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부채한도 승인을 위한 법적 절차가 극적으로 마무리됐지만, 미국 경제의 앞날이 어둡다는 비관적 전망이 쏟아진 2일(현지시간)에도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전날보다 0.12%포인트 하락(국채 가격 상승)한 2.63%를 기록했다. 장중 한때 2.60%를 기록하는 등 작년 11월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 미국이 디폴트 위기를 넘겨도 부채 문제가 심각하고 경제가 둔화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코스피 지수가 폭락한 3일, 오히려 달러 가치와 미국 국채 가격은 강세를 보였다. ⓒ연합 |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국 국가부도 위기설로 미 국채가 투매될지 모른다는 경고가 남발됐던 7월 한 달 동안 미 국채를 매입한 투자자들은 1.83%의 수익을 올렸다. 또한 올해 들어 미 국채에 대한 투자액이 가장 많았다.
일반적으로 신용등급이 떨어진다거나 더블딥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면 그 나라의 국채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국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 전문가들은 '안전자산'에 투자자금이 쏠리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주요 경제가 처한 경제위기는 일반적인 경기침체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전자산' 선호를 부르는 경제위기의 본질 논란
경제위기의 진단과 대응이 잘못될 경우 '제2의 대공황'이라는 디플레이션으로 치달을 수 있으며, 지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대대적인 재정지출로 일단 대공황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지만, 본질적인 처방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 유럽의 부채위기와 미국의 디폴트 위기, '더블딥' 위기 등으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안전자산'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안전자산은 수익성이 떨어지더라도 가치가 유지되는 상품으로 인플레이션(화폐 가치 하락)은 물론 디플레이션(실물자산 가치 하락)에도 위험회피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전망이 불투명할수록 각광을 받는다
이때문에 현재 국제금값이 연일 사상최고치를 기록하는 것처럼 미국 국채도 안전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부각되는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 국채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지속적으로 내놓았던 세계 최대 채권투자회사 핌코는 이미 지난 6월 미 국채에 대한 투자비중을 5%에서 8%로 늘린 '이중행보'를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뿐 아니라 주요국 채권에도 돈이 몰리고 있다. 이날 독일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0.05%포인트나 하락해 연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독일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장중 미 국채 금리보다 훨씬 낮은 2.395%까지 하락해 물가상승률(2.4%)을 밑돌았다. 독일의 장기 국채금리가 물가상승률보다 낮아진 것은 <톰슨로이터>의 국채금리 데이터가 보관된 지난 1957년 이래 처음이다. 독일은 세계적으로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자금을 사실상 '무이자'로 빌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악재로 코스피 지수가 폭락하고 세계 주요증시들이 일제히 급락한 3일에도 달러 가치가 원화와 유로화 등에 대해 강세를 보인 것도 '안전자산 선호' 현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뉴욕타임스> "디플레이션이 다시 찾아왔다"
그렇다면 현재 미국의 경제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뉴욕타임스>는 "디플레이션이 다시 찾아왔다"면서 그 근거로 2일 상무부가 발표한 6월 소비자 물가와 명목소득 지표를 제시했다.
이 신문은 "1년만에 처음으로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하락세를 보였고, 명목 소득은 불과 01.% 증가했는데, 그나마도 실업수당 등 정부지출과 자본 이득에 의존한 것이지 임금 상승 때문이 아니다"면서 "사실상 임금 소득은 하락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미국 경제는 소비지출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이런 지표로 볼 때 3분기 이후 미국 경제가 성장세를 보이기 어려우며, 부채한도 협상으로 긴축 조치가 따를 것으로 보여 정부의 경기부양책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세계 금융위기 사례를 모두 분석한 <이번엔 다르다>의 저자로 유명한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더욱 심각한 진단을 내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과도한 부채위기가 해소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제2의 대위축'이라는 것이다. '제1의 대위축'은 물론 '대공황'을 가리킨다. '제1의 대위축'에 대한 잘못된 대응으로 전세계는 심각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로고프 "폐렴을 '지독한 감기'로 오진하는 경기진단 위험"
로고프 교수는 '제2의 대위축(The Second Great Contraction)'이라는 칼럼에서 "모두가 최근의 금융위기에 따른 경제둔화를 '대침체(Great Recession)'라고 말하고 있지만, 잘못된 문제 진단으로 잘못된 예측과 잘못된 정책을 초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로고프 교수에 따르면, '대침체'라는 용어는 '폐렴'에 걸린 경제에 대해 '아주 심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진단하는 오류다. 일반적인 경기침체로 진단할 경우, 심한 경기침체라도 재정정책이나 구제금융 등 전통적인 정책수단으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는 본질적으로 '과도한 레버리지(자기자본 대비 부채 비율)'에서 초래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채 위기는 부도, 초저금리, 인플레이션 유도 등 이른바 받을 돈을 가진 쪽보다 빚을 진 쪽이 유리하도록 정책을 쓰지 않는 한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재정지출로 극복 가능한 일반적 경기침체 아니다"
로고프 교수는 "재정적 부양책이 실패한 것은 '대침체'를 극복하기에 충분한 규모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다.
로고프 교수는 "과도한 레버리지로 초래된 금융위기에서는 부채가 가장 큰 문제"라면서 "금융자본을 효과적으로 분배할 수 있는 정부라면, 채무조정과 감축을 촉진하는 것이 위기 해소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로고프 교수는 "채무조정이나 감축, 인플레이션 유도가 채권자에서 채무자로 소득을 이전하는 불공평한 방법이지만, 미국이나 유럽처럼 정치적 공방만 벌이고 있다면 고통의 기간이 늘어날 뿐"이라면서 "유럽이 그리스 등 부채위기로 고통스럽게 배우고 있는 것처럼 결국 부채 위기에서는 이런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로고프 교수는 "인플레이션 유도 정책은 이단적인 정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면서 "하지만 '대위축'은 경기침체와 달리 70~80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하는 매우 드문 사건이기에, 이런 시기에는 중앙은행이 일반적인 시기에 쌓아둔 신뢰를 바탕으로 인플레이션 유도 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은 미국과 유럽의 정치권이 진통을 겪고 있는 것에서 보듯, 정치적 합의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로고프 교수의 진단과 처방이 맞지만 실행에 옮기기 힘들다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는 대공황의 파국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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