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과 대선에서는 평화와 외교·안보 문제도 중요한 쟁점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외교·안보 현안이 갑자기 떠오를 때의 표심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긴장을 고조시켜 표를 얻으려는 시도는 이제 어림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졌습니다. 그러나 갈등 조장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듯한 움직임은 여전히 있습니다.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그러한 낡은 시도를 감시하고, 올바른 대외전략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평화에 투표하자' 시리즈를 공동 기획했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필자로 나서는 이 연재에서는 선거 전 불거지는 현안에 대한 대응은 물론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외교·안보 쟁점에서 가져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총선 전까지 매주 1~2회 찾아갈 예정이며, 대선을 앞두고도 이어갈 계획입니다. <편집자> |
▲ 강정마을을 둘러싼 전투경찰에 절을 하는 주민. 국가와 국민의 위치가 바뀌었다. ⓒ조성봉(독립영화감독) |
폭파된 구럼비와 강정의 평화, 국가안보를 종교로 만드는 군
국가안보라는 폭력
국가안보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육지 중앙정부에서 보낸 군대와 경찰이 '세계 평화의 섬'에 사는 현지인들의 반대와 삶을 포위하고 비밀리에 폭약을 터뜨리며 압살했다. 처음부터 군사기지를 추진하면서 군과 중앙정부는 마치 아닌 것처럼 시민을 상대로 온갖 기만과 탈법을 자행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제주도의 천혜의 자연? 지역정부와 주민들의 의사? 국가안보라는 종교에서 이런 것들은 쓰레기로 취급되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 국가안보는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만능장치인가? '민군복합미항'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주변국의 표적이 될 거대 해군기지를 밀어붙여야 하는 군은 진정 국군인가? 모두가 다 아는 국제현실에서 미 해군이 이 기지를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우기는 정부는 그 나라 정부인가? 이는 단지 정부와 군의 불통의 문제일까? 그리고 지난 정부는 단지 미안해하면 그만일까?
그동안 정부와 군은 제주 해군기지 추진을 국가안보와 무장된 평화의 이름으로 강행했다. 현지 주민들의 삶과 뜻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고, 외국의 군사표적이 되어 오히려 위협을 증가시킬 가능성은 이상한 침묵과 비논리로 무시되었으며, 법과 상식에 따른 합의 절차는 편법과 돈과 기만으로 대체되었다. 한편에서는 거대한 절망과 분노가 일고 있고 다른 편에서는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정상적이라고 만족하고 있다. 이 간극은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국군이 폭파시키지 못하는 것
폭파된 것은 구럼비 뿐이 아니다. 강정 주민들의 호소도 동시에 폭파되었다. "눈물이 앞섭니다. 우리도 혈세를 내고 사는 주민입니다. 어찌하여 정부는 조그마한 우리 마을을 짓밟습니까. 구럼비 바위가 발파되지 않고 생명이 살아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지난 7일 서울에서 열린 시국회의에 참석했던 강정주민의 말이다. 현지에서 삶과 공동체를 영위하는 시민들이 이렇게 말하고 압살당하고 절망할 때, 이는 단순한 읍소와 절망이 아니다. 단순히 정부의 부당한 결정, 부당한 절차, 폭력적 집행에 대한 반대와 충격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표현만 다를 뿐 이는 시민이 가져야할 본연의 권리, 즉 시민 주권을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전쟁 준비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 살고 싶은 대로 그대로 살고 싶다. 우리가 우리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 존중하라."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곧 국가도 군대도 안보 논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할 권리, 즉 평화를 영위할 인권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보장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고 군대도 이 의무에서 예외가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강정 주민들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지금까지 국가에 요구한 것은 사실 이런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이를 보장한 의무가 국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평화가 모든 사람의 보편적 가치이며 현 유엔 체제에서 그 회원국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휩쓸리지 않을 권리는 공동체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행사하는 자기결정권에 따라 평화롭게 살 권리와 이를 위해 전쟁 준비와 위협 생성에 휩쓸리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를 침해하는 국가는 정당성을 상실한다. 그런 군은 시민에 기반한 군이 아니다.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법의 원리와 규범에 근거하는 평화의 권리는 이전 정부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이 한때 얘기했던 '무장된 평화'와도 다르다. 평화의 인권은 평화적으로 생존할 권리와 평화 상태를 위해하는 조치를 거부할 권리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러한 권리가 인권이라 함은, 국가가 국제 평화를 저해하는 행위를 할 때 또는 침략적 행위를 하려고 할 때 이에 대해 시민은 감시하고 견제하고 저항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뜻이다. 또 이를 인권이라 함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이를 침해할 수 없다는 뜻이며, 국가안보의 이유로 시민의 권리를 일시적으로 제약할 경우에도 이는 기존에 합의된 엄격한 국제적 인권기준에 따라 한시적으로 명시적인 법의 의거해 제한적으로 제약될 수만 있다는 뜻이다. 이런 규범들이 국가안보라는 교리로 쉽게 무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광기는 한국 사회에 고유한 것이다.
▲ 강정마을에 핀 유채꽃 한 송이 ⓒ조성봉(독립영화감독) |
그렇다면 국군은 무엇을 폭파시켰을까?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국가와 군의 해군기지 강행을 강정마을 너머로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통치 권력이 사익을 추구하며 시민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지 않을 때 그 나라를 부르는 이름이 불량국가 아닌가? 군대가 군의 집단이익을 추구하며 외국 세력에 봉사할 때 그 이름이 용병 아닌가? 이제 세계가 다 아는 기형적인 한미동맹 관계에서 제주 해군기지가 미국 해군 전략과 무관한 것이라 주장하는 군은 과연 어느 국가에 충성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군에 시민의 충정이 지속될 수 있을까?
국가안보라는 구호만 있으면 어떤 군사정책도 밀어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가와 군을 운영하는 것이 시민에게 안전할까? 시민 위에서 군림하고 호통치고 시민을 공격하면서 사익을 추구하는 군에 대해 그 내부에서 위기의식이나 자성의 목소리가 전혀 없는 이러한 상태가 정상일까? 이러한 폐쇄적이고 일사분란한 군이 더 위험한 것은 아닌가? 그러한 조직이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방위할 수 있을까?
보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인권, 특히 평화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에 '국군'이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또다시 폭파시킨 것은 구럼비 바위이기도 하지만, 무고한 시민의 권리와 삶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국군 존재의 정당성이기도 하다.
공익이 아닌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정당성을 포기하는 정부와 군, 문민통제를 초월해서 시민 위에 군림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군사주의 -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선거를 통한 전면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번 총선과 대선은 민주주의와 민생을 회복하기 위한 투표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평화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평화를 위한 투표이어야 한다.
<평화에 투표하자> 1. "긴장 높아지면 대포는 저절로도 터지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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