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국은 왜 핵 공격을 안했는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국은 왜 핵 공격을 안했는가?

[정욱식의 '핵과 인간'] 핵을 통해 본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었다.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Mark W. Clark)가 1954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나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미군 사령관이 되었다는 부끄러운 이력을 갖게 되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15만명이 넘은 사상자를 냈을 정도로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미국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가디스는 트루먼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북한 내에 핵무기를 투하할 만한 마땅한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상 대도시나 대규모 산업시설, 군사기지 및 보급로 등이 핵공격 대상이지만, 북한에는 이러한 것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는 중국을 응징하고 추가적인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중국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도 고려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개입까지 야기하면서 유럽으로까지의 확전을 비롯한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었다. 셋째는 핵무기 사용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던 1951년 상반기에 유엔군의 반격이 본격화되고 서울을 재탈환하는 등 전선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의 시급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부 장관이었던 페이스(Frank Pace Jr.)는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 사용을 지속적으로 검토했지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한국전쟁은 원자폭탄 사용이 요구될 만한 전쟁이 아니었고 생산적인 결과도 자신할 수 없었다." 둘째는 "작은 나라를 상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부담을 느꼈다." 셋째는 "만약 원폭 투하가 비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나면, 유럽 방어에 있어서 원자폭탄의 기능은 최소화되거나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비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무기 불사용 이유에 대해서는 피커링(Trent A. Pickering)이 비교적 자세히 정리했다.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거나 못한 이유를 6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고, 미국이 동북아에서 핵무기를 소진하면 동북아보다 훨씬 이해관계가 큰 유럽에서 소련에게 밀릴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차관보였던 맥네일(Wilfred J. McNeil)의 회고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그는 펜타곤의 강경파들과 달리 "육군과 공군의 상당수 인사들은 한반도에서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한 트루먼 행정부의 방침에 반대"했다며, "미국은 소련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응할 충분한 분량의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둘째는 북한에는 핵무기를 투하할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개전 당시 군사 및 산업 시설 자체가 미비했고, 개전 이후에는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대규모의 공습이 진행되어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100만회 이상 공습을 단행했고, 이에 따라 북한에는 "폭탄으로 날려버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한 북한 지형의 80% 가까이가 산악지형이라는 점 역시 핵무기 사용 효과를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간주됐다.

셋째는 영국 등 유럽 동맹국들의 반대도 한몫했다. 대표적으로 트루먼이 중국군의 참전 직후인 1950년 11월말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자, 영국 수상 애틀리는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을 만류했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들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가 확전을 야기해 유럽 방어에 차질을 줄 수 있고, 또한 소련의 핵 보복이 유럽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핵 공격을 강행하면,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단일대오를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넷째는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한국전쟁 기간에 핵 전력을 증강시킨 것이 미국의 핵 공격을 억제한 측면이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소련의 동맹국들인 북한과 중국에 핵 공격을 가할 경우 소련의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개전 당시에는 미국이 압도적인 핵 우위에 있었지만, 소련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와 전폭기 수를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미국 본토가 소련의 핵공격에 취약하다고 인정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53년 1월 소련의 핵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소간의 핵군비경쟁은 본격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공포의 균형'이 핵전쟁을 억제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냉전시대 미-소 양국의 핵전략이었던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역사적 뿌리로 작용한 셈이다.

다섯째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이다. 전황(戰況)을 놓고 볼 때에 트루먼은 아이젠하워보다 원자탄 사용 유혹을 더욱 강하게 느낄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상대로 최초로 핵무기를 사용한 바 있는 트루먼은 "원자폭탄은 민간인을 대량살상할 수 있기 때문에 독가스나 생물무기보다 훨씬 사악한 무기"라는 인식도 갖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은 핵무기는 승리를 보장해주는 무기일 수 있지만, 그 무기를 또 다시 사용하는 순간 '도덕적 패배자'가 될 것이라는 상호충돌적인 인식을 트루먼에게 안겨준 것이다. 그에게 핵무기는 강력한 '군사적 자산'이자 무거운 '도덕적 부채'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한국전쟁 내내 그를 괴롭혔던 요인이었다. 또한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이어 또 다시 아시아인의 거주지인 북한과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 '미국은 인종 차별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인종주의 시각에서 미국의 핵 정책을 추적해온 매튜 존스는 "(미국의) 아시아인의 의견에 대한 우려야말로 한반도에서 정전협상이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핵무기가 사용되지 못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당시 미국은 원폭 투하의 결과로 중국과 소련으로 전선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고, 확전시 이들 나라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원폭 투하는 '3차 세계대전 예방'이라는 본래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았고, 미국은 3차 세계대전을 수행할 능력도 부족했다. 이러한 인식은 트루먼 행정부 때 팽배했는데, 브래들리가 "우리는 소련이 유럽을 침공할 가능성을 가장 큰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전선을 중국으로 확대하는 것은 우리가 크렘린에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트루먼 행정부보다 핵 공격에 훨씬 적극적이었고 확전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공산군에 대한 핵 공격 '디 데이(D-day)'를 1954년 5월로 잡았다. 그 사이에 핵 전력을 비약적으로 증대해 소련의 핵 보복에도 대비하겠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D-day 10개월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의 핵 공격도, 이에 따른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도 현실화되지 않았다.

핵을 통해 본 한국전쟁의 의미

핵을 가진 자는 힘에 의한 안보와 강력한 외교적 카드, 그리고 유사시 승전의 보증 수표와 국가적 자부심을 손에 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핵무기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가진 자의 주관적인 '믿음'은 객관적인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핵 시대의 첫 전쟁인 한국전쟁은 당시 핵 패권국 미국의 믿음이 현실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핵무기에 내재되어 있는 전쟁과 평화, 안보와 공포, 자산과 부채, 군사와 도덕, 인종 차별주의 문제가 한국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던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의 정치와 교훈의 추출은 천차만별이지만, 이 전쟁이 전지구적 파급력을 야기하면서 세계 현대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미국이 핵 사용을 암시하자, 지구촌에는 또 다시 세계대전의 공포가 엄습해왔고, 영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사활을 건 '예방 외교'에 나섰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의 전쟁에 세계 강대국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세계 지정학이 요동친 데에는 숭배와 혐오를 동시에 품고 있었던 핵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은 처칠이 1946년에 말한 '철의 장막'을 전지구적으로 확대시켜 놓았고,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핵 군비경쟁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했다. 냉전 체제의 핵심적인 특징을 이념 대결, 진영간 대결, 핵 대결이라는 세 수준에서 정리해본다면, 한국전쟁은 냉전 여명기의 모순을 고스란히 반영시킨 전쟁이자, 냉전을 고착화시킨 결정적 계기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은 핵무기라는 '절대 무기'를 보유한 두 슈퍼 파워의 대결이었다는 점에서 이전 전쟁과는 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소련의 핵 실험 성공으로 미국 핵 독점 시대가 막을 내린 시점에 터진 한국전쟁은 핵에 의한 승전의 유혹과 상호간의 절멸의 공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당시 핵 우위를 자신했던 미국이 원자폭탄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있었던 벤데트센(Karl R. Bendetsen)은 "개전 초기부터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이와 관련된 "암호명(code name)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핵을 사용하는 순간 도덕적 패배자가 되고 유엔군의 전열이 흐트러져 미국이 고립을 자초할 우려도 컸다.

2차 세계대전 종전 5년만에 터진 한국전쟁은 핵전쟁을 포함한 열전(熱戰), 즉 3차 세계대전에 가장 근접한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 개시 당시 미국은 약 300개의 핵폭탄과 이를 운반할 수 있는 260여기의 전폭기를 갖고 있었고, 유사시 소련에 집중적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전쟁 발발 10개월 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도 20개 정도의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 초기부터 북한은 물론이고 소련과 중국에도 핵 사용 계획을 검토했고, 중국군에게 패퇴를 거듭하자 공개적으로 핵 공격 위협을 가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유럽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다그쳐 한국전쟁을 질질 끌었고, 미국은 인기없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핵 공격의 유혹도 강하게 느꼈다. 미국의 군역사학자인 스펜서 터커가 "냉전시대의 첫 실전인 동시에 핵 시대의 첫 제한적 전쟁이었다"고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미국의 역사학자 가디스의 가상 에세이는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을 안고 있었던 한국전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50년 12월 2일, 맥아더는 트루먼의 위임에 따라 미 공군에게 한반도로 진군하는 중국군을 향해 5발의 핵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핵폭탄이 뿜어낸 섬광과 폭발은 중국군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약 15만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미군과 한국군 포로 상당수도 목숨을 잃었다. 나토 회원국들은 자신과 상의 없이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고, 6개월전 한국 방어를 위해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무효화하기 위한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미국의 비토권 행사로 거부되었다. 핵 보복에 나서달라는 중국의 압력에 따라 소련은 미국에게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든,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감수하든 48시간 안에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2월 4일, 48시간이 지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륙한 2기의 소련 전폭기는 부산과 인천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 두 곳은 유엔군 지원의 핵심 거점이었다. 맥아더는 소련의 핵공격이 자신이 행한 것보다 2배 이사의 사망자를 내자, 주일 미공군에게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의 선양 및 하얼빈에 핵폭탄을 투하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소식은 소련 공군기의 작전 범위에 있는 일본과 유럽 국가들의 격렬한 반미 시위를 야기했고,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은 나토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소련의 핵폭탄이 떨어진 뒤였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국의 정책결정자들과 군 수뇌부는 핵무기에 대해 세 가지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첫째는 미국은 소련보다 확고한 핵 우위에 있었고 이러한 미국의 힘은 공산권을 봉쇄하는데 대단히 유용하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압도적인 핵 우위가 전쟁 관리 수단으로 매우 유용했으며, 셋째는 "자제력과 결단력이 결합된 핵 외교"는 1948-49년 베를린 봉쇄 위기 당시에 입증되어 미래의 위기에도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생각은 한국전쟁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됐다. 한국전쟁 개입이 유럽 방어 전선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신속한 개입을 선택한 데에는 압도적인 핵 우위가 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이 컸다. 또한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강행한 배경에도 중국에 대한 핵 억제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정전협정을 마무리하는데 핵무기는 유용한 강압 외교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핵무기의 매력에 심취했었던 미국은 북한이 재래식 군사력을 앞세워 전면 남침을 강행한 것에 크게 당황했다. 38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진격하다가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물밀 듯이 내려온 중국군 앞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국공내전을 통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물리력이 아니라 정신력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마오쩌둥은 참전을 선택했고, 이러한 중국의 정책결정 배경에는 동맹국인 소련이 중국의 피폭시 핵으로 보복할 것이라는 또 다른 믿음이 있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핵 우위도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핵무기와 전폭기 수를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미국 본토가 소련의 핵공격에 취약하다고 인정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53년 1월 소련의 핵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핵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소련의 핵 보복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전쟁과 그 이후 대만해협 위기에서 미국의 핵 위협에 노출된 중국이 핵개발에 착수한 것 역시 미국의 핵 위협이 초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미국은 또한 핵무기를 공산군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당시 육군부 장관이었던 페이스(Frank Pace Jr.)는 트루먼이 1950년 11월 말 기자회견을 통해 원했던 것은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뒤이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국의 핵 위협이 전쟁을 끝낸 힘이었다고 자화자찬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길어올린 그릇된 교훈은 이후 미국 핵전략의 골자를 형성하게 된다. 공산군의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공격에도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대량 보복' 전략을 채택해 동북아와 유럽에 핵무기를 대거 배치했다. 한국전쟁을 핵 공격 위협으로 끝냈다는 환상은 냉전 시대 미국의 또 하나의 치욕적인 전쟁으로 기록된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군사적 갈등 때마다 재연된다.

<주요 참고문헌>

John Lewis Gaddis, The Cold War: A New History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05).
스벤 린드크비스트(Sven Lindqvist) 지음·김남섭 옮김, 『폭격의 역사』(한겨레신문사, 2003)
Roger Dingman, "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Rosemary Foot, Nuclear Coercion and the Ending of the Korean Conflict. International Security, Winter 1988-1989.
Matthew Jones, After Hiroshima: The United States, Race and Nuclear Weapons in Asia, 1945-1965,(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스펜서 터커, "6.15 전쟁, 1950-1953, 교전에서 교착 상태까지," 6.25 전쟁 60주년 국제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2010년 6월 23일.
트루먼 도서관: http://www.trumanlibrary.org/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