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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남북 비핵화 회담, '동남아발 바람'으로 소멸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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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발리 남북 비핵화 회담, '동남아발 바람'으로 소멸한 까닭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한반도포커스']

발리 비핵화 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남북 회담 직후 미국은 김계관 부상을 초청해 북미 회담을 가졌다. 북핵문제를 둘러싼 본격적인 협상 재개와 6자회담 개최까지는 아니지만 북미간에 훈풍이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북한은 재미 한국인의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하고 실종미군 유해송환 문제를 미국과 협의하기로 했다. 미국 역시 대북 인도적 지원에 앞서 우선적으로 수해지원을 결정했다. 북한과 미국이 오랜 동안의 갈등 국면을 접고 본격적인 협상 국면으로 전환할 지는 분명치 않지만 협상을 위한 적극적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북미간 움직임과 달리 남북관계는 냉랭하기만 하다. 발리 비핵화 회담을 계기로 남북이 신뢰를 형성하고 관계를 개선할 것이라는 일각의 기대와는 달리 남북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남측의 금강산 회담 제안에 대해 북은 재산권 처분 강행으로 맞섰고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 전향적인 대북 제안을 담지 않았다. 남측의 을지 프리덤 가디언 훈련에 대해 북은 비난 공세를 계속 했고 북한이 포사격을 했다며 남측은 대응사격을 퍼붓기도 했다. 발리 회담은 일과성 만남이었을 뿐 남북관계는 진전은커녕 갈등과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발리발 대화국면이 이처럼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만 것은 발리 회담 자체가 남북의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억지춘향식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발리 비핵화 회담은 본질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요구에 따라 남북이 마지못해 마주 앉은 성격이 강하다. 북한은 북미협상으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남쪽과 만나 악수하는 사진이 필요했고 한국 역시 미국의 남북대화 압력에 못 이겨 북한과 사진을 찍은 정도이다.

▲ 발리 남북 비핵화 회담 장면 ⓒ연합뉴스

바로 전까지 남북의 비공개 접촉을 폭로하고 더 이상 이명박 정부와는 상종도 않겠다던 북한이었음을 감안하면 발리 회담은 전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 남북대화에 의지를 가지거나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성을 가진 건 결코 아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연초부터 북한의 대화 제의를 계속 거부했고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를 거쳐 6자회담을 재개한다는 3단계 프로세스마저 천안함 사과 없이는 시작할 수 없다는 소극적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발리 회담은 전적으로 미국의 요구와 권유에 의한 것이지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외무장관회담에서 클린턴 국무장관의 경고성 최후통첩에 따라 내키지 않지만 발리 남북 회담에 응했을 뿐이다.

결국 발리 회담은 미국과 중국의 요구로 남과 북이 마지못해 마주 앉은 자리였고 때문에 이후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등을 돌리고 있던 남북이 억지로 떠밀려 마주 앉긴 했지만 여전히 신경전만 지속하고 있다. 스스로 내켜서 만난 게 아니었기에 마주 앉고서도 상대방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기를 요구하는 팽팽한 기싸움 뿐이다. 상대방의 태도변화만을 기다리며 자신이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셈이다.

발리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되지 못한 데에는 회담의 배경이 남북의 자발적 의지가 아닌 점 말고도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북한이 이명박 정부에 대해 갖고 있는 해소할 수 없는 불신 때문이다. 발리 회담 직후 통일부는 관광재개 문제를 논의하자며 금강산 관광 실무회담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사업자와 재산권 처분문제를 논의할 뿐이라며 당국간 회담을 거부했다. 오히려 북한은 예고한 대로 남측 사업자의 재산을 법에 따라 몰수하는 조치를 강행하고 말았다. 발리 회담의 정세 호전을 배경으로 이명박 정부가 나름 북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인 것인데도 북이 이를 거부한 것은 그래서 의외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금강산 관광 회담에 관한 한, 북한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이다.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간 회담에서 번번이 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욕과 절망과 배신감을 남쪽에게 당했다는 입장이다. 특히 2010년 2.8 금강산 실무회담은 북에게 최악의 심리적 외상을 안겨 주었다. 관광 실무회담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는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북한이 그토록 절실하게 매달리고 요구했던 금강산 관광재개를 희망이 없는 것으로 포기한 데는 바로 지난 해 2.8 회담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다. 북이 양보에 양보를 거듭해서 어렵사리 회담이 열렸지만 이명박 정부는 예의 3대조건만 기계적으로 되풀이했고 북의 주장과 요구에 대한 대안은 없는 채로 관광재개가 불가하다는 입장만을 반복했다. 관광재개를 위한 남북회담이 결국 관광불가 입장을 북에 통보하는 장소가 되고 만 셈이다. 더욱 기막힌 것은 북이 후속회담 일정이라도 합의하자고 제의했음에도 남측은 일정합의마저 거부했다.

결국 북한은 그렇게 공을 들인 금강산관광 실무회담장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체와 본질을 똑똑히 알게 되었고 다시는 관광재개를 위한 당국간 실무회담에 나서지 않을 것임을 결심하고 또 결심했을 법하다. 2.8 회담의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인해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또다시 관광 실무회담을 제안했다지만 회담이 개최되기만 할 뿐 남측이 관광불가라는 입장만을 반복할 것이라는 의심에 사로 잡혀 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먼저 관광 재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남측의 실무 회담 제의에 섣불리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관광재개의 희망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절실하게 원했던 금강산 관광 재개였지만 이제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고 남측과의 관광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에 빠져 있다. 최근 새로운 특구법을 만들어 현대아산의 독점권을 부인하고 남측의 재산권 처분에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강산 관광 재개를 둘러싼 남북의 상호 불신은 이제 북으로 하여금 어떤 기대도 하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지난 경험을 통해 형성된 북한의 대남 불신은 금강산 관광 회담 거부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수해지원 제의에 대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자신들이 요구한 쌀과 시멘트를 거부하고 라면과 초코파이를 제공하기로 한 이명박 정부의 협량함에 대해 북은 묵묵부답으로 대응하고 있다.

남북관계 교착의 원인이 북한의 대남 불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측 역시 북한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북이 금강산 관광회담에 대해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면 이명박 정부도 북에 대해 연평도 포격이라는 씻지 못할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지난 해 천안함 사태와 5.24 대북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수해 복구를 위해 쌀과 시멘트를 포함한 100억 원 규모의 지원품을 제공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도 순조롭게 열렸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풀리는가 싶던 그 해 11월 이명박 정부가 북으로부터 받은 것은 연평도 기습포격이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연평도 포격이라는 사상 초유의 군사적 도발을 겪은 이명박 정부는 여간해서 북한을 신뢰하기 힘들게 되었다. 언제라도 북한은 도발할 수 있다는 경계심과 절대 북한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불신감이 이명박 정부에는 강력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발리 회담 이후 남북이 서해상에서 포격을 주고받은 사건이 난 것도 이 같은 불신의 전형적 반영이다. 북은 사진까지 공개하며 발파작업이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해상 포격에 대한 정당한 대응사격이었음을 강조했다. 남측의 대북 불신은 뜬금없는 김관진 국방장관 암살조 잠입보도가 주요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데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신임 검찰총장 취임사에 종북세력 척결이라는 단호한 경고가 포함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남과 북의 상호 불신은 발리 회담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발리회담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전혀 진전이 없다. 남과 북이 어렵게 마주앉긴 했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상호 불신으로 인해 상대방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북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이 없이는 남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생각이고 남측 역시 먼저 나서서 대북정책 기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당분간 갈등과 교착의 남북관계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이명박 정부는 북에 대해 먼저 손을 내밀기 어려운 입장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가 기존의 원칙과 입장을 반복해서 재확인하고 있음은,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 생각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천안함 사과나 비핵화의 진정성 있는 조치 등 북한이 최소한이라도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이명박 정부는 대북정책 기조를 바꿀 수가 없다. 이미 임기 후반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가 이제 와서 대북정책을 전환할 경우 오히려 레임덕이 가속화되고 핵심 지지층의 이탈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평가만큼은 받겠다는 입장이다.

북한 역시 9년만의 북러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그들만의 대외전략의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다. 이미 북중관계는 일 년 사이 세 차례 방중이라는 전례 없는 긴밀함을 보이면서 남북관계 경색에 비례해서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남북 교역의 감소분 이상으로 북중교역 규모는 급증하고 있고 황금평과 나선시의 북중 합작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은 러시아와의 경제협력도 가속화함으로써 남북관계 중단의 공백을 이겨낼 채비를 하고 있다. 남쪽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자리에 이제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력을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중러 협력을 우선시하는 북한에게 이명박 정부와의 남북관계는 그다지 절박하지 않을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스스로 대북정책 기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북한은 중러와의 정치적·경제적 연대를 통해 남북관계 중단을 감내하고 버티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관계는 남과 북 스스로의 주체적인 노력에 의해 진전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발리회담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는 여전히 답보상태이고 갈등국면일 수밖에 없다. 남북은 내키지 않은 회담장에 억지로 불려나갔고 회담 이후에도 상호 불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자신의 처지와 전략상 먼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가 계속해서 엇박자를 내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인 셈이다. 발리 회담의 훈풍이 일시 불었지만 그것은 저 멀리 동남아의 바람이었을 뿐 한반도로 넘어와 상륙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남북의 엇박자는 계속될 것이고 한반도는 여전히 먹구름에 쌓여 있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1년 9·10월호(제15호)에 실린 네 번째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발리 비핵화 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입니다.(☞전체보기)

* 원제 : 발리 비핵화 회담 이후 남북관계: 상호불신의 엇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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