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C-68의 공식화
흔히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일컬어진다. 미국이 파시즘으로부터 자유세계를 구원했다는 2차 세계대전과 미국이 역사상 최초로 패배한 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여 있는 수준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 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베트남 전쟁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인도차이나 반도 개입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분석이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가 있다. 1950년 4월 트루먼에게 제출된 NSC-68은 한국전쟁을 포함한 냉전사에서 각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문서는 미소 냉전이 싹트기 시작한 1948년부터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까지 변화된 국제정세에 대한 미국의 인식 및 대응 전략을 집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군비 지출에 부담을 느낀 트루먼은 NSC-68 승인을 꺼려했다.
그런데 NSC-68 작성 2개월 후에 터진 한국전쟁은 소련의 군사 모험주의와 팽창주의를 경고한 이 문서의 예언을 입증한 것처럼 간주되어 트루먼의 변심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주미 캐나다 대사인 롱(Hume Wrong)은 1950년 8월 1일, "한반도 문제가 야기한 최선 결과는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미국의 책무를 가능케 하는 군사력을 만드는데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을 동의하게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사장될 위기에 있었던 NSC-68에 힘을 실어줘 미국이 대규모의 군비증강을 바탕으로 공산권에 맞설 힘을 축적하고 군사 패권주의를 추구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문서가 채택될 즈음, 미국에서는 국가안보를 둘러싼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트루먼은 군비 '억제'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지만, 19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의 공산화가 연이어 발생하고 1950년 2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한 훅스(Klaus Fuchs)가 체포되면서 미국 내에서는 매카시즘 광풍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안보파'로 분류된 애치슨 국무장관과 니츠(Paul Nitze)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이 '경제파'의 핵심인 존슨(Louis Johnson) 국방장관을 따돌리고 NSC-68 작성을 주도했다. 핵심적인 요지는 이미 원자폭탄을 손에 넣은 소련이 머지않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해 1954년에는 대미 선제공격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특히 54년까지 미국에 대한 핵 선제공격 능력을 확보한 소련은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핵 위협을 가하면서 유럽을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 문서는 이러한 위협 평가를 바탕으로 미국의 대대적인 군비증강 및 핵 전력 강화, 동맹국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 확대, 정보 및 선전전 능력 강화 등으로 권고했다. 그러나 경제와 복지에 우선순위를 두고 미국의 지나친 군사주의를 경계한 트루먼은 NSC-68 승인을 유보했다. 바로 이 시점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사장될 위기에 처한 NSC-68를 구해냈다. 안보 시험대에 오른 트루먼은 50년 9월 NSC-68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존슨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조지 마셜을 기용했다. 동시에 NSC-68도 공식 승인했다. 북한의 남침을 세계 대전을 준비하는 소련의 전초전이자 대리전으로 인식한 트루먼 행정부는 NSC-68 실행을 통해 소련 위협에 강력히 대처하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NSC-68에 담긴 소련에 대한 미국의 위협 인식에 쐬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특히 미국은 소련의 핵 전력 증강에 주목했다. CIA와 국무부 및 육·해·공의 정보기관들이 참여해 작성한 극비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이 전면전의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원자폭탄"에 있다며, 1950년대 중반에 22개였던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은 51년에는 50개, 52년에는 95개, 53년에는 165개, 그리고 소련이 전면전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은 54년에는 235개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소련은 미국과 영국까지 공격을 시도할 수 있는 항공기와 인력, 그리고 작전기지를 보유하고 있고, 앞으로 충분히 갖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미국이 수적인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소련이 충분한 양의 원자폭탄을 갖게 되면 "소련의 공격 위험은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시에 "미국의 보복 공격에 대한 소련의 취약성 정도는 소련의 계산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미국의 소련 위협 판단은 미국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 전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직전 2백여개였던 미국의 핵무기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에는 1천5백개에 육박했으며, 아이젠하워 임기 막바지였던 1960년에는 2만개를 넘어섰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도 1953년 120개, 1960년 1천6백개에 달했다. 핵 전력 강화를 통해 저렴한 방식으로 안보 태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미국의 군사비도 크게 늘어났다. 한국전쟁 직전 GDP의 4%까지 떨어졌던 미국의 군사비는 전쟁 기간 동안 14%까지 치솟았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당 기간 10% 안팎을 기록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격히 증강된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에게 두 가지 커다란 후유증을 남기고 말았다. 하나는 군산복합체의 영향력 증대이다. 아이젠하워는 1961년 1월 퇴임사에서 말했다. "거대한 군사 집단과 대규모 무기 산업이 결탁하여 행사하는 영향력은 미국의 새로운 경험입니다.(중략) 우리는 깨어 있는 시민들과 함께 정부 각 위원회에서 군산복합체가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위협에 맞서 자기 손으로 키운 군산복합체가 "이제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참회이자 경고였다. 또 하나는 베트남 전쟁 개입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냉전 시대 미국에게 가장 심대한 심리적 영향을 미친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후술키로 한다.
'MAD'를 향하여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유럽에서 서독의 재무장을 추진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강화시켜 나갔다. 미국은 독일의 '경제 재건'은 추구했지만, 적어도 1950년 중반까지 독일의 재무장은 막으려고 했다. 트루먼은 1950년 6월 초순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는 확실히 1차 세계대전 이후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재무장을 방치했다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서독 재무장의 결정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미국 내 반대 여론도 눈에 띠게 줄어들었고, 한국전쟁의 배후에 소련에 있다는 판단으로 유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서독 재무장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핵 전력이 서독의 재무장을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묶어둘 수 있다는 판단도 깔려 있었다.
스탈린은 서독의 재무장을 막기 위해 독일 중립화 통일 방안까지 제안하고 나섰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서독의 재무장 및 서유럽으로의 통합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진행된 상태"였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동아시아 군사 전략의 핵심으로 삼은 "대량 보복" 전략을 유럽에서도 적용하기로 했고, 1954년 12월 나토는 소련의 공격시 신속하고도 대규모의 핵 보복을 가한다는 전략을 공식화했다. 동아시아에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및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동맹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전범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동서 양쪽에서 소련에 대한 포위와 봉쇄망을 강화시켜 나간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의 정세는 스탈린이 당초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냉전 체제에서 미국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그가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끝내 수용한 것이나, 조속한 종전보다는 정전 협상 지연을 선호했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나왔다. 특히 한반도 공산화를 통해 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중국과 미국의 군사 충돌이 미-중 간의 적대관계를 고착화시켜 중국의 대소 의존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의 배후에 소련이 있고 이를 소련발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확신해 전면적인 대소 봉쇄 정책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냉전 체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이념' 대결, 상대방의 절멸을 통한 안보 추구와 이를 위한 핵 군비경쟁 및 그 결과로서의 '공포의 균형',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진영'의 대결이 더욱 격화된 것이다.
고삐풀린 미소간의 핵 군비경쟁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은 1952년 수소폭탄을 손에 넣었고 소련도 1년 후 "슈퍼 폭탄"을 갖게 되었다. '핵융합 반응'을 이용하는 수소폭탄은 '핵분열 반응' 원리에 따르는 원자폭탄보다 동일 질량의 파괴력이 수십배나 강력해 "슈퍼 폭탄"으로 불렸다. 핵무기를 손에 먼저 쥔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그 무기를 미사일에 실어 상대방 영토로 날릴 수 있는 능력은 소련이 먼저 확보했다. 1957년 8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에 성공한 소련은 그 해 10월 인류 최초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했다. 더구나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공공연히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를 핵미사일로 날려버릴 수 있다며 위세를 과시했다. 동시에 그는 1958년 5월에 대기권에서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당시 여러 차례의 핵실험을 계획하고 있던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미국도 ICBM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59년 10월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서로의 영토에 핵미사일을 날려보낼 수 있다는 것은 선제공격에 그 만큼 취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양측은 상대방의 선제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충분한 양의 핵무기를 확보하는 한편, 미사일, 잠수함, 폭격기 등 다양한 운반 수단의 개발·배치를 통해 제2의 공격 능력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기에는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많은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1950년대 중후반의 '폭격기 갭'과 논쟁과 1960년 미국 대선에서 케네디가 제기한 '미사일 갭' 논쟁이 한몫했다. 소련이 미국보다 핵무기 운반체인 폭격기와 미사일을 많이 갖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 미국의 핵무기와 그 운반수단의 보유양을 늘려 그에 대응해야 한다는 정서가 팽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미 1960년을 전후해 폭격기와 미사일을 포함한 핵전력에 있어서 미국이 소련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양국은 자신의 영토에서 상대방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과 언제든 상대방의 핵미사일이 자신의 영토에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심'을 동시에 갖게 됐다. 공교롭게도 약어로 '광기'를 뜻하는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즉 상호확증파괴 시대가 사실상 열린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한림대의 이삼성 교수는 "인간의 집단자결"이라고 표현했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존이 미국과 소련의 정책결정자들의 이성에 호소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과 소련은 그 시험대 위에 올라섰다.
▲ 쿠바의 산 크리스토발 지역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 건설중인 장면 |
미국과의 핵 군비경쟁에서 밀린 소련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당시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거세게 일어난 것에 고무되고 미국의 카스트로 정권 제거 작전에 자극받아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보호하고 확산시키려는 동기도 작용했다. 그러나 소련 미사일의 쿠바 배치를 저지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안보가 치명타를 입을 것으로 판단한 케네디 행정부는 이에 정면 대응을 선택했다. 이것이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시작이다.
1962년 10월 14일 U-2기가 미국에서 불과 145킬로미터 떨어진 쿠바의 산 크리스토발 지역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 건설을 포착하자 케네디는 쿠바를 해상 봉쇄하고, 소련이 미사일을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쿠바에서 미국 본토로 핵미사일이 날아오면 소련 영토에도 보복하겠다'며, 핵전쟁과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는 초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소련은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선단 뱃머리를 돌리지 않았고,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터키에 배치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할 것을 쿠바 미사일 철수 조건으로 제시했다. '예방 전쟁론' 등 강경론에 포위된 케네디 대통령은 용단을 내리지 못했고,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 함정들이 카리브 해에서 13일간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수만 개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강대국의 충돌은 인류 사회 전체를 '절멸의 사선'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했다. 다행히 케네디가 흐루쇼프와의 비밀 협상을 통해 소련 측의 요구를 수용하고, 흐루쇼프가 쿠바 미사일 기지의 철거 명령과 함께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 선단의 뱃머리를 되돌리면서 절멸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양측 인사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소련 육군 작전참모장이었던 아나톨리 그립코프는 "핵 대재앙은 실 끝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하루나 시간 단위가 아니라 분 단위로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케네디의 보좌관이었던 아서 슐레징거(Arthur Schlesinger)는 "이전에 결코 어떤 두 강대국도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보유한 적이 없었다. 백악관의 예방 전쟁론자들이 이겼다면, 그것은 아마도 핵전쟁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특히 미·소 냉전 해체 이후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당시 소련은 이미 쿠바에 100개의 핵탄두를 배치한 상태였고, 선박을 호위하던 잠수함에는 핵 어뢰가 장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미국이 쿠바나 소련 선단을 공격했다면 핵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임을 말해주는 징표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면서 '제한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몸소 체험한 케네디 행정부는 핵군비 통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핵전쟁 전략을 수정한다. 제한 핵전쟁 전략으로는 전면적인 핵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바탕으로, 이른바 'MAD' 전략을 공식화한 것이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마라는 '확증 파괴(Assured Destruction)'가 미국 핵전략의 핵심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는데, 그가 '상호'라는 말을 앞에 붙이지 않은 까닭은 국방 책임자로서 미국도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MAD는 핵전쟁에서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이 핵전쟁을 억제한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쉽게 말해 그 누구도 '너 죽고 나 죽고 모두가 죽는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인간 이성의 최저치에 대한 호소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류 사회의 종말을 가져올 뻔한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고도 '핵의 부재를 통한 생존'이 아니라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의 유지·강화를 통한 생존을 선택한 인간 이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모두가 죽기 전에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치면서 미·소 양국은 한편으로는 MAD에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발적인 핵전쟁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군비 통제 조치를 취하게 된다. 상대방의 선제 핵공격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로의 기지에 대한 위성 정찰 활동을 허용하고 미·소 정상 간의 군사직통전화(Hot Line)를 설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1963년에는 '제한적 핵실험 금지 조약(Limited Test Ban Treaty)'을 체결해 대기권, 우주, 수중에서의 핵실험을 중단하기로 했고, 1968년에는 NPT를 추진키로 해 1970년에 발효시켰다. 미·소 양국이 이렇게 핵군비 통제에 나서게 된 배경에는 '공멸'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 잇따라 핵실험을 하고 많은 나라들이 핵 개발에 나서면서 자신들의 핵독점이 무너질 것이라는 경계심도 깔려 있었다.
1972년에는 미·소 간 군축 협상의 이정표가 세워졌다. 잠정협정(Interim Agreement)과 탄도미사일방어조약(ABM Treaty)을 두 축으로 하는 1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이 바로 그것이다. 잠정협정은 상호간의 전략 핵무기 미사일 수에 제한을 두고 이를 정찰 위성을 통해 검증하자는 것이고, ABM 조약은 상대방의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을 둠으로써 MAD 전략을 유지하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의 핵군비 경쟁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미·소 양측의 핵전력이 강화되어 이에 제한을 둘 필요가 생겼다는 점에 합의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측 모두 핵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이 핵전쟁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점에 합의한 것이다. 미·소 양국은 이러한 SALT를 통해 데탕트에 돌입했다.
그러나 SALT I은 많은 한계를 지닌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핵무기를 감축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수를 '동결'하는 것이었고, 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의 수도 제한하지 않았으며, 장거리 및 중단거리 폭격기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당시 ICBM과 SLBM에서는 소련이 우위에 있었고, 미사일의 정확도 및 장거리 폭격기에서는 미국이 우위에 있었는데, SALT I은 기본적으로 양측의 전략적 균형을 훼손하지 말자는 범위 내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미국은 ICBM 1054기와 SLBM 656기, 소련은 ICBM 1607기와 SLBM 740기가 보유 상한선으로 정해졌다. 그러자 미국 의회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ICBM과 SLBM에 있어서 소련의 수적 우위를 인정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닉슨 행정부는 미국 미사일의 정확도가 높고 장거리 폭격기에서도 미국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설득했으나, 헨리 잭슨(Henry Jackson) 상원의원의 주도 하에 '모든 군비 통제 조약은 모든 무기 시스템에서 수적인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요지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한편 ABM 조약은 미·소 간 군비 경쟁을 완화한 군비 통제 조약의 시금석이라는 칭송부터 소련의 핵미사일로부터 미국을 무방비 상태로 남겨두었다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를 수반하게 된다. ABM은 오늘날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해당된다. ABM 조약은 수도와 ICBM 기지 중심 반경 150킬로미터 이내에 각각 하나의 미사일방어체제 배치만 허용하고, 100기 이상의 요격 미사일 및 발사대 배치, 전 국토 방어용 시스템 구축, 해상·공중·우주 또는 이동식 지상 발사 시스템, ABM 시스템의 타국 이전 또는 국외 배치 등은 금지하기로 했다. 즉, ABM 조약은 MD 구축을 완전히 금지한 것이 아니라 크게 제한한 것이었다. 이 조약의 배경에는 이미 서로가 상대방을 초토화할 수 있는 '창'을 보유한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보유하면 전략적 안정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미국 의회의 반발로 교착 상태에 빠진 SALT II 협상은 1977년 대폭적인 핵무기 감축을 주창해온 지미 카터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활력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1977년 들어 소련이 서유럽을 공격할 수 있는 신형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카터 행정부가 서유럽에 신형 핵미사일 Pershing II 배치를 추진하면서 핵 협상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와 브레즈네프는 1979년 6월 빈에서 SALT II에 서명했고, 카터는 상원의 비준을 요구했다. 합의의 주요 골자는 미·소 양국이 ICBM, SLBM, 전략 폭격기 등 핵무기 운반체의 숫자를 2,400개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제한 대상에 전략 폭격기도 포함시킴으로써 SALT I보다는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으나, 보유 상한선을 2,400개로 대단히 높게 잡고 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의 수에는 또 다시 제한을 두지 않았다는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SALT II는 발효되지 못했다. 당시 미 의회에서는 소련에 대한 불신 및 카터의 유화책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더구나 소련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도 쿠바에 전투 여단을 계속 주둔시키고 있었던 것이 드러나면서 미국 의회의 반소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고 나토가 1979년 12월 Pershing II와 순항 미사일 배치를 승인하고 소련이 12월 말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SALT II는 미·소 간의 신냉전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 카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비난하면서 SALT II에서의 철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소련에 대한 경제 제재, 대규모 국방비 증액 등 일련의 강경책을 발표했다. 이로써 미소 간의 데탕트는 종말을 고했고, MAD를 향한 두 나라의 질주는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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