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류관을 쓰고 내려오고 싶었는데 스타일 완전 구겼다(웃음). 내 인생이 원래 코미디다(웃음). 나이 들어서 석사논문을 처음 써보는 거라 의욕은 넘쳤으나 실수가 있었다.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에 평판연구에서는 익히 알려진 학설이라, 외국학자의 번역을 인용하면서 옮겨 적은 한국학자 이름을 몇 군데 빼먹은 부분이 있다. 외국학자의 이론을 일부 재인용한 부분에서 그 이론을 인용한 한국학자의 이름을 함께 표기했어야 하지만 글귀를 일부 옮김으로서 연구자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한 점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소한 실수다. 이런 시시비비를 빨리 가려주길 학교에 요청한 상태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내가 부주의한 것은 부주의한 거다. 당분간 농사지으라고 시간이 주어졌나 싶다."
따뜻한 뉴스를 하고 싶다는 마음과 시사코미디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작한 시사프로가 그를 '코미디언 김미화'가 아닌 '소셜테이너 김미화', '전사 김미화'로 대중에게 더 각인시켰다. 그 일을 겪으며 멀미가 나진 않았는지, 시사프로 진행을 맡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는지 궁금했다.
"후회는 없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재미있었고 내 인생을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약한 것에는 약하고 강한 것에는 강하게 부딪치는 기질이 있나 보다. 사회 통념상 이게 '상식'이고 '정의'라는 생각이 들면 그 길을 걸어갔다. 참았어야 했는데, 어느 부분에 대해서 비상식적으로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다. 이런 일을 겪을수록 '나처럼 알려진 사람도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알려지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고통을 당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도 잘못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조심을 한다. 그래서 강하게 문제제기를 한 건데 거꾸로 내가 계속 고통 받고 있다. 우리 사회 참, 이상하다."
희극 배우는 본인이 울고 싶을 때도 상대방을 늘 웃겨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다. 본인이 울고 싶은 상황과, 웃겨야 하는 상황 사이에서 고통 받은 적은 없는지 궁금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다. 행복했던 기억이 한 개도 없다. 정말 뜨거운 돌 황무지 땡볕에 우산도 그늘도 없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에서 탈피하기 위해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에 미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말 코미디에만 몰입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나름의 성공의 열쇠였다. 웃기지만 슬프다(웃음). 희극이나 비극을 쓰는 작가들을 보면 자기 내면의 깊은 곳의 슬픔을 끌어올리는 우물이 있는 것 같다. 그때 일기를 보면 '내가 정말 극한의 슬픔 속에 살았구나' 싶어 나도 놀란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불행했던 첫 번째 결혼, 시사프로를 한 이후 겪었던,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그리고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표절 시비까지…. 밝은 얼굴과 달리 그가 살아온 삶은 참 울퉁불퉁하다. 나라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니, 딱히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문득 그의 이 말이 생각났다.
"항상 큰일이 닥쳤을 때 생각이 더 맑아진다. 오히려 작은 것에 흔들린다(웃음). '저 떡을 내가 먹고 싶은데? 과자가 세 개가 남았는데 나는 두 개 먹고 싶은데…' 하는 것들 말이다.(웃음)"
그래, 오히려 작은 것에 흔들리는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울퉁불퉁한 고갯길을 웃으며 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대체로 비극, 가끔 희극. 그래서 '방긋' 혹은 '방긋해지기로'…. 조만간 순악질 여사가 농사짓는 동네에 가서 몸빼바지 입고 흙 한번 만져보고 싶다.
▲ 시사 프로그램 진행, 벌써 10년…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웃기고 자빠진' 코미디언 김미화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표절 시비는 어떻게 난 것인가?
나이 들어서 석사논문을 처음 써보는 거라 의욕은 넘쳤으나 실수가 있었다. 교수인 남편한테 한 번만 확인을 받았어도 됐을 텐데, 서로 바쁘다 보니 그러지 못했다. 남편도 '어련히 잘 하겠거니' 하고 나도 '내가 열심히 한 거니 만족스럽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표절논란이 생겼다.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에 평판연구에서는 익히 알려진 학설이라, 외국학자의 번역을 인용하면서 옮겨 적은 한국학자 이름을 몇 군데 빼먹은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는데 '악법도 법이다' 하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는 사실은 다 아는 것 아닌가. 이 부분이 내 실수라는 것인데…. 논문에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은 외국학자의 이론을 옮길 때 처음 옮긴 사람의 이름을 안 적었으니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빨간 줄로 박스 표시까지 해놓고 '표절이다!'라고 하니까, 정말 무시무시해 보이더라(웃음). 외국학자의 이론을 일부 재인용한 부분에서 그 이론을 인용한 한국학자의 이름을 함께 표기했어야 하지만, 글귀를 일부 옮김으로써 연구자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한 점 인정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소한 실수다. 이런 시시비비를 빨리 가려주길 학교에 요청한 상태다. 에잇! 어떻게 코미디 좀 더 잘 해보고 싶은 마음에 공부한 건데, 논문을 쓰지 말 걸 그랬나?(웃음).
지난 3월에 만났을 때만 해도 "이제 시사프로를 진행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조만간 그만두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후 논문 표절 의혹이 일면서, 본의 아니게 진행하던 시사프로그램에서 중도 하차를 하게 되었다. 원래는 붉은 카펫 위에서 면류관을 쓰면서 내려오려고 했는데, 어떻게 '꽝' 미끄러진 모양이 되어버렸다.
면류관을 쓰고 내려오고 싶었는데 스타일 완전 구겼다(웃음). 내 인생이 원래 코미디다(웃음). 그런데 이것조차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또한 삶의 한 과정이니까. 그때 사람들 반응보고 이 와중에 나 혼자 웃었는데, 어떤 사람이 '쿨'하게 표절했다 선언하니까 일부에서 오히려 칭찬하더라. 그거 보고 나도 선언하고 싶었었다(웃음). 그런데 안 했는데, 어떻게 했다고 선언을 하냐고!(웃음) 어쨌든 내가 부주의한 것은 부주의한 거다. 이것도 벌어질 일이니까 벌어졌나 보다. 당분간 농사지으라고 시간이 주어졌나 싶다.
그렇다면 논문 표절과 관련해 학교 결정이 난 후, 프로그램에서 중도하차 하지 왜 먼저 내려왔나?
'끝에 가서 모양 빠지게 내려오는 것이 참 안됐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정해놓은 기한에 맞춰 사는 거다. 내 인생은 내가 주도하면서 사는 것이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질문한 것처럼 방송국 사람들이 "아니, 아직 결정이 내려진 것도 아닌데 왜 먼저 그만두느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 관둬도 되는 것 아니냐"라면서 많이 만류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지금이 딱 10년인데, 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끌려가게 되는 거다. 그렇게 되기는 싫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하다가 관두게 되면 '아,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그만뒀다고 해서 세상이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겐 '맡은 자리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했느냐'가 중요하다. 시사프로그램을 10년 동안 진행한 경험은 소중한 것이고,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미디언이 꾸준히 시사프로그램을 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나였다는 것에 감사하고, 스스로는 아주 만족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 대한 오해가 쌓여갔고, 내가 의도하는 바와 달리 상황이 흘러가더니 '좌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앞으로 다시는 코미디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누워 있으면 몸을 뒤집을 수도 없을 정도의 깊은 좌절에 빠졌었다"고 말한 것을 보았다. 활발한 사회참여와 시사프로 진행 등이 6살 때부터 꿈꿨던 코미디언의 길을 막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사회 참여와 시사프로 등 모두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나?
원래 시사 프로그램을 맡은 것도 '나중에 시사코미디를 하는데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음에 시작하면서 "10년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뚜벅뚜벅 온 건데, 원하지 않던 시비가 벌어지니 계속해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걷기로 정해놓은 길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못 걸어간다? 그건 아니다. 나는 그냥 처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는 거다.
ⓒ프레시안(최형락) |
실제로 만나보니 코미디프로에 나온 모습과 달리, 여린데도 단단한 느낌이다.
이혼하면서 나 스스로가 많이 단단해졌다. 이혼 전에는 내 인기를 지키고 싶었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눈치를 봤다면, 그 이후의 김미화는 다시 태어났다.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서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직도 그렇게 살았다면 나는 평생을 매우 불행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도 행복해하고, 나도 행복하고, 남편까지 가족 모두가 행복하다. 물론 이혼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 좋은 경험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게 좋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은 '코미디언 김미화'가 아닌 '소셜테이너 김미화'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것이 혹시 부담스럽진 않나? 그리고 시사프로를 진행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나?
라디오에서 고정 시사프로를 맡으면서 타 활동을 못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돌이켜보면 정말로 재미있었고, 내 인생을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돈보다는 성취감을 따라 생활했다. 특히 용기를 내서 시사프로그램을 맡은 것은 앞에 말했듯이 이후 시사코미디를 할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사실 김형곤 선배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정말 아쉽고 애석하다. 그 어렵고 엄혹한 시기에 '김형곤'이라는 천재가 있어서 '회장님, 회장님' 같은 시사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함께 손발을 맞춰가며 새로운 것들을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참 안타깝다.
그런 마음으로 시사프로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노무현 정권 말기 때 인터넷 기자협회에서 '대통령과의 대화' 사회를 봐달라고 했다. 퇴임 1년을 남겨놓은 레임덕 중에 레임덕 시기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사회를 맡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내가 1983년도에 코미디언이 되었으니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등 정권을 두루 거쳤는데, 1986년 이후부터 여야를 막론하고 청와대 공식행사 사회를 많이 봤다. 물론 프로니까 보수를 받으면서 말이다(웃음).
그런데 여타 정부에서 요청했던 '코미디언 김미화'로서 분위기를 재미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번엔 '시사프로 진행자 김미화'로 와달라는 요청이었다. 인터넷 신문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궁금했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사항들을 질문하는 자리였는데, 아마도 김미화가 진행을 하면 시사에 대한 질문도 부드럽고 편하게 진행하겠다 싶어 나를 사회자로 선택했던 것 같다. 평소에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편안하게 질문했던 것을 높이 샀던 것 같다. 사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손석희 씨가 아닌데요"라고 할 정도로 전화가 잘 못 온줄 알았다(웃음). 시사프로 진행자로서의 나를 인정해준 것 같아 기쁘기도 했고, 대통령을 모시고 사회 전반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 경험이 이후 '시사코미디를 하는데 좋은 경험이 될 거다'라는 판단에 사회를 보겠다 했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친노좌파 연예인으로 매도되고, 여러 정치적 판단에 의해 곤란을 겪게 되는 계기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러니 인생이 재미있다는 거지(웃음).
이야기한 것처럼 따뜻한 뉴스를 하고 싶다는 마음에 시사프로를 시작했는데, 이후 여러 정치적 이유들 때문에 뜻하지 않게 '전사'가 되어버렸다. 그런 일들을 거치며, 멀미가 나지는 않았나.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약한 것에는 약하고 강한 것에는 강하게 부딪치는 기질이 있나 보다. 사회 통념상, 이게 상식이고 정의라는 생각이 들면 그 길을 걸었다. 참았어야 했는데, 어느 부분에 대해서 비상식적으로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다. 나를 향해 '친노좌파'라는 표현을 쓰는 인터넷 매체에 법적으로 강하게 문제제기를 했었다. 주위에서는 '대중 연예인이 구설에 오르면 좋지 않으니 따지지 말고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무시하라'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때 그 말을 들을 걸 그랬나?(웃음). 아주 그냥 지긋지긋한 무좀보다 더 오래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잘못 된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작은 인터넷 매체지만 아닌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쓰고 퍼트리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다.
말했듯이 그냥 '그래 저자들은 저렇게 먹고 사는 자들이야' 하고 넘어갔다면, 내가 '전사'가 될 이유도 없고 이런 이미지로 비칠 이유도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너도나도 다 좋은 게 좋은 거면, 무엇도 바로 잡히지 않는다. 이런 일을 겪을수록 '나처럼 알려진 사람도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알려지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도 잘못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조심한다. 그래서 강하게 문제제기를 한 건데, 거꾸로 내가 계속 고통 받고 있다. 우리 사회, 참 이상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소송에 있어서 베테랑이 됐겠다(웃음).
서울 중앙 법원 길을 다 외울 정도다. 어느 길로 가야 지름길인지도 안다(웃음).
이제 정치적인 이야기보다 '코미디언 김미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얼마 전 KBS2 <개그콘서트>(이하 개콘) 공사창립 40주년 특집 '코미디는 흐른다'에서 '쓰리랑 부부'를 재연했다. KBS 코미디 40년 역사에서 30년을 함께했고, 함께하는 동안 직접 본인이 기획하고 이끌었던 <개콘>의 KBS 창사 40주년 특집에 섰을 때 기분이 무척 새로웠을 것 같다. 특히, 무대에 선 지 오랜만이라 더 그랬을 것 같은데 어땠나?
그냥 덤덤했다. 특집방송 덕분에 옛날에 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후배들이 속 썩였던 이야기, 속상해서 한강 변에 가서 맥주 마셨던 이야기 등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프로그램이 잘 성장해서 좋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15년 전에는 서수민 씨가 AD(조연출)이었는데, 지금은 CP(책임프로듀서)가 됐다. 막내 PD가 대장 PD가 된 것이다. 후배들과 함께하니 기분이 좋았다. 내 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KBS 홍보실에서 기자간담회도 준비해 줘서 많은 기자들 앞에 코미디언으로 다시 설 수 있었고, 그러면서 한 3년 정도 소원했던 KBS와의 관계도 많이 해소가 되었다.
<개그콘서트>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관객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연기를 하면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후배들이 냉정한 관객에 의해서 관객이 진짜 웃는 포인트를 익혔으면 했다. 그리고 일단 무대를 하나 만들어 놓으면, 후배들이 그 위에서 빛을 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개콘>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안에서 후배들이 감각적으로 많이 성장했더라(웃음).
'후배들의 감각을 키워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었고, 용기도 필요했다. 사실 '새끼 호랑이들 키워서 내가 종이 호랑이 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선배가 되면, 어느 정도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내주고 하는 흐름은 어느 계층에서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밥줄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주저하긴 했다(웃음). 당장 행사 사회를 봐도 내가 하던 것을 내가 키운 후배가 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 KBS에 <개콘> 기획서를 들고 찾아갔고, 방송국에서도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개콘을 시작하고 3년 정도 지나서 후배들에게 밀려났다(웃음). 그렇지만 이것을 계기로 방송가의 PD들이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다른 방송사에서도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개콘>은 비용 대비 효율이 굉장히 높았다. 완전히 신인들로 무대를 채웠고, 세트도 필요 없이 조명만 가지고 진행하는 형태였다. 또 코미디는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예전에는 세트를 지었다 부쉈다가 하느라 관객들이 집중을 못했다. <개콘>은 완전히 연극 식으로 만들어서 관객의 기분이 흐트러지지 않게, 몰입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관객을 배려해서 라이브로 연주했다. 이런 기획들이 방송가에 소문이 면서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도 들어오고, MBC는 놀랍게도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나를 뽑았다. 그러고 보니, <개콘>에서 밀린 일이 손해는 아닌 것 같다(웃음).
<개그콘서트> 기획안을 들이 내미는 순간 '내가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했음에도 추진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다. 걱정도 많이 되었을 텐데….
그런 걱정은 20% 정도였고, 나머지 80%는 '나도 후배들 덕을 본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장난으로 "아줌마 알아요?"라고 물으면 "네, 알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그래, 네 덕에 아줌마 10년은 더 활동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이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은 내가 젊은 친구들이랑 함께 호흡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초창기 <개콘>은 그 안에서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내가 후배들을 많이 괴롭혔다. 그래서 나를 싫어했을지도 모른다(웃음). 기존의 코미디를 아예 배제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광고나 영화의 한 장면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패러디도 많이 했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난타 공연도 같이 보러 가고, 돌아와서 몇 시간씩 두들겨 보기도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은 '아, 내가 나이가 들어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후배들과 함께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래서 전체적으로 발전하는구나. 후배 코미디언들이 가수 이상으로 사랑받게 되면, 더불어 내 수명도 연장될 수 있겠다라'는 나의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웃음).
당시 코미디는 한물갔다고 여겨, PD들도 코미디를 맡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코미디가 모든 대중 예술 장르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뛰어난 장르를 왜 사람들이 '저질'이라고 하지? 이건 아닌데…. 뭔가 똑같은 거라도 모양이 다른 그릇으로 담으면 새로워 보이는 건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로에게 사랑받지 못한 이 불모지에 새롭게 키운 새싹들을 투여했다. 드라마에서는 나이 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이 든 역할을 하지, 우리처럼 스물 살짜리가 주름을 그리고 할머니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코미디에도 계속해서 새 피를 수혈하면, 드라마처럼 장년·중년·청년… 이렇게 탄탄한 3층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의욕적으로 <개콘> 기획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PD에게 의견을 낸 것이 당시 <젊음의 행진>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대학생 위주로 '짝꿍'을 뽑았었는데, 춤추는 사람들을 짝꿍1기, 2기, 3기, 4기 이런 식으로 졸업을 시켰다. 그런 개념을 <개콘>에도 넣자고 했다. 그래서 먼저, 연기는 정말 잘하는데 빛을 못 보는 신인 예닐곱 명을 뽑았다. 심현섭은 SBS에서 오랫동안 객석 바람을 잡던 친구였고, 김준호는 심현섭 친구라서 데려왔다(웃음). 김지혜, 김대희, 김영철 같은 친구들은 그때 KBS에서 뽑힌 지 3개월 된 신인들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그런데 한 가지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방송도 철저한 상업주의와 자본주의를 따른다는 것이다. <개콘>이 너무 잘되다 보니, 탄탄한 3층집, 새로운 피의 수혈은커녕 그 프로그램에서 후배들을 다른 프로그램으로 내보내지 않았고, 그러면서 오히려 나머지 프로그램들이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개콘>이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低)비용으로 굉장한 고(高)효율을 낼 수 있구나.' '제작비 많이 드는 기존 코미디는 폐지.' 이렇게 된 것이다.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그 점이 무척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난 근현대를 지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살기에는 어려운 나라였고, 지금도 여전히 웃으며 살기에 힘든 상황이다. 코미디언으로 한국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나?
1986년도부터 1993년까지 '쓰리랑 부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쓰리랑부부' 인기 덕으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 80년대는 정말 여성들이 굉장히 힘들었고, 여성들의 노동 가치나 역할에 대해서 사회적으로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상징적인 메시지들을 주기 위해 강한 일자눈썹을 그리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왔다. 심지어 남자들에게 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여성들이 약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 기운도 받았으면 했다. 남자들도 '여자가 저렇게 까부네!' 하고 재밌어했다. 내가 코미디를 시작한 1983년도는 사회가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때 나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겐 그야말로 등 따뜻하고 배불렀던 시기였던 것이다. 김형곤 선배처럼 '코미디에 시사적인 것을 넣어서 무엇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은 못 했었다. 그리고 한참 뒤인 1997년 IMF 시절에도 힘든 상황에 있던 분들에게 더 가까이에서 따뜻한 위로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땐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지 잘 몰랐다.
그런데도 다행히 내게는 코미디언으로 성공하면 반드시 어려운 분들 곁에 가서 봉사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어린 시절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했는데, 그 마을이 나를 키웠다고 할 수 있다. 골목을 지나 마당 넓은 공터에 평상이 있었고, 동네 어른들이 광주리에 생선이나 과일을 담아 팔러 나갔다 돌아오면, 거기서 공동으로 쉬곤 했다. 그러면 어른들이 심심하니까 어린 나한테 "미화, 노래나 한번 해봐라"라고 해서 노래를 하면, 어른들이 1원도 주고 5원도 주고 팔다 남은 자두도 주었다. 당시 아버지가 폐병에 걸려 누워 계셨는데, 자꾸 입이 마르니까 숟가락으로 옆에 앉아 물을 떠 먹여 드려야 했다. 그래서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가제 수건에 물을 묻혀서 아버지 입에 대놓고 나가 놀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JQ, 잔머리 지수'가 높았다(웃음). 엄마는 보따리 장사를 나가 일주일을 안 들어오지, 내가 여덟 살 때 어린 동생이 태어나서 애기 기저귀 갈아야 하지. 이런 것들이 너무 싫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날 돌보지 못했던 그 시기에 마을 사람들이 1원, 5원 주는 것으로 눈깔사탕도 사 먹고 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받았던 사랑이었고, 이다음에 코미디언이 돼서 돈 많이 벌면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80군데가 넘는 NGO 단체들 홍보대사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과 함께 같이 웃고, 걸레질도 하고, 손잡고 마주 보면서 위로하고 위로받는 게 참 좋아서이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살다 보면, 사회에 반항적이 되기 쉬운데 참 밝고 건강하게 자랐다.
참, 가난했다. 집세를 못 내서 살던 문간방에서 쫓겨나 길바닥에서 잔적도 있었다. 장롱으로 사방을 막고 장판 뜯어온 것을 깔고 자는데 너무 행복했다(웃음). 하늘을 봤는데 별이 보이고 달도 보였다. 너무 아름다웠다. 마치 캠핑 온 것 같았다(웃음). 그렇게 우리 집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때까지 기초생활수급대상자였는데, 밥이 없어 못 먹을 때 구청에서 라면도 주고 밀가루도 줬다. 지금처럼 봉지에 나오는 라면도 아니고 비닐 한 봉지에 열댓 개의 라면이 한꺼번에 들어 있었는데, 그 라면 한 상자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는 길이 행복했다. 그때 구청에서 나눠준 것과 같은 '공적 부조'가 없었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다. 참, 감사하다.
나는 부끄러운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문을 내는 성격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소풍을 앞두고 담임선생님에게 "선생님, 우리 집이 가난해서 김밥을 못 싸서 소풍을 못 가요"라고 했더니, "아니, 오락부장인 네가 안 가면 우리 소풍 다 망친다"라고 하시면서 직접 김밥을 싸 주셨다(웃음). 이런 잔머리를 썼다(웃음). 고등학교 때는 우리 엄마를 장한 어머니라고 글을 써서 엄마가 '장한 어머니'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웃음). 당시 엄마가 국밥집을 했는데 담임선생님 손을 끌고 조그만 국밥집에 모시고 가서 "선생님, 우리 엄마가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저희를 기르셨어요"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웃음).
한편으로는 엄마가 나를 거의 놓아기른 것도 내가 성공한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어디에 가서 놀던 관심을 안 뒀다. 완전 신여성이었다(웃음).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도 안 됐다. 두세 평 되는 국밥집이라, 손님들이 방에서도 밥을 드시거나 술을 드시면 거기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바깥으로 쫓겨나곤 했다. 그러면 동생과 골목에 나와 동생은 관객이 되고 나는 가수가 되어 동생 앞에서 쇼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들어갔다. 삐라를 주우러 다니면서, 남의 자두밭에 가서 자두를 따면서, 쑥을 캐러 다니면서 '이렇게 웃겨볼까? 이렇게 노래해볼까?'를 생각하며, 계속해서 상상력을 키웠다. 옆집 쌀가게 텔레비전을 통해 코미디를 보면서 '내가 만약 코미디언 되면 저런 것을 이렇게 해봐야겠다'라고 혼자서 생각했다. 날 놓아기른 엄마가 고맙다(웃음).
배우란 직업이 원래 그렇지만, 희극 배우는 본인이 울고 싶을 때도 상대방을 늘 웃겨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다. 본인이 울고 싶은 상황과, 웃겨야 하는 상황 사이에서 고통 받은 적은 없나? 그런 일들을 경험할 때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나?
전 남편과 19년을 살고 이혼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정적으로는 불행했다. 행복했던 기억이 한 개도 없다. 지금은 오히려 너무나 행복하다. 당시에는 욕심이 많았다. 이혼했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두려웠고, '내가 쌓은 인기가 다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 등 여러 마음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돈으로 때울 수 있는 부분은 때워 버리자'라며 감내하고 살았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뜨거운 돌 황무지 땡볕에 우산도 그늘도 없이 홀로 외로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어깨에는 너무 무거운 짐들이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에서 탈피하기 위해는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에 미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말 코미디에만 몰입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나름의 성공의 열쇠였다. 웃기지만 슬프다(웃음). 희극이나 비극을 쓰는 작가들을 보면 자기 내면의 깊은 곳의 슬픔을 끌어올리는 우물이 있는 것 같다. 그때 일기를 보면 '내가 정말 극한의 슬픔 속에 살았구나' 싶어 나도 놀란다.
왜 그렇게 슬펐나?
아이를 정말 좋아하는데 내 아이를 내가 직접 키울 수 없었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키워주고 주말에만 잠깐, 반짝하고 봤다. 정말 탯줄을 딱 끊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이 친정집에 갔다.
아이 탯줄을 떼어내자마자 부모님께 보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나?
남편이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집 안에서 큰소리 나는 게 싫어서 남편 말을 들어줬는데, 어느 순간 '다 부질없다. 내가 인기에 목을 매고 바보같이 살았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금보다 옥보다 귀했던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어느 순간 초등학교 3·4학년이 돼버린 아이들을 보았다. 참, 아팠다. 물론 아이들은 친정엄마가 잘 키워주셨고, 내가 돌보지 못한 부분도 보완을 해주셨지만….(울음) 내가 캥거루라면 배 주머니에 내 아이들을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로, 나는 아이들을 내가 키우고 싶었다. 코미디언으로서의 성공은 내가 가졌던 슬픔의 반대급부였다. 슬픔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개그에 몰입할 수 있었고, '쓰리랑 부부'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고 <개콘>도 탄생하게 된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게 해준 좌우명이 있다면? 용기를 주는 말이 있나?
인생을 그다지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어려움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거기에 너무 몰입을 해서 '왜 이렇게 됐을까?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했다면 벌써 여러 번 좌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괜찮더라. 매번 좋은 일만 있으면 뭐가 재미있나? 바나나를 먹고 싶은데, 바나나 한 트럭을 갖다 줘 봐라. 질리지(웃음).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받아들일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8년째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서 농민들이 친환경적으로 가꾼 농산물 직거래 장터도 열 수 있고, 시낭송회나 유명한 분들의 강의 같은 것도 꾸준히 열리는 문화행사 같은, 일종의 '농촌 생협'인 '순악질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던데…. 현재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되었나?
내가 사는 동네는 시골이 온전히 살아 있는 동네다. 거기에 정미소도 있고 방앗간도 있다. 서울 강남에서 한 시간 거리인데 용인시에서도 자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동네의 80%가 농사를 짓는데 주민들이 욕심 없이 착해서 농사의 달인인 농부들과 뭔가를 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고, 집 바로 옆이니 우리 부부가 함께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논밭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북적북적 뚱땅거리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 시작하게 되었다. 농사짓는 걸 보면 농사가 힘들뿐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인데, 고생한 만큼 대가가 적다는 게 안타깝다. 내 바람으로는 소비자 가격이 아니라, '농민 가(價)'를 받게 해주고 싶다. 나는 이 농산물을 길러 내는데 이만큼의 비용이 들었고, 그래서 이것을 생산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가격은 받아야 한다는 걸 써놓고, 소비자가 직접 보고 판단하게 할 예정이다.
예를 들어 김영록이란 농부가 있는데 "쌀 한 가마니를 생산하는데 담배를 몇 갑을 피웠고, 막걸리를 몇 되 받아먹었고, 아이들이 세 명인데 학비가 얼마 들었소. 그래서 이 쌀은 이 정도는 받아야 하오". 이런 이야기를 담는 것이다. 그리고 도심에 사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차도 마시고, 우리 동네 구경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밤하늘에 별도 보고 달도 보고 반딧불이도 보고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듣게 하고 싶다. 바람이 불 때 벼가 바람에 '샤샤샤샤…' 하고 부딪치는 소리는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개구리는 한 마리가 울면, 말 그대로 개구리 모두가 떼창(합창)을 한다. 가끔 논두렁 사이를 지나가다 그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서 있기도 한다. 도심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우리 동네 농민들에게도, 도심에 사는 친구들에게도, 나에게도 '순악질 프로젝트'가 기쁘다. 이거 내가 '순악질 프로젝트'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붙였지만, 실은 '우리 동네 내려와서 쉬고 놀고 즐겨라' 이런 건데…. 어찌 되었건 이 일에 집중해야 할 때쯤, 이 일에 집중하라고, 이번 일이 일어난 건가?(웃음).
지금 꿈이 있다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8년 전에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농민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에게는 풀 한 포기도 허투루 하지 않는, 생명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있었다. 브레이크를 잡아줄 사람도 없었던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은 진정한 다운 쉬프트(down shift, 여유생활)를 하고 있다. 신영복 선생의 말씀 중에 '늘 100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코스모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한 개의 점으로만 보는데, 걸으면서 코스모스를 보는 사람들한테는 꽃이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지금 내 꿈은 농사를 잘 짓는 거다. 얼마 전에 자원봉사를 하러 온 친구들과 함께 감자를 심었는데 "감자가 싹이 안 나면 어떡하나, 싹이 있는 데를 잘 잘라서 심어줘야 하는데…". 이런 걱정들을 했다. 젊은 친구들이 처음으로 감자 싹을 자르고 흙 속에 파묻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북돋아 주고 함께 하면서 어떤 정이 흐르더라. 나중에 감자가 뿌리에 달려나올 때 느끼는 수확의 기쁨도 있을 테고, 감자를 먹으면서도 '내가 직접 심은 감자 하나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고, 그래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부르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밥값이 많이 들더라. 큰 솥을 걸어놓고, 국밥을 끓이던가 해야겠다(웃음).
다음에 모임이 있다면 나도 가서 수확해보고 싶다.
좋다. 농사는 몸빼바지가 최고다. 어울리겠다(웃음). 가끔 '화려하고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방송에 주류로 나오는 삶만이 진정 아름다운 삶일까? 그런 게 나에게 어울리는 삶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코미디나 방송을 다 내려놓고 농사만 짓는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농사 중, 잠시 쉬어 가는 것도 괜찮다는 거다.
▲ '김미화'는 지금 농사 중, 잠시 쉬어 가는 것도 괜찮다. ⓒ프레시안(최형락) |
김미화에게 '사랑'이란?
나는 싸인을 할 때 항상 맨 위에 '사랑합니다'라고 쓰는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기적으로 내가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하면 된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PD에게 먼저 가서 "내가 뭐 해줄까, 어떻게 해줄까? 내가 열심히 할게"라고 하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나는 프로그램할 때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혹시나 폐가 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들면 절대로 안 한다. 내 할 도리를 하는 거다. 그러니 서로가 신뢰가 쌓이는 거다. 그게 사랑이다.
사랑이 지금까지 겪었던 여러 어려움을 이기는 힘이 되었던 것인가?
그렇다. '사랑이 힘'이라고 생각한다. 방송국 높은 분 중 몇 분은 나를 싫어할지 몰라도, 다행히 젊은 PD들이 '누님, 언니' 하면서 좋아해 준다. 나는 아날로그 식 사랑을 좋아하는데, 그런 좀 옛날 식 정을 따지는 사랑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정(情)스러운' 사랑으로 맺어진 인연들이 내가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는 힘이다.
김미화에게 '자유'란?
사람들은 나타나는 현상만 가지고 나를 평가할 수는 있다. '김미화가 이런 프레임에 갇혀서 꼼짝 못할 것이다' 혹은 '김미화에게 이런 이미지가 규정됐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늘 이런 것을 타파하며 살아왔다. 나는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코미디언으로 늙어 죽는 게 최고의 행복이다. 내가 웃기고 자빠지는 거, 그것이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30년 내 개인적으로 행복하기도 했고, 또 여러 사건에 얽히기도 했다. 웬만했으면 쓰러졌을 거다. 그런데 나는 쓰러지지 않고, 나를 규정하는 모든 틀을 깨부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생각에서부터의 자유, 틀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좌절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싶다. 좌절도 경험이다. 그런 경험들을 안 해보고 어떻게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맛을 알겠나. 그런데 좌절했을 때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지는 거다. 나는 항상 큰일이 닥쳤을 때 생각이 더 맑아진다. 대담해지고 담대해진다. 오히려 작은 것에 흔들린다(웃음). '저 떡을 내가 먹고 싶은데? 과자가 세 개가 남았는데 나는 두 개 먹고 싶은데' 하는 것들 말이다(웃음). 하지만 인생을 가름할 큰 일이 닥쳤을 때 그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커다란 권력에 복종하면 나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와 같은 유혹이 실제로 온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산다면, 코미디언으로서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묘비명을 못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 김미화'는 결국 불행할 것이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후배 중에 나하고 연기 패턴(형태 또는 스타일)이 안 맞는 애들이 있으면 속으로 '저게, 도대체 재미있나?' 하고 비웃었다. 그런데 사회가 그 친구의 개그를 원하게 될 때가 있다. 나와는 웃음 코드가 다르지만, 그 친구의 개그가 시대와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내가 잘못 판단한 거다. 그럴 때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인생에서 이것저것 다 해봐야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실패하는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한테 실패가 오면 '땡큐입니다' 하고 받아들이며 의연히 넘겼으면 좋겠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김민희)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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