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연일 정치음모설, 피해여성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의문, 프랑스 국내에도 제3의 성폭력 피해자가 있다는 소식 등이 쏟아져나온다. 이제 사건은 반전을 넘어 혼돈에 빠져든 것 같다. 그 결말을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 사건을 보면서 성폭력이 개인의 스캔들이 아닌 사회의 문제, 즉 공동체 영역으로 회부하고 합리적 절차를 거쳐 정의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안이라는 의식이 얼마나 요원하며,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사법적 정의 요구한 반성폭력운동
성폭력사건에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1990년대 반성폭력운동이 뜨겁게 달구어진 이래 한국 여성운동은 '성폭력 없는 세상'을 외치고 그것을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과연 성폭력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그것이 불가능한 유토피아라면, 여기에 다가가기 위한 잠정적 유토피아는 바로 성폭력을 정의롭게 해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성은 개인이 추구하는 자유와 행복의 영역이다. 성윤리, 성적 관용에 대한 태도 역시 개인이나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성적 자유, 성담론의 다양성이 자연스럽고 가치있는 것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프랑스인들은 정치인의 사생활에 관용적인 반면 미국인들은 좀더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는 차이가 뉴욕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획일적인 성윤리나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해 성폭력사건에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획일적인 성윤리는 늘 여성을 억압했으며 엄격한 사법 논리는 도리어 피해자의 입을 막고 은폐와 침묵을 강요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1990년대 반성폭력운동을 반추해본다면, 많은 여성운동단체들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법 제정을 요구하며 성폭력사건 재판에서 피해자 지원활동을 펼쳤다. 말하자면 '사법적' 정의를 요구한 것이다. 1994년 성폭력처벌법, 이어서 1997년에 가정폭력처벌법이 제정된 것은 이러한 운동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법 제정만으로 그들이 꿈꿔온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성운동가들은 체감해야 했다. 성폭력을 피해여성의 책임이자 수치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피해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다. 남성의 공격적인 성행동은 자연스런 본능이며 '이 험한 세상'에서 여성들이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수사와 기소, 판결을 담당한다면, 피해자는 사법적 과정에서 도리어 2차, 3차의 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전 국제통화기금 총재와 부인 ⓒ뉴시스 |
피해여성, 수동적 약자에서 적극적 행위자로
이러한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는 사법적 정의만이 아닌 문화와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발언이 수치심과 고통과 자괴감을 수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피해를 말하는 것이 정당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반성폭력운동가들이 단지 '피해자'가 아닌 '피해-생존자'라는 개념을 주장해온 것도 피해자를 단지 수동적 약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자로 자리매기기 위해서다.
최근 성폭력사건 보도 중 눈에 띄는 몇가지 장면이 있다. 의대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던 한 여대생이 그들에게 성추행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과 출교 조치를 요구하는 시위와 서명운동이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다른 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학생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곧바로 경찰과 대학의 양성평등센터, 여성가족부 성폭력상담소에 신고했으며, 자신이 추행뿐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철저한 수사를 통해 가해자들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한 방송보도에 따르면, 학교 주변에서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추행하던 중년 남성이 삼삼오오 모여든 어린 학생들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고 한다.
성폭력, 아동폭력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정치인들은 전자발찌 착용, 중형 선고, 화학적 거세, 그리고 CCTV 설치 같은 가시적 정책을 앞다투어 주장해왔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하드웨어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문제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담당 인력의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은 성폭력사건 해결에 반드시 필요한 소프트웨어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최신 장비나 하드웨어보다도 이러한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고 또 우선시되어야 한다.
성폭력사건은 스캔들 아닌 정의 실현의 문제
다시 앞의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가해자는 IMF 총재, 피해자는 아프리카 난민 출신의 이주여성이라는 극단적인 권력의 비대칭관계에도 불구하고 미국 검찰은 신속하게 스트로스 칸을 구속했다. 의도적 기획수사가 아니라면, 피해자의 진술에 따른 신속한 조치를 집행한 미국 사법기관의 역량은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이번에는 피해자가 돈 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피해여성과 미국 검찰도 도덕적 비난에 직면해 있다. 이쯤 되면 성폭력사건은 연루되는 것 자체가 '더럽고 추하다'는 한탄이 나올 만하다.
성문화가 개방되고 자유화된 사회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는 새로운 문화적 갈등을 불러온다. 어디까지가 자발적 성이고 어디부터가 강제적 폭력인가를 놓고 상이한 해석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성폭력사건이 괴한이 아닌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며,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 자발성과 폭력성의 경계는 본능과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정의의 기준을 따른다. 남성이 생각하는 성적 자유와 욕망은 여성이 느끼는 그것과 분명히 다를 것이며, 어느 한쪽의 감수성과 기준만을 법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더럽고 추악한' 일이라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성폭력을 에워싼 다양한 주장과 담론, 그 배후에 있음직한 권력관계를 면밀하게 살피고 이치를 따져봐야 한다. 불특정 다수의 욕망을 덧칠하여 사건을 침소봉대하는 스캔들의 과잉도 있을 테고, 빙산의 일각처럼 한 모퉁이만 얼핏 엿보다가 본령은 감추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무한증식하는 가십의 들뜬 열기, 은폐의 압력이 경합을 벌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사건이 대중의 이목에서 사라질 즈음, 진정으로 남는 것은 바로 정의의 문제다. 과연 우리 사회가 앞으로 더이상의 성폭력 피해를 예방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혹시 또 비슷한 폭력이 발생하더라도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하고 가해자나 관련 기관에 마땅한 책임을 묻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개선하고 가다듬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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