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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북핵,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한반도 브리핑] 악순환의 인질이 된 남-북-미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국면이 20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동안 우여곡절의 파고들을 수없이 지나왔다. 진전이 전무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막다른 골목 같은 원점으로 되돌아온 듯하다. 여기 저기 출구를 찾아 헤매고 난 후인지라 원점보다 더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플루토늄에서 우라늄으로, 우라늄에서 미사일로, 그리고 미사일에서 인공위성으로 종목이 바뀌어왔어도 양자회담에서 6자회담으로, 북미와 남북으로 행위주체의 다양화도 시도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 이상의 새로운 방법은 없을 것 같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해답일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20년간 동원했던 모든 문제들을 올려놓고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해보고 최적의 방안을 도출해야 할 때이다. 더욱이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시급히 실천에 옮겨야만 할 때인 것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마지막 국면을 향해 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파국적 충돌'이든 '극적 해결'이든 아무튼 종착역이 가까운 것 같다. 그야말로 이제는 어느 누구도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정책 실패나 협상전략의 부족을 포함해서 다른 이유들도 물론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과 북한 공히 시간이 자기네 편이라는 인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을 보자.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후 미국은 유일패권으로 등장했다. 현실주의적 패권 행사 차원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적 진보와 변화의 주도권을 독점했다. 게다가 탈냉전 도래 10년에 일어난 9.11 사태는 미국의 패권 행사를 더욱 공격적이고 일방적이게 만들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문제는 테러 등과 함께 이러한 미국의 절대적인 지위와 변화담론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선택은 칼자루를 쥔 미국의 몫이었다. 도전 세력을 포용해 변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봉쇄해서 무너뜨리든지 미국의 국익에 따라 주관적으로 결정되었다.

북핵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졌다. 1993~94년 전쟁 가능성까지 거론되던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타개한 것이 북미 제네바합의였으나, 미국은 주판알을 튕기며 잠정 결론을 숨기고 있었다. 즉, 북한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려는 의도는 거의 없었으며 시간을 보내면 북한 체제는 쇠약해져 다른 사회주의 체제들처럼 붕괴할 것으로 간주했기에 시간은 미국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북한 핵문제 해결의 가장 큰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다.

북한도 핵무기 개발을 축적하면서 억지력을 강화할 수 있으므로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인식해왔다. 1994년 제네바합의와 2005년 9.19 공동성명을 포함해 그동안의 여러 합의 사항들은 북한에 있어 핵협상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을 이루려는 의도와 핵무기의 실제 보유를 통해 대외 위협을 억지하려는 의도 사이의 양다리 같은 것이었다. 즉, 핵의 폐기가 아닌 동결을 통해 북미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까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원하는 만큼 얻는다면 포기할 수도 있지만, 안 된다면 핵개발을 재개하면 된다고 믿었다.

과거부터 북한에 미국의 존재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말살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적 실체를 인정받고 생존을 보장받아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한미가 비대칭동맹이듯 북미는 비대칭 적국관계라는데 북한의 딜레마가 놓여있다. 적대적 위기 상황이 최고조에 이르지 않으면 미국으로서는 대북 협상이나 보상을 제공할 동기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북한은 지난 20년간 벼랑 끝에 서서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과시하는 방법으로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런 협상은 파국적 상황만 회피할 뿐 어느 쪽도 해결을 위한 진정성은 없었다. 즉, 해결보다는 시간끌기를 위한 협상에서 대타결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힘들었다. 특히 한미 양국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생각보다 때에 따라 북한을 달래면서, 또는 제재하면서 북한의 항복이나 붕괴를 위한 시간벌기를 해왔다. 기우제를 지내듯 하늘만 쳐다보고 비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미 양국의 희망적 사고와는 달리 북한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제네바합의의 효과로 8년간, 그리고 9.19 및 2.13 합의로 몇 년 더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위험성은 증가했고, 몸값과 판돈은 커져버렸다. 플루토늄, 고농축 우라늄, 핵실험, 미사일, 위성으로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왔다. 그것도 부족하면 핵문제 범주를 넘어서는 연평도 포격까지 동원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에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다.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되었지만 그만큼 대미협상용으로서의 가치는 점점 약화되었다. 벼랑끝 전략 역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아래 있으며, 가능한 옵션도 별로 남아있지 않다. 강자와의 대결에서 '약자의 전횡'(tyranny of the weak)으로까지 불려왔던 북한이지만 지금까지 실속 있는 보상을 거의 받아내지 못했다. 약간의 식량과 중유, 그리고 미완성의 잔해로 남은 경수로가 전부다.

▲ 지난 4월 18일 미국의 위성이 촬영한 북한 핵실험장 모습

지난 20년하고도 수년 동안 파국도 대타결도 없이 도발과 협상 사이를 수없이 오가면서 위기에 대한 면역성이 증가하고, 역설적으로 안정감마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그 변동의 진폭은 커지고, 의외성과 변덕성이 더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해결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점점 커지고 있으며, 방법과 시간은 거의 소진되어 가고 있다.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몰고 가는 것은 한미 양국은 물론이고 북한도 대외적 위기를 대내정치 변동에서 권력 강화를 위해 이용하고 있는 점이다. 북한은 아직은 불안한 김정은 체제의 결속을 위해 이용하고, 한미 양국은 연말 대선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 광명성 3호 발사가 바로 이를 반영한다.

2.29 북미 합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광명성 3호 발사로 또 다시 무산되었다. 이를 단순히 북한의 여전한 비합리성 탓으로만 보고, 제재와 강경 대응에만 몰두 하는 것은 한미 양국의 국내정치에는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악순환일 뿐이다. 단순한 반복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잠재 위험과 폭발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이 2.29 합의 전에 이미 북한의 위성 발사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합의 과정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단순 실수라기보다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테스트 성격이 강했다고 판단한다. 합의 이후 북한이 발사를 멈추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은 손해볼 것이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북한을 '약속 파기자'(a deal breaker)로 낙인찍어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있고, 식량 제공은 시행 전이므로 멈추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의 극적 타결 의사는 없이 11월 재선 가도에 발목을 잡지 못하게 묶어두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시간벌기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시간은 이제 누구의 편도 아니다. 부시 8년과 MB-오바마 4년간 봉쇄정책 및 선(先) 핵폐기론은 실패한 정책이며, 북한이 핵무기 보유국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엄존하는 진실이다. 이제 남-북-미 모두가 악순환의 인질이 되어버렸다. 날이 설대로 선 상호 비난들이 오가며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말 대 말'의 위협으로만 그치면 다행이지만, 불안한 살얼음판이다. 합리성의 게임이 국제정치의 대부분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의외의 변동성을 늘 품고 있다는 점을 언제까지나 간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기 충족적 필연성만 믿고 밀어붙여서는 곤란하다. 한국 정부나 언론이 집중적으로 제기하듯이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포함해 더 강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예측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희망이 사라지고 파국이 온다면 당사자인 남북한 국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더 많이 가진 남한이 더 피해를 입게 될 것도 명백하다.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있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 북한이 위기를 조장하고,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갈 힘은 있겠지만, 대립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할 힘은 없다. 북한의 백기항복이나 붕괴가 해결책이 될 수는 있지만 이것만 붙들고 지금까지 낭비한 지난 세월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결국 해결책은 미국에서 나와야만 하고,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한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물론 현실은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한미 양국 정부에게 남은 임기 내에 대북 노선의 대전환을 촉구한다. 퇴임을 앞둔 시점에서 여전히 북한 붕괴 가능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로켓 발사 사태에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재임 4년간 대북정책의 실패를 감추려는 꼼수를 버리지 않는다면 아까운 시간을 또 허비할 가능성이 크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닌데, 결국 새로운 양국 정부가 들어설 내년 봄까지 거의 1년의 시간을 또 흘려보내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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