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북한식 패턴'은 한미 양국이 2009년부터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대북 인식이다. 그리고 한미 양국은 '그 패턴에 더 이상 말려들지 않겠다, 그 패턴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한다. 존 케리 국무장관이 4월 15일 "북한이 국제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협상이나 대화는 없다. 우리는 같은 사이클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기류를 대변한다. 심지어 공화당의 중진 의원인 존 매케인은 과거 민주당이나 공화당 행정부가 모두 협상에 나설 때마다 "북한이 돈을 들고튀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북한은 '먹튀'라는 것이다.
'북한식 패턴'은 1994년부터 미국 공화당이 즐겨 사용한 표현이다. 북한과의 협상과 타협은 한마디로 "악행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2009년 들어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한미 간에서도 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우선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로켓 발사가 '북한식 패턴'이 재연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의 로켓 발사가 초읽기에 들어간 2009년 3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를 주재하면서 "15년간 미국 행정부가 직면했었고 결국 양보했던 방식, 즉 도발-강요-보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과 결별하는 정책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역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사지 말아야 한다"며,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불러내기 위해 유인책을 제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존 케리 미 국무장관 ⓒ뉴시스 |
한국 정부도 이를 거들고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의 2차 핵실험 다음날인 5월 26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6년 10월, 1차 북한 핵실험 때 북한이 오히려 국제 사회와 대화가 재개되는 등 보상을 받았던 경험을 우리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이런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긴밀히 공조해서 대응해야 한다." 그러자 오바마는 6월 16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호응했다. "북한의 과거 행동에는 패턴이 있었다. 호전적으로 행동하고 오래 기다리면 도발 행위에 대한 보상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내는 메시지는 그런 패턴을 깨자는 것이다."
'수박 겉핥기'식 대북 인식
그렇다면 '도발→대화→보상'으로 이어진다는 '북한식 패턴'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20년간의 대북 협상의 역사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되돌아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 핵개발에 나서자, 미국은 대화를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 끝에 결국 미국은 북한의 핵동결 및 궁극적인 폐기 약속의 보상으로 경수로와 중유 제공, 정치적·경제적 관계 정상화, 핵무기 불사용 등을 약속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강경파가 "북한의 도발에 미국이 굴복했다"고 말하고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식 패턴'의 뿌리라고 인식하는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의 내용이다.
1998년 8월에는 북한 금창리 핵의혹 시설과 북한의 소형 인공위성 '광명성 1호'(한·미·일 3국은 이를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호'로 부른다) 발사가 연이어 터졌다. 북미간에는 거친 신경전이 전개되었지만, 결국 미국은 북한의 핵의혹 시설을 방문하는 대가로 50만 톤의 식량을 지원했고, 북한이 추가 미사일 발사를 유예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경제 제재를 부분 해제했다. 이러니 북한의 도발에 대한 보상처럼 보일 수 있다.
부시 행정부 막바지에도 이와 비슷한 패턴이 나타났다. 줄곧 북한과 직접 대화를 거부했던 부시 행정부는 2006년 7월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고 그 3개월 뒤에 핵실험을 벌인 이후에야 비로소 직접 대화에 나섰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봉인과 폐쇄에 대한 보상으로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해결, 20만 톤의 중유 제공을 약속했다. 미국의 BDA 문제 해결이 지연되자 북한도 핵시설 봉인과 폐쇄를 미루면서 각을 세웠다. 2008년 8월에는 북한이 진행 중이던 영변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했고 원상 복구를 경고했다. 그러자 미국은 테러 지원국 해제라는 '보상'을 하고서야 불능화 재개를 받아낼 수 있었다. 보상을 받아낸 북한은 한미 양국이 요구한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을 거부해 6자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식 패턴'에 한미 양국이 말려든 대표적인 사례로 일컫는다.
이처럼 한미 양국은 북핵 협상의 전개 과정에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정부의 눈에 비친 패턴은 북한이 도발하면 미국이나 한국이 대화에 나서 보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의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 발사도, 5월 2차 핵실험도 북한이 과거와 같은 보상을 노리고 도발한 것으로 규정하고 '도발에는 보상이 없다'며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미 양국은 북한의 '광명성 2호'(한-미-일 3국은 이를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2호'로 본다)에는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으로, 2차 핵실험에는 고강도의 대북 제재가 담긴 안보리 결의안 1874호로 응수했다. 이러한 패턴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북한의 로켓 발사→유엔 안보리의 대응→북한의 추가 핵실험→유엔 안보리의 추가 대북 제제 결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강경 대응을 주도한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식의 패턴을 깼다"고 주장한다.
진실을 들여다보면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북핵 협상을 '도발과 보상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이해하는 것은 객관적인 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한마디로 원인과 과정을 무시한 주마간산(走馬看山)식의 접근이다.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는 특별 사찰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 및 IAEA와의 갈등, 한미 양국의 팀스피릿 훈련 재개, 미국의 북미 고위급 회담 불응이라는 원인이 있었다. 1991~2년에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한미 양국의 팀스피릿 훈련을 유보하기로 한 방침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었다. 반면 북한은 이 훈련의 재개를 한미 양국이 합의 정신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하고 NPT 탈퇴로 맞대응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3개월 후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려 상호간의 우려를 대화로 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비교적 순탄하게 전개되던 북미 협상은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초강경 대북정책과 미국 내 강경파의 반격, 그리고 북한의 핵연료봉 인출 시도(이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재처리의 전 단계로 간주되었다)가 맞물리면서 최악의 위기로 치달았다. 미국의 북폭론과 북한의 전쟁불사론이 충돌하면서 전면전의 위기가 감돌았던 한반도 정세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극적인 반전에 성공했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었고, 김영삼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제네바 북미 기본 합의가 체결된 것이다. 그런데 제네바 합의는 유별난 사례가 아니었다. 핵보유국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이 핵을 포기한 데에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안전보장 및 경제적 보상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2002년 2차 핵위기로 그 빛이 바래긴 했지만, 한-미-일 3국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8년간 '동결'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만약 이 합의가 없었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거나 북한의 핵보유 시점이 10년 정도 빨라졌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협상팀에 있었던 조엘 위트의 진단이다. "1993년 미국 정보기관의 비밀 평가에 따르면 북한은 2000년까지 60~100기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보유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이를 봉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이 얻은 것은 중유 수백만 톤밖에 없다. 2003년까지 북한에 지어주기로 한 경수로는 2003년부터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를 두고 조엘 위트는 "남겨진 협상의 기념물은 콘크리트로 메워진 두 개의 거대한 구덩이뿐이다"라고 일갈했다. 미국이 약속한 소극적 안전 보장(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미국이 1990년대 본토에서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공격 훈련을 실시했다는 것이 비밀문서 해제로 확인되면서 공약(空約)으로 끝났다.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니 제네바 합의에 대한 배신감은 북한이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북한은 1998년 8월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과 '광명성 1호' 발사가 이어지면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북한의 악행이나 도발로 볼 수 있을까? 금창리 논란은 미국 정보기관이 <뉴욕 타임스>에 첩보를 흘리면서 불거졌다. 이로써 미국에서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는 주장이 비등해졌다. 그러나 미국이 지하 핵시설로 지목한 금창리는 '텅 빈 동굴'이었다. 이것은 북한의 해명을 믿지 않았던 미국이 50만 톤의 식량 지원을 약속하고 두 차례에 걸쳐 금창리를 방문하고 나서야 확인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금창리 논란은 '북한의 악행을 보상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정보 왜곡의 대가를 스스로 지불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 지난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1호(광명성 1호)가 발사되는 모습 ⓒ조선중앙TV=연합뉴스 |
'광명성 1호' 혹은 '대포동 1호'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실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호'는 미국이 붙여준 이름이고, 북한이 당시에 발사한 것은 미국 정보기관도 나중에 인정한 것처럼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였다. 당시에는 북한이 로켓 발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었고, 이를 금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도 없었다. 쉽게 말해 당시 '광명성 1호' 발사는 어떠한 합의나 국제규범을 위반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 로켓 발사를 계기로 미국은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대미 개입에 힘입어 '페리 보고서'가 나올 수 있었다. 1999년 9월에는 북·미간의 베를린 합의가 나와 북한이 추가적인 탄도 미사일 발사 유예를 약속했고, 미국은 경제 제재 완화를 약속했다. 9개월 후 이행된 미국의 경제 제재 완화는 상징적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테러 지원국 해제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 컸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유예 약속은 2006년 7월 초까지 지켜졌다. 2003년에는 부시 행정부의 대화 거부와 적대시 정책을 문제 삼으면서 유예 약속이 유효하지 않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유예한 8년간의 '협력'의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상징적 수준의 경제 제재 완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클린턴 행정부 막바지에 타협 일보 직전까지 갔던 미사일 협상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사활적 이해로 간주한 부시 행정부의 2001년 등장과 함께 없던 일이 되었을 뿐이다. 이 사이에 북한이 대규모의 식량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식량 지원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미국 외교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합의와 1999년 베를린 합의를 이행하고 있던 시기에 미국은 '악행'으로 응수했다. 부시 행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2000년 양국 관계의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담은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무시했다. 타결 일보 직전까지 갔던 미사일 협상을 중단하고는 '북한위협론'을 근거로 MD 구축을 선언해버렸다. 급기야 2001년 핵태세 검토(NPR) 보고서에서는 북한을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명시했고, 2002년 1월에는 9·11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를 두고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비밀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언급하면서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고 있다며 중유를 제공하고 있었다.
북한이 2006년 7월과 10월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고 1차 핵실험을 강행한 데에도 미국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미국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채택과 거의 동시에 북한에 BDA 제재를 부과했다. 또한 9.19 공동성명에서 북한에 핵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북한을 상정한 핵공격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한사코 거부했다. 결국 이라크 전쟁 패배의 여파로 대북강경책을 주도한 네오콘이 줄줄이 쫓겨나면서 미국은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섰다. 2007년 초부터 북미 직접 대화가 시작되자 비핵화 과정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2007년 6자회담의 2·13 합의에 따라 북한이 약속한 영변 핵시설 봉인과 폐쇄의 '일시' 불이행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30일 이내에 BDA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시한을 지키지 못했고, 이에 따라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봉인·폐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BDA 문제가 해결되자 북한은 즉각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다. 2008년 하반기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8월 중순 북한은 6자회담의 10·3 합의에 따라 진행했던 영변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단하고 원상 복구를 경고하고 나섰다. 당시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북한의 강경 조치를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문제와 연계시켰다. 그러나 북한의 불능화 중단은 김정일의 건강 문제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8월 11일까지 하기로 한 테러 지원국 해제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다. 10월 중순에 미국이 이 약속을 지키자 북한도 불능화 작업을 즉각 재개했다.
▲ 지난 2008년 6월 27일 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2013년 북한은 흑연감속로의 재가동을 선언했다. ⓒ뉴시스 |
2008년 12월 6자회담의 결렬 원인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회담 결렬 원인으로 북한이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의정서 채택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6자회담 합의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일 3국은 사실상의 전면 사찰을 요구했다. 북한은 '가택수사'를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며 검증 문제는 최종단계에서나 논의할 수 있다고 맞섰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한국의 약속 사항인 에너지 지원을 북한의 검증 의정서 수용과 연계시키면서 강경론을 주도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김정일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지자 북한은 오래 못 갈 것이라는 판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한반도 정세가 뒷걸음 친 2009년 상반기의 상황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09년 4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5월 2차 핵실험은 이명박-오바마가 '북한의 패턴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한 결정적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실망과 좌절은 한국과 미국만의 몫은 아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북한의 실망감도 대단히 컸다. 미국이 대북 특사 파견을 타진한 2009년 2월 말∼3월 초는 북한이 강력히 반발했던 한미합동군사훈련 '키리졸브'를 앞둔 시점이었다. 이 훈련의 실시 여부를 새롭게 출범한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은 북한은 유엔군(미군)과의 장성급 회담을 통해 이 훈련의 취소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일축했다. 더구나 이때를 전후해 한국의 국방장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한미연합군 수뇌부는 수시로 김정일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면서 북한 급변사태 발생 시 한미연합군의 투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위성 발사에 대한 한-미-일의 강경 대응은 대미 불신을 악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미국의 정보기관도 인정한 것처럼, 북한이 쏘아 올린 것은 소형 위성을 지구 궤도 위에 올려놓기 위한 '우주발사체'였다. 또한 발사 시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재추대하기로 한 12기 최고인민회의 및 4월 15일 고(故) 김일성 주석의 생일(태양절)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는 북한의 위성 발사가 내부적 목적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의 관심 끌기'라든지, '우는 아이가 엄마의 젖을 달라는 것'이라는 식의 일방적 해석에 매몰돼, 이 사안을 유엔 안보리에 가져가고 말았다. 어떤 나라가 위성을 발사했다는 이유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 그만큼 북한의 반발도 거셌던 것이다.
이 사례는 '도발→대화→보상'으로 이어진다는 북한식 패턴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임을 잘 보여준다. 만약 북한의 위성 발사가 오바마 행정부와의 대화를 노린 것이었다면, 북한은 위성을 발사하지 않고도 이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미 미국은 2월 말에 대북 특사 파견을 제안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특사 제의를 수용하지 않고 로켓을 쏘아 올렸다. 또한 부시 행정부 말기에 재개된 미국의 식량 지원을 오바마 행정부 들어 중단을 요구한 쪽도 북한이었다. 로켓 발사의 목적이 미국의 관심 끌기나 식량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대북 협상 15년사(1993~2008년)를 '북한식 패턴'으로 단순화한 오바마 행정부는 2009년부터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의 무위·무시·무능의 대북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사이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꾸준히 강화되었고, 한반도 정세도 극적인 반전은 사라지고 교착상태와 위기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를 교정했어야 할 이명박 정부는 '흡수통일'의 망상에 사로잡히고 말았었다.
기실 이 기간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북한식 패턴'이라는 인식과는 다른 세 가지 중요한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흔히 일컫는 북한의 '도발', '악행', '벼랑 끝 전술'은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약속 불이행이나 대화 거부 등 미국의 정책에 대한 북한의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에 나서거나 미사일을 쏘지 않으면 관심이 없다가, 북한이 '도발적인 행동'을 했을 때 비로소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셋째, 미국은 북한이 협력하고 약속을 이행하면 엄청난 보상이 있을 것처럼 말했다가, 실제로는 북한의 '협력' 대가를 지불하는 데 대단히 인색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흔히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으려 한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 역시 객관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북한이 지원을 원했다면 지원 중단이나 취소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켓 발사나 핵실험을 강행한 이유가 잘 설명이 안 된다. 또한 북한의 유력한 외화벌이 수단이라는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과 관련해서도 고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어진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북한은 핵문제가 "경제적 흥정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분석이 북한을 두둔하자는 취지가 아님은 물론이다. 북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미 양국이 '북한식 패턴'이라는 신화에서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한미 양국이 '북한식 패턴'이라는 인식의 함정에 빠져 있는 사이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꾸준히 향상되어왔다는 것이다.
* 이 글은 <핵의 세계사>(아카이브, 2012년)에 수록한 내용을 대폭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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