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는 '핵과 냉전'이다. '손 안대고 코 푼 격'이지만 아버지 부시는 고르바초프와 만나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또한 기술적 성능은 입증되지 않고 막대한 예산 낭비와 국제관계의 불안을 초래한 전략방위구상(SDI)도 사실상 철회했다. 주로 전술핵무기를 폐기를 염두에 둔 INF 조약도 이행했고, 한국에서 전술 핵무기 철수도 선언했다. 또한 소련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돌입해 서로의 영토를 겨냥한 핵탄두 감축 시대도 열었다. 그러나 아들 부시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신냉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냉전적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특히 탈냉전으로 향하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제동을 걸었다. 레이건의 SDI를 미사일방어체제(MD)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고 핵군축 협상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금기의 무기' 핵을 선제공격의 수단으로 공식화했다.
아들 부시 시대의 핵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소 탈냉전 직후인 1990년대의 흐름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핵 숭배주의에 익숙한 미국에서조차 부시가 얼마나 예외적인 존재인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탈냉전 이후 미소 핵 협상의 흐름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레이건의 변신에 힘입어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핵군축 협상은 조지 H.W. 부시가 1988년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정체되었다. 미소 양국의 해제된 비밀문서들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고르바초프에 대해 오판하고 있었다. 부시는 고르바초프가 여러 차례에 걸쳐 나토와 유럽 주둔 미군이 독일의 재무장을 방지하는 등 유럽에서 안정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냉전 종식을 근거로 유럽에서 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으로 의심했다. 이에 따라 고르바초프는 부시가 대통령 당선자일 때부터 관계 개선을 추구했지만, 부시는 소련 정책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자신이 고르바초프의 명성에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질투심도 작용했다. 미소간 핵군축 협상이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부시가 동유럽 방문을 통해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에 힘입어 유럽 정세가 크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쿠데타 발생 등 소련 분열이 가속화되어 고르바초프의 권력이 눈에 띄게 약화되기 시작한 1991년 6월 이후부터였다.
1987년 체결된 INF 조약 이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전술 핵무기 폐기가 상당 부분 완료되자, 미소 양국은 전략 무기 감축 협상을 개시했다. 이번에는 SALT처럼 전략 무기를 '제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프로세스가 시작된 것이다. 1차 서명은 1991년 7월에 이뤄졌다. 이 협정을 통해 양측은 핵무기 운반 수단을 1,600개로, 핵탄두를 6,000개로 감축하기로 했다. 1,600개를 넘어선 운반 수단을 폐기하고 핵탄두 수에 제한을 두기로 한 것은 SALT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또한 양측의 합의 이행을 검증하기 위해 현장 방문과 위성 활동도 허용했다. 그러나 이 합의 6개월 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등 구소련 국가들의 핵무기 폐기를 우선순위로 다루기로 했다. 이에 따라 미국-러시아의 START I의 이행은 당초보다 4년이 늦은 2001년 12월에야 완료됐다.
START I 합의에 성공한 미국과 러시아 양국은 1992년 6월에 2차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II) 협상에 들어가 1993년 1월에 서명에 이르게 된다. 이 협정의 골자는 양측의 전략 핵탄두를 2003년 1월까지 3,000~3,500개로 감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고 그 해 9.11 테러를 틈타 12월에 ABM 조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함으로써 이 협정은 발효되지 못했다. START는 ABM 조약의 유지를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미국이 MD 구축의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이 조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함으로써 START도 중단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협상에 들어갔던 START III도 무산되고 말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대한 미국 안팎에서 비판이 비등해지자 부시도 핵군축 협상에 나섰다. 대신 START라는 이름을 버리고, 전략공격무기감축조약(SORT)을 들고 나왔다. 부시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2년 5월에 서명한 이 조약의 골자는 양측의 전략 핵탄두 수를 1,700~2,200개로 감축하는 것이었다. 언뜻 보면 START보다 핵탄두 감축량이 더 많아 진일보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꼼수'가 숨어 있었다. START와는 달리 SORT는 감축된 핵탄두와 운반체의 '폐기'를 명시하지 않아, 핵탄두를 미사일에서 분리해 비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많은 군비통제론자들이 SORT를 '무늬만 핵감축'이라고 비판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 들어 미러 핵감축이 중단된 데에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부시의 MD에 대한 집착이 자리잡고 있었다.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르면서 추진한 전략방위구상(SDI)은 약 1,000억 달러를 군산 복합체의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냉전 해체와 함께 사라지는 듯했다. 아버지 부시는 1991년 연두 교서에서 SDI를 '제한적 미사일 공격에 대한 지구 방어(Global Protection against Limited Strikes)'로 대체한다고 발표해, 사실상 SDI 폐기를 선언했다. 뒤이어 집권한 클린턴 행정부는 레이건 정부 때 설치된 전략방위구상기구(SDIO)를 탄도미사일방어기구(Ballistic Missile Defense Organization, BMDO)로 대체하면서 MD 규모를 더욱 축소했다.
1993년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의 1기 MD 정책은 해외 주둔 미군 및 동맹국 방어용인 '전역미사일방어체제(Theater Missile Defense, TMD)'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반발도 그리 크지 않았다. 러시아가 미국의 MD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MD가 러시아의 미국 본토에 대한 보복 능력을 약화시켜 미러 간의 '전략적 균형'이 무너진다는 데 있었는데, 중단거리 미사일 요격용인 TMD는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8년 들어 클린턴 행정부가 강경파에게 밀려 미국 본토 방어용인 '국가미사일방어체제(National Missile Defense, NMD)' 구축을 시도하면서 러시아의 반발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중국 역시 미국의 MD가 북한을 구실 삼아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 러시아와 공동 대응에 나섰다. 두 나라는 1999년 10월 정상 회담을 통해, 미국의 MD는 "국제 사회에 단일한 생활양식, 가치관, 이데올로기 등을 수용할 것을 강요하는 단극 체제를 강화할 것이며, 진영 간의 군사적 대립을 확대.강화하고, 국제법을 권력 정치로 대체하거나 무력에 더 의존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MD가 국제 정세의 핵으로 부상하는 순간이다.
▲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
'스타워즈'의 귀환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한 MD를 둘러싼 강대국들간의 갈등은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부시 행정부의 MD에 대한 집착은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다. MD는 기독교 근본주의자 부시 대통령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실현시켜줄 꿈의 기술이었다. 미국에게는 '절대 안보'를, 세계에는 "악의 축"들을 제거해 자유와 번영을 선사해줄 '신의 방패'와 같은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부시의 대외정책을 주도한 네오콘들에게는 최강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구비해 미국 패권의 시대를 21세기에도 다지는데 유력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의회와 군부, 행정부에 긴밀한 유착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군수산업체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부시 행정부의 MD에 대한 집착은 2008년 3월 11일 헤리티지 재단 주최로 열린 레이건의 '전략 방위 구상' 연설 25주년 기념식에서 딕 체니 부통령이 한 연설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역사상 최강의, 그러나 최악의 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체니는 이렇게 말했다. "레이건의 연설은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중대한 것이었습니다.(중략) 레이건의 MD 구상은 냉전 시대를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고, 그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입니다." 그는 "MD야말로 미국의 이상과 독창성, 낙관주의의 결정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낙관주의는 MD와 함께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집권 직후부터 부시 행정부의 정신은 온통 MD에 사로잡혀 있었다. 집권하자마자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중단하고는 2001년 5월 1일에 북한의 위협을 핵심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MD 구축을 선언했다. 2001년 9.11 테러 전후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9월 11일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라이스는 '현재와 미래의 위협과 문제'라는 주제로 다른 외교안보 수뇌부와의 사전조율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의 요체를 담은 연설문을 작성하고 이를 발표할 터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 테러가 발생하면서 연설 대신 지하 벙커에 몸을 숨겨야 했다. 주목할 점은 미국 정보기관 일각에서 이미 테러 징후를 포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스의 연설문에는 테러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탄도미사일을 미국이 직면한 최대 위협이라고 규정하면서 MD 구축이 미국 안보의 최우선 과제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게 가공할 공포와 피해를 안겨준 위협의 실체는 부시 행정부가 그토록 강조했던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가 납치한 민간 여객기였다.
위협의 실체를 잘못 짚었던 부시 행정부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9.11 테러직후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유력 언론과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가 안보의 최우선 순위를 잘못 선정했다며 MD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두 가지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여객기로 공격한 테러집단이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MD를 정당화하면서 ABM 조약에서 탈퇴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WMD 및 알카에다와 연계시켜 침공의 구실을 쌓아 가는 것이었다. 9.11 테러를 WMD 위협을 전면화시키면서 MD와 이라크 침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ABM 조약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부시 행정부는 MD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다. 미국 내에서는 9.11 테러 이후 '국가 안보 절대주의'가 맹위를 떨치면서 MD에 대해 입도 뻥긋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러시아와 중국 등 MD에 강력하게 반발했던 나라들도 '초상집에 가서 빚 독촉하지 마라'라는 말을 상기한 듯, 미국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다. 그리고 2002년 10월에 터진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를 계기로 부시는 MD 구축에 한층 열을 올렸다. 약 1억 달러가 드는 MD 실험을 수시로 실시했고, 200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는 성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MD 시스템을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 배치했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2004년 '선거용'이라는 비난도 거세게 일었다. 부시의 'MD 사랑'은 임기 막바지까지 계속됐다. 2008년 2월 하순에는 '고장 난 첩보 위성'으로부터 지구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지스함에 장작된 요격 미사일인 'SM-3'로 이 위성을 격추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체코 공화국과 MD용 레이더(X-밴드 레이더) 기지 배치 협정에 서명한 데 이어, 한 달 뒤에는 폴란드와도 MD 배치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요격이 가능한 10기의 미사일을 폴란드 영토에, 러시아로부터 불과 180킬러미터 떨어진 기지에 2012년까지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MD는 결코 국제 평화, 특히 미러간의 전략적 안정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여파로 막대한 '오일 머니'를 벌어들인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008년 여름에 미국의 동유럽 MD 배치 합의가 이뤄지자, 러시아의 한 장군은 "폴란드의 MD 기지가 러시아의 핵미사일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러시아 외무부 장관은 "우리의 대응은 외교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군사적 조치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나섰다. 미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부 장관은 "러시아는 지금이 (냉전 시대인) 1988년이 아니라 2008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은 폴란드의 영토를 미국의 영토처럼 방어하고자 하는 확고한 안전 보장 조약을 갖고 있다"며, 러시아가 폴란드를 공격하면 미국이 보복에 나설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격은 구체적이면서도 전방위적이었다. 러시아는 냉전 시대에 레이건의 '스타워즈' 구상에 맞서 개발하려고 했다가 소련 몰락 이후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핵미사일 현대화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미국의 방패를 뚫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이 필요하다는 논리에서였다. 또한 냉전 해체를 상징하는 두 가지 조약과 관련해, 유럽재래식무기감축협정(Conventional Forces in Europe Treaty, CFE) 이행 유보 방침을 정했고, INF는 탈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동유럽 MD를 둘러싼 미러 간의 갈등은 '제2의 냉전' 혹은 '신냉전'의 우려를 자아내고 말았다.
부시 "핵무기는 사용 가능한 무기"
부시 행정부에게 MD가 상대방의 보복 능력을 약화시켜 미국의 군사 행동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면, 핵무기는 지하 깊숙이 숨어 있는 적들을 괴멸시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무기로 간주되었다. 이는 곧 핵무기는 '최후의 보루'라는 금기를 깨고 핵무기를 '사용가능한 무기'(usable weapon)로 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식은 핵 선제공격 전략의 채택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언론들이 2002년 3월초에 입수.폭로한 핵태세검토(NPR) 보고서의 '비밀' 부분에는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등 당시 비핵국가들에 대해서도 핵공격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 보고서를 통해 '새로운 삼중점'(new triad)을 채택했다. 이전까지 미국은 소련 및 러시아에 대한 핵 억제력 유지에 초점을 맞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그리고 대륙간 전략폭격기(Bomber)를 삼중점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핵전략이 "냉전 시대의 유물"이라고 비판하면서 ▲핵.비핵 공격능력의 강화 ▲MD를 중심으로 한 방어망의 구축 ▲다양하고 점증하는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국방 인프라의 재활성화로 전환했다. 그런데 이전 정부의 삼중점이 "냉전 시대의 유물"이라고 비판했던 부시 행정부는 그 유물의 성능을 개량하려고 했다. 전략무기에 해당하는 ICBM과 SLBM, 그리고 전폭기의 파괴력과 정확도를 높이고 수명을 늘리기 위해 수백억 달러를 투입해 현대화에 나선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전략 핵무기를 현대화하면서 새로운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MD와 방위 산업 인프라를 새로운 삼중점에 포함시킨 것이 부시 행정부 핵전략의 본질인 것이다.
NPR 보고서는 또한 "즉각적(immediate), 잠재적(potential), 예상치 못한(unexpected)"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마련해 "이러한 성격의 분쟁시 핵공격 능력을 요구한다"고 명시했다. 즉각적 분쟁의 예로는 이라크의 주변국 공격, 북한의 남한 공격, 중국.대만의 무력 충돌을 들었고, 잠재적 분쟁으로는 "대량살상무기 및 이를 운반할 수단을 갖고 있는 하나, 혹은 복수의 세력이 미국과 동맹국에 대해 적대적인 군사적 위협을 가해오는 것"을 예로 들었으며, 예상치 못한 분쟁으로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같이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도전"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이러한 범주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북한과 이라크는 "고질적인 우려의 대상"으로, 이란, 시리아, 리비아는 경계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중국이 "전략 목표를 개발하고 핵.비핵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있다"며 즉각적, 혹은 잠재적 분쟁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핵 사용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형 핵무기(mini nuke)'로 불리는 '지표-침투형 핵무기(earth-penetrating nuclear weapon)' 개발에 착수했다. 재래식 지하시설 파괴무기로는 지하 깊숙이 숨어 있는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그리고 지도부를 파괴하는 데 한계가 있고, 새롭게 개발하는 소형 핵무기는 "저출력(low-yield) 핵무기이기 때문에 기존의 핵무기보다 낙진과 핵 오염을 줄이는 반면, 동일한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1기 행정부(2001-2004년) 때 마련된 이 계획은 2기(2005-2008년) 들어 '지표관통형 고강도 핵무기'(Robust Nuclear Earth Penetrator) 명칭으로 구체화됐다. 그러나 이 계획에 대해 국제사회와 민주당뿐만 아니라 일부 공화당 의원들조차 반대하고 나섰다. 미국이 새로운, 그것도 실제 사용을 염두에 둔 핵무기를 개발할 경우 그 지구적 파장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손에 넣고자 했던 부시 행정부의 도전은 의회 예산 심의의 벽조차 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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