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안보정책수석을 지냈던 서주석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는 '남북한 긴장 완화와 군사관계 개선 전략'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서 교수는 남북의 군사적 충돌은 남북관계의 다른 이슈를 집어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며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역대 정부의 활동을 소개했다. 그는 본격적인 포용정책을 추진했던 김대중 정부에서도 정상회담 합의에 군사 관련 이슈가 빠져서 서해 충돌을 빚은 점을 지적하면서 노무현 정부에서 합의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방안 이행이 남북간 군사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이다.
'2013년 체제와 한반도 평화전략'이라는 큰 주제로 열리는 2기 아카데미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인제대학원대학교에서 총 8차례 진행된다. 여섯 번째 강의는 10월 18일 열리며 김연철 인제대학교 교수가 '한반도 경제공동체 꿈 무너지는가?'라는 주제로 남북경협 및 북중경협에 대해 강연한다. 강의에 관한 자세한 안내는 한반도평화포럼 홈페이지(☞바로가기)를 방문하거나 사무국으로 전화(02-707-0615)하면 된다. 한반도평화포럼은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하는 연구자, 종교·시민사회 관계자, 전직 공직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제1기 한반도평화아카데미는 지난해 10~11월 5회에 걸쳐 진행됐다. <편집자> |
남북 긴장 완화와 군사관계 개선 전략
최근 남북관계는 일련의 군사 충돌로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 지난해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 일본 언론에서는 연내에 북한이 경기도를 포격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래서 지난해 12월 20일 해병대 연평부대가 해상 사격훈련을 재개했을 때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가 소집돼 한반도 상황을 논의할 정도였다.
올해 들어 지난 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관계를 복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대화와 6자회담을 재개하기로 하면서 일정 부분 상황이 정리된 느낌이다. 북한이 미중 정상회담 결과에 화답해 남측에 고위급 군사회담을 제기했고 2월초 군사실무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남측이 제기한 천안함, 연평도 사태 관련 사과 문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으면서 고위급 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지난 5월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 사실을 북한이 폭로하기도 했다. 정상회담설은 지금도 나오고 있지만 공식적인 재개는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남북간 군사적인 긴장은 여전히 극도의 긴장상태에 놓여있다.
남북간 군사관계에 상황에 발생하면 다른 모든 이슈를 지배하게 된다. 주변국과 협조해 상황이 나빠지지 않도록 억제하는 게 중요하지만 억제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다. 남북간의 분쟁을 방지하고 문제를 풀겠다는 정치적 의지도 중요하다. 고위 당국자의 정치적 의지만으로도 안 된다. '일'을 저지르는 건 결국 군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군사관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군사접촉이 실무적인 관건이 될 수 있다.
지금 남북관계가 근래 들어 최악이긴 하지만, 6.25 전쟁 이후 가장 최악이었던 시기는 1965~70년이라고 본다. 주한미군의 자료를 보면 그 기간 동안 한국군이 320여 명, 북한군이 600여 명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1967~69년에는 매년 100명 이상의 한국군이 전사했다. 보통 1968년 1.21 기습(김신조 등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 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하려한 사건. 편집자)이나 삼척울진 무장공비 사건을 기억하는데, 그 전부터 상당한 충돌이 있었고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하지만 1970년으로 들어오면서 남북관계가 바뀌었다. 우리가 평화적 경쟁 관계를 주장하면서 대화를 제의했고, 남북 적십자 회담이 시작되면서 대화 관계로 금세 바뀐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도 최악의 상황이지만 관계 복원의 모멘텀이 생겨날 수 있다고 기대한다.
▲ 2010년 11월 북한군에 의해 포격당한 연평도. ⓒ연합뉴스 |
"박정희, 1966년 이미 '선 건설, 후 통일'로 돌아서"
화해협력의 대북 포용정책은 오래 역사를 갖는다. 포용정책이라는 말을 쓴 건 김대중 정부부터지만 남북 대결을 중단하고 '선 건설, 후 통일'로 정리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8.15 경축사를 통해 발표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부터다. 통일부 백서를 보면 박 대통령은 이미 1966년부터 '선 건설, 후 통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은 북한이 대남 도발을 중단하면 교류협력을 해 나가면서 동시에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전쟁 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군비통제 합의로 이어졌다. 7.4 남북공동성명은 합의가 그대로 지켜진 건 아니지만 상호간 충돌을 방지하고 확산시키지 않겠다는 원칙적 입장을 확인한 점에서 남북간 긴장완화의 효시로 여겨진다.
1970년 적십자 회담이 열렸고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지만 이듬해부터 남북의 입장차가 확인되면서 다시 긴장국면이 이어졌다. 1970년대에도 북한 땅굴 등 북한이 전면적인 군사적 방법으로 도발할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1980년대 들어 북한의 전면전 위협은 상대적으로 줄고 대신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사건 등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남북 갈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군비 증강 경쟁으로 1980년대 들어서는 한미연합군이 억지력을 더욱 보강하면서 전면전 위협이 사라진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 말 냉전 종식 상황이 다가왔고 남북간 긴장완화 및 관계개선이 이뤄졌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북방 정책을 추진했고 여전히 급속한 군축 및 주한미군 철수 등 즉각적인 통일을 내세우던 북측은 큰 방향에서 이에 화답해 1990년대 초 본격적인 남북대화가 시작됐다.
1991년 12월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기본합의서에 따르면 남북은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했다. 원론적 차원의 합의였던 7.4 남북공동성명에 더해 무력 불사용, 불가침 구역 설정, 군사 당국자간 직통전화 설치 등 군사적 차원에서도 합의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1992년 11월 북한 핵문제가 악화되면서 남북합의서의 이행은 전면 중단됐다. 당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에 따른 핵안전조치협정상 통제에 북측이 동의하면서 한편으로 핵 관련 대화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 남북대화가 추진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미국이 예상한 10~12킬로그램보다 훨씬 적은 90그램에 불과해 문제가 생겼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압박이 강화됐고 북한은 NPT를 탈퇴했다.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서로 문제가 정리된 다음 남북대화 시기가 올 수도 있었다.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주선됐지만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열리지 못했다. 1995년에는 대북 쌀 지원이 있었는데 인공기 게양 사건 등 잡음이 생기면서 다시 냉각기가 찾아왔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 후반기였는데, 정책상으로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식량난이 가중되면서 북한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관계를 맺지 않고 기다리자는 주의였다.
"6.15 선언에 빠진 군사 조항, 군사관계 진전에 장애 됐다"
▲ 서주석 전 청와대 안보정책수석 ⓒ프레시안 자료사진 |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온 6.15 공동선언의 제2항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 조항은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가자는 내용이다. 이는 앞서 7.4 공동성명에서부터 이어진 '선 건설, 후 통일' 면에서 의미 있는 합의였다.
이 회담에서 김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지만 6.15 공동선언에는 관련 조항이 없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군사관계 진전에는 장애를 초래했다.
당시 남북 군사대화의 계기는 휴전선을 넘나드는 교류협력, 그 중 우선적으로는 철도·도로 개설을 둘러싼 군사적 보장의 필요성에 의해 마련되었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 개최된 제1차 및 제2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양국은 경의선 철도 연결 및 문산-개성간 도로개설에 합의하고 군사당국자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2000년 9월에 개최된 제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 남측은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에 대한 구체적 협의를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많은 준비를 했다. 하지만 북한은 철도 연결과 관련한 군사적 안전보장 문제만 협의하자고 선을 그었다.
당시 제주도에서 1박 2일 동안 열린 최초의 군 최고책임자간 회담은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는 제한된 성과밖에 도출할 수 없었다. 결국 양국 정상회담에서 합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북한은 비무장지대 개방과 남북관할구역 설치 문제를 강조했는데, 정전협정에 의해 유엔군 사령관이 비무장지대의 관할권을 갖고 있는 남측 입장에서는 곤혹스런 것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유엔군과 북한이 판문점 장성급회담을 통해 합의를 도출한 이후 타결될 수 있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 군사대화는 교류협력, 특히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군사적 보장조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2차 국방장관 회담은 한국군의 '주적 표기' 문제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행되지 못했는데, 설령 회담이 열렸다고 해도 의제가 확대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류협력을 위한 군사적 보장조치가 합의됨으로써 금강산 관광 활성화와 개성공단사업 진행을 위한 여건이 마련된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
노무현 정부는 포용정책의 범위를 넓혀야만 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군사적 안보 문제에 대한 이행이 없으니 서해교전도 발생했고, 어떻게든 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임기 초반 대북 송금 사건이 터지고 특검 문제가 불거지면서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다. 장관급 회담이 몇 차례 열렸지만 군사문제는 정상급에서부터 논의가 되어야 풀리기 마련이다.
당시 남측의 큰 이슈는 서해 평화였다. 특히 2002년 6월 서해교전의 발발로 심각한 인명피해와 더불어 남북 간 긴장관계가 재확인되면서 서해 NLL 수역에서의 평화 보장이 부각됐다. 북한 입장에서는 당시 휴전선 인근에서 한국군의 대북 심리전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이자는 합의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2004년 5월 1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이 개최되었다. 2004년 6월 이어진 2차 남북 장성급군사회담에서는 서해 해상에서의 우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상대측 함정과 민간 선박에 대한 부당한 물리적 행위 금지, 국제상선 공통망 활용, 제3국 불법어선에 관한 정보 교환, 서해 통신연락소 설치 등에 합의했다. 또 북측의 요구대로 단계별로 거쳐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 활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로서 서해 평화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비무장지대에서의 선전활동 금지도 이행되어 왔다. 국제상선 공통망을 이용한 상호 교신은 북한이 10번에 2~3번 정도 응답하는 수준이었지만 일정한 신뢰회복 분위기가 있었다.
이후 2004년 7월 베트남 탈북자 문제 등으로 남북관계가 1년 가까이 중단됐다. 2005년 5월 미국의 대북정책팀이 바뀌면서 6자회담 진전 모멘텀이 왔고, 우리도 북한에 중대 제안(직접 송전)을 하면서 대화 국면이 다시 조성됐다. 2005년 5월 차관급 회담이 열렸고 6월에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대북 특사로 다녀오면서 관계가 진전됐다.
2006년 3월의 제3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남측은 서해 해상에서의 충돌 방지 및 공동어로수역 설정 문제를 중점 제기했다. 북한은 서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해상군사분계선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해 회담은 결렬됐다. 이후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와 10월 핵실험 강행으로 인해 상당 기간 열리지 못하다가 개최된 2007년 5월의 제5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도 다른 부분에서는 군사적 보장조치가 일부분 마련됐지만 서해평화문제의 실질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가 해결의 방향에 들어서거나 정상회담을 통해 중요한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강조해 왔다. 이 점에서 2007년 2월 6자회담에서 2.13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 뒤 몇 달 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그 해 6월에 합의 이행이 되면서 정상회담 성사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도 군사회담을 통해 풀지 못한 서해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풀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에 해주항 개발과 경제특구 지원을 제안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상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방안에 합의하게 된다.
당시 양 정상은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 이용 등을 결합한 패키지에 합의했다. 당시 정상회담 합의에는 남북 기본합의서의 재확인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도 문제는 시간이었다. 정상회담이 정권 말기인 2007년 10월에 있었다.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린 것은 대선 직전인 11월이었다. 군으로서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회담에서는 공동어로구역의 설치 범위가 문제가 됐다. 북한은 서해 NLL과 자신들의 이른바 영해계선 사이에 공동어로구역을 설치하자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결국 남북국방장관회담은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하여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와 함께 협의·해결하기로 했다. 대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문제는 남북 장성급군사회담을 열어 빠른 시일 안에 협의·해결하고 서해 공동어로에 대한 군사적 보장 대책은 별도로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최우선적으로 협의·해결하기로 하였다.
이 회담으로 남북 군사관계의 협의 메커니즘이 정립된 것은 의미가 있다. 3차 남북국방장관회담의 개최에 합의함으로써 것은 국방장관회담의 정례화와 제도화에 대한 기대를 더했다. 과거 남북기본합의서에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이행되지 못했던 남북군사공동위원회가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를 본격적으로 협의하게 된 것 역시 큰 성과였다.
▲ 지난 2월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 당시 북측대표단의 모습. ⓒ연합뉴스 |
"모든 대화는 자리에 앉는 것 자체로 의미 있어"
남북 군사관계의 개선은 지금까지 알아본 군사회담 합의사항만을 재확인하고 이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재정적인 측면을 고려해 기존의 합의 내용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그 뒤 남북 총리급 회담 등 계획되어 있던 모든 회담을 모두 중단했다.
남북간 합의는 서로의 입장을 어떻게든 타협되고 합의해 나온 것이기에 일종의 약속이라고 말 수 있다. 정부가 바뀌어도 남북간 합의사항을 준수해야 한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49년을 집권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년 집권했다. 남북관계를 맡은 인사들도 임기가 장기간으로 지속됐다. 반면에 한국은 5년마다 정부가 바뀌었다. 임기 중에도 장관이 계속 교체돼 합의사항의 이행이 어려웠고 그때마다 애로를 겪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 쪽에서 6.15, 10.4 선언의 이행을 계속 이야기할 때 남측은 답하지 않다가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남북간 합의 이행과 관련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날 금강산에서 박왕자 씨 피살사건이 터졌다. 그래서 이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왔는데 사실 지금까지의 합의에 중요한 내용들이 많다. 서해 문제는 결정적 이슈이기 때문에 범정부적 차원에서 관리하면서 국민적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서해 평화문제와 관련해 결국 해법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방안 이행밖에 없다. 이전까지의 제안을 총망라한 패키지였고 북한으로서는 해주 지역을 비무장화하자는 엄청난 제안이었다. 이 방안이 이행되면 강령반도와 해주가 비무장화할 수 있다는 점을 살펴야 한다.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현재 회담 재개의 관건은 천안함, 연평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달려있다. 지금까지는 남측의 선 사과 주장과 북한의 천안함 사과 거부로 입구에서부터 막혀 있었지만 양측의 요구를 다 들고 회담장에 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간의 모든 대화는 자리에 앉는 것 자체부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회담장에서 북한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실질적인 교류협력이나 지원에 관해 추가 합의를 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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