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그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시도는 정치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 생물학, 역사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에서 시도되었고 많은 이론이 나와 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위의 궁금증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은 아직 나와 있지 않다. 전쟁이라는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국제정치학에서는 오히려 전쟁을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행위로 다루면서 개인의 무한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남을 죽이는 모순된 행위에 대한 궁금증을 뒤로 감추고 있다.
그런데 학문적으로 권위적인 답이 무엇인지 모른다하더라도 우리가 여기서 상식적으로 아는 사실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남'을 위해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남을 위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목숨을 바칠 때는 남이 아니라 우리 안의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한다. 만일 남을 위해 죽는다면 어쩔 수 없이 끌려가서 죽는 개죽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우리'라는 대상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질까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에 대한 답 역시 무수히 많은 이론이 나와 있지만 필자는 소위 구성주의라는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학문적 업적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저술한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는 책이다. 이를 짧게 요약한다면,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닌 익명의 누군가를 '우리'라는 공동체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상상'이 있기 때문이며 이 상상의 주요 수단은 자본주의 경제와 함께 도입된 대중적인 인쇄 매체였다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신문과 잡지라는 인쇄매체에 의해 상상된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같은 표준어로 된 신문과 잡지를 보며, 같은 담론과 뉴스를 소비하는 한 국가 내의 사람들이 민족이라고 상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경상도의 철수와 전라도의 영희가 '우리'의 범주에 들어오며, 인디오와 유럽인의 후손, 그리고 그들의 혼혈이 모두 볼리비아인이 된다. 앤더슨에 의하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인 것이다. (물론 실제 책 내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신문, 책, 방송과 같은 대중언론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한국 신문이나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전해지는 뉴스를 소비하면서 어떤 것이 '우리'의 뉴스인지를 알게 되고, 그러한 '우리의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우리'라는 대상으로 은연중에 포함시키거나 '우리'의 친구라는 보다 넓은 의미의 '우리'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2월 둘째 주를 장식한 뉴스 중 두 개의 뉴스가 특히 눈에 띈다. 하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야당과 시민단체에 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에서 장병들에게 '나는 꼼수다'를 금지시켰다는 뉴스이다. 이 두 개의 뉴스가 상상된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제 그것을 설명해 보자.
▲ 8일 오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한미 FTA 발효절차 중단 촉구 대회 및 미국 오바마 대통령.상하원의장 서한발송 기자회견'에 참가한 민주통합당 이종걸 의원과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 민주통합당 정범구 의원이 서한을 미대사관에 전달하기 위해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한미 FTA와 북한, 그리고 '우리'
한국을 대표하는 신문을 몇 개 골라서 하루 동안에 보도되는 기사의 종류를 한 번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소위 보수지라는 신문들을 보면 신문의 곳곳에서 미국과 관련된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의 한 지방 고등학교의 학교정책에서 시작해서 미국대학의 학점 이수에 관한 기사, 미국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교포의 이야기와 미식축구 수퍼보울에 관한 뉴스, 미국 뮤지컬에 관한 내용, 미국 연예인에 관한 내용 등 미국의 뉴스가 신문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특히 국제면의 뉴스는 미국 대선과 오바마 대통령, 미국의 대외전략 등이 주로 장식하고 있어 미국이 곧 국제라는 느낌마저 준다. 신문의 광고란에는 심지어 미국 영어 교과서 광고까지 등장하며 영어와 관련된 기사와 광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되어 버렸다. 좀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한국 기사 못지않게 미국 기사가 많이 보인다. 미국의 일이 이젠 생소한 외국의 뉴스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뉴스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반면 소위 진보적 신문을 보더라도 미국과 관련된 기사는 꽤 많이 등장한다. 물론 보수지에 비해 빈도는 적지만 여전히 미국 기사는 중요한 지면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진보적 신문의 미국 관련 내용은 많은 경우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있고, 미국이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반감을 갖는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무엇인가 이물질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미국은 중요한 국가이지만 불필요하게 남의 일에 간섭하는 '남'이다.
한편 두 종류의 신문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결여된 뉴스가 있다. 그건 바로 북한과 관련된 뉴스이다. 특히 북한의 일상적인 정치와 경제, 사회, 주민의 생활, 문화와 관련된 뉴스는 여간해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취재가 어려워서, 또 국가보안법의 대상이 되는 민감한 이슈여서 보도를 못할 수도 있으나 그만큼 북한과 북한 주민은 '우리'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다. 오히려 '남'으로 느껴진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관심도 없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을 '우리'로 느끼느냐 아니면 '남'으로 느끼느냐의 차이를 가져오고 북한사람들을 '우리'로 느끼는지 아니면 '남'으로 느끼는지의 차이를 가져온다. 묘한 것은 우리와 혈연적으로 별 상관이 없는 미국은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 반면, 피가 섞인 한 민족이라는 북한은 우리 속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보수 신문과 방송을 보는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미 미국은 같이 가야할 '우리'이고 북한은 타도의 대상인 '적', 즉 '남'인 것이다. 이러한 피아의 구별이 지속되다 보면 우리는 미국에 충성심을 갖게 되고 북한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의식을 갖게 된다. 미국에게는 반항하고 도전하면 안 되고 의리를 지키면서 영원히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반면 북한과 북한 주민은 정복하고 흡수해야 할 외국의 2등 국가, 2등 국민이 되는 것이다.
소위 친미와 반미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싸움은 이러한 상상된 '우리'와 '남'의 구별을 달리하는 보수와 진보 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미 FTA를 반대하면서 찬성론자를 매국노로 모는 정치적인 행위는 '우리'와 '남'을 구별하는 행위이다. 물론 한미 FTA가 미국에 유리한 조항을 꽤 담고 있고, 필자도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한미 FTA의 무리한 추진을 반대해 왔다.
하지만 무역은 승자와 패자가 있는 법이고 찬성론자도 의도적으로 나라를 매국하려고 찬성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미 FTA라는 사안을 놓고 한쪽은 애국하는 '우리'이고 다른 한 쪽은 매국하는 '적' 혹은 '남'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적용하게 되면 이는 국민 사이에서 과도하게 피아구분을 해서 적대적 감정을 갖게 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물론 한미 FTA 반대론자를 반미주의자로 구별해 마치 미국이 우리의 일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같은 국민을 적대세력으로 모는 것도 비난받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국민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서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는 배경에는 한미 FTA라는 단일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대중언론과 담론으로 형성된 '우리'와 '남'의 구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한-EU FTA와 달리 한미 FTA에 그렇게 격정적인 반대가 생기는 것이다. 미국이 '우리' 속에 무비판적으로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이 문제이다. 이는 곧 대한민국 주류 언론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한미동맹이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평시 군대의 사회적 역할과 나꼼수
이제 군대에서 '나꼼수'를 금지하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군대는 상식적으로 전쟁 시에 '적'과의 전투를 통해 '우리'를 지켜주는 조직이다. 그런데 군대의 역할은 전쟁 및 전투를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군대의 평시 역할 역시 전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평시에 군대는 전투준비 이외에 무엇을 할까?
평시 군대는 매우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군대가 평시에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적'과 '우리'를 구분해 그것을 장병들에게 학습시키고 사회화시키는 작업이다. 이는 사실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막상 전쟁이 났을 때 군인은 누구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할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인쇄자본주의가 '우리'와 '남'을 구분해 준다고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모두 군대를 가야하는 대한민국에서는 군대 역시 '우리'와 '남'을 구분해 주는 매우 중요한 기제이다. 군대에서는 '남', 즉 '적'을 규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가 형성되는데, 이러한 구분이 지속적으로 학습되고 사회화되면 '우리'는 더욱 확실히 형성된다.
군대가 적을 규정해 버리면 궁극적으로 그 적에 대해서 군대는 총부리를 겨눌 수 있게 된다. 과거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대의 행위를 보면 같은 국민에 대해서도 일단 적이라고 규정되면 군대가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위험하고 섬뜩한 일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군대가 나꼼수를 불온방송으로 규정하는 행위 역시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나꼼수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군대에게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군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책을 쓴 저자와 그 불온서적을 즐겨 읽고 소유한 독자는 '우리'가 아니라 '적'이다.
물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대의 '적' 규정 행위는 어쩔 수 없는 행위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이 즐겨듣고 수많은 사람이 즐겨 읽는 방송과 책을 반우파적이라고 해서 불온방송과 불온서적으로 지정함으로써 '우리'와 '적'을 구별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 군대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을 좌와 우로 억지로 구분해서 국민 안에서 다시 '우리'와 '남'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군대의 잘못된 사회적 역할은 자칫하면 수많은 목숨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나꼼수 금지 행위는 불필요하고 위험한 피아구분의 정치적 행위를 군대가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글은 싱크탱크 '미래智'가 매주 사회과학으로 한주의 뉴스를 분석하고 해설하는 동영상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텍스트 해제본입니다. 미래智 원장인 이근 서울대 교수가 대표 집필했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동영상은 미래지 홈페이지(www.miraege.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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