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미국과 중국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한반도 문제에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중국은 김정일 사망 직후 '김정은 동지'라고 호칭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북한의 김정은 체제를 인정했다. 미국도 북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수준을 조의를 표한 후에 김정은 체제를 '새 리더십'이라 부르는 실용적인 모습을 보였고, '김정은'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동안 3대 세습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정은 후계체제를 부정해왔던 국내 보수 여론을 머쓱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마치 중국과 미국이 쌍끌이가 되어서 김정일 체제를 연착륙 시키려 하는듯한 모습이다.
'김정일 사망시 매뉴얼' 정비했다는데…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사망 이후 신속하게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국론분열 방지, 국제 협력 등을 정부의 대응책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밝힌 국제 협력은 중요하지만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전화통화도 하지 못했다. 이 대통령이 통화를 시도했지만 며칠 동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중국이 정상간 통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중국 탓으로 돌린다. '중국을 통화 대상에 빼놓을 수 없어서 예의상 걸었다'라고도 했다.
'중국이 통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면 왜 통화를 시도했는가? 국가원수 사이에 긴급한 통화가 필요할 때 중국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았다는 말인가? 중국과 국가원수간 통화가 익숙하지 않은 관계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 가지는 외교안보적 함의는 무엇인가? 국가 긴급 상황에서 대통령과 다른 나라 국가원수 사이의 전화통화를 연결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도 예의상 시도하는 것이라고 답변하는 것은 위기관리에 대한 사전 사후 조치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중국은 우리와의 무역 규모가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을 합한 것보다도 . 더 큰 나라이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속사정을 가장 잘 아는 나라다. 게다가 중국은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의장 국가다. 그렇다면 무역과 북한과의 관계에서 언제든지 국가원수 사이의 통화가 필요한 긴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앞으로 매번 예의상 전화통화를 시도해보고 말 것인가?
중국은 북한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다. 그런데도 김정일 사망이라는 중대 사태 앞에서 중국 국가주석과 통화하지 못한 대중외교 누수 현상에 대해서 정부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는 "김정일 사망 이후에 대한 매뉴얼을 지난해 말 구체적으로 재정비했다"면서 "이번에 사망 사실이 알려진 뒤 매뉴얼을 그대로 따르면서 대응이 적절하게 되고 있다"고 자화자찬했다. 이 매뉴얼은 김 위원장의 사망을 인지한 시점부터 조치해야할 내용이 분 단위까지 세세하게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후 주석에게 예의상 통화를 시도한 것도 매뉴얼에 따른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장관회의 장면 ⓒ청와대 |
'무늬만' 한미 공조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에 대한 조의문을 미국과 사전 조율해 두 나라가 혼선 없이 조의문을 발표하게 된 것을 외교적 성과로 삼고 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한국과 미국이 공조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미국만 북한에 조의를 표하고 그 결과 한국 정부는 제네바에서 진행된 북미회담에서 기웃거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 합의의 결과인 북한에 경수로 2기 제공에 대한 40억 달러 가까운 비용을 떠밀려서 우리가 지불하게 되었다. 그 전례와 비교해본다면 이번에는 한미 사이에 조의 표명의 수준과 문구까지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
조의 표명의 문구는 비슷했지만 한국과 미국의 대처 방식은 다르다. 미국은 김정일 사망 바로 하루 전날까지 북한과 접촉하고 있었다. 12월 16일 미국의 로버트 킹 대북인권특사는 베이징에서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주국장과 만나서 식량 지원을 협의했다.
미국 정부는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부터 북한과 대화를 모색하고 그 출발을 식량지원 재개로 삼았다. 3월 1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인 존 케리 의원은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한 의회 청문회를 개최하면서 지원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2010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오바마의 정책에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예산권을 쥐고 있는 하원의 외교위원장으로 새로 취임한 일리나 로스 레티나 의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모니터링 문제와 2008년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 놔두고 온 식량을 북한이 전용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식량 지원을 반대했다.
하원의 반대에 직면한 오바마 정부는 그 후 지속적으로 북한과 물밑 접촉을 해온 끝에 12월 16일 대북 '영양 지원'을 하고 북한은 농축우라늄 활동 중지 방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영양 지원이란 식량 지원이 아닌 비스켓과 비타민 등을 말한다. 그리고 김정일 사망 발표 다음날 미국은 뉴욕에서 다시 북한과 접촉하여 김정일 사망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해간다는 징검다리는 만들었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서로 협의해서 김정일에 대한 직접 조의를 표명하지 않고 북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조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처해 있는 현실은 달랐다. 미국 정부의 조의 표명은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지만, 한국 정부의 조의 표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은 미지수다. 한국 정부는 한미 양국이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보지 못했다. 조의 표명 문구 조절만 하면 한미간의 조율이 잘 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진짜 '휴민트'는 이것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과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대화를 요구해왔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조의 표명은 남북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조문 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조문단으로 방북하는 사안을 가지고 판문점 연락관 접촉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도 조문 국면은 안개에 쌓여 있는 김정은 체제의 내막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외 여론은 북한의 불확실성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 정부가 조문단을 파견하기 여려운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각계에서 모처럼 합의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를 중심으로 조문단을 꾸리는 것도 반대한 것은 정부 스스로 조문 외교의 창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진보·보수의 사회 인사들로 민화협 조문단을 구성하고 거기에 정부여당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참여한다면 조문 외교를 통해서 북한과 대화의 명분을 만들 수 있다. 정부 차원의 조문단 파견이 가지는 부담도 피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정부 스스로 조문단을 특정해서 공개 발표한 것은 운신의 폭을 제약시키는 것이다.
이런 많은 사례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정부가 조의를 표하는 등 과거와 다른 정책을 펼치면서도 남북관계 개선의 추진력을 얻어가기에는 2%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부 스스로 자충수를 두기도 한다. 김정일 위원장을 태운 열차가 평양역을 출발하지 않았다는 원세훈 국정원장의 발언이 대표적인 자충수이다. 김 위원장 사망을 인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을 물타기 하기 위한 것으로 비친다. 이런 물타기 시도는 결국 김 위원장의 사망에 대한 온갖 음모론을 국가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부추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가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제때에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다는 것은 북한 체제의 폐쇄성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북한의 동향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남북대화를 차단한 정부 정책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금강산 관광객을 제외하더라도 매년 수천 명씩 북한을 방문했다. 2006년에는 한해 동안 10만 명이 다녀오기도 했다. 북한 방문객들의 방문 목적이나 관심사는 각양각색이다. 이들은 북한의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북한 곳곳을 관찰한다. 그리고 방북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하고 각종 국내 언론매체를 통해서 방북기를 소개하기도 한다. 남북 교류는 북한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모니터 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대북정보 획득의 통로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대북한 정보력이 약화되었다고 비판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지금 정부는 조문 국면을 대북정책 전환의 기회로 삼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김정일 조문 국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인 대중국 외교에서 초기 협조에 실패했고, 미국과 공조도 무늬에 그치고 있으며, 조의 표명에서도 2% 부족함을 보인 것에 대한 근원적인 점검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 정부와 차별화'라는 국내정치적 시각에서만 대북정책에 접근하려는 편협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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