지 벌였다. 이집트군의 공중 폭격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40년 만에 처음이다.
무르시 대통령은 이처럼 시나이 반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군부를 압박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내각 임면권을 갖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정권의 부담이 될 상황을 내각 각료에 대한 문책의 명분으로 삼았다.
무르시 대통령은 일단 정보국장을 경질하고 헌병 사령관 교체를 지시했다. 나아가 군최고위원회 위원장이자 국방장관인 탄타위와 2인자로 알려진 육군참모총장까지 해임한 것이다.
무르시 대통령은 군부의 임시헌법을 폐지하면서 새로운 헌법선언을 발표했다. 새 헌법에 따르면 헌법 초안을 작성할 제헌 의회가 15일 안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대통령이 모든 사회의 정파를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제헌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헌법 초안 작성이 완료되면 30일 이내로 이를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군부가 임시헌법을 무기로 새로운 헌법 제정을 계속 미루고, 군부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한 헌법을 획책할 것이라는 전망도 흔들리게 됐다.
군부, 시대 흐름에 밀려 입지 급속 약화 조짐
하지만 이집트에서 대통령과 군부의 대결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조심스러운 분석도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한 중동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해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와의 전투에서 이긴 것이지, 군부와의 전쟁에서 이긴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무르시 대통령이 해임한 탄타위와 참모총장 두 명에게 국가훈장을 수여하고, 대통령 고문으로 임명한 것에서 보듯 이번 조치가 정권과 군부의 현실적 타협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랜 세월 경제적 이권에서부터 사법부까지 휘둘러온 군부가 몇 사람이 바뀌었다고 금세 무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군부가 이런 타협에 응했다는 것 자체가 시대의 흐름에 군부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나가는 것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의 상징적 장소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무르시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를 치켜든 채 환호하는 모습도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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