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의로, 공개적으로 이뤄진 제안이라는 점에서 파격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제안을 통해 북한은 두 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
첫째는 '남북 핵회담'을 북이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수용함으로써 '남북 수석대표 회담→북미 수석대표 회담→6자 수석대표 회담'으로 이어지는 6자회담 재개 프로세스에 사실상 동의했다. 통상적으로 북이 한반도 평화문제와 핵문제가 북미간의 문제라면서 남북간에 논의되는 것을 극히 꺼려 왔던 점에서 상당한 변화이다.
평양을 다녀온 카터 전 대통령은 "과거 북측과 얘기하면, 핵문제와 관련해서 반드시 미국과만 얘기하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군사적 문제가 됐건 핵문제가 됐건 남측 정부와 직접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라고 북측의 분위기를 전했다.
▲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일 한독 정상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하면 내년 핵안보 정상회의에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
북, 남북 핵회담 수용하고 천안함 사건 사과에는 기존 입장 고수
둘째는 '모든 사안에 대해 사전조건 없이 대화'는 하겠지만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는 북측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과를 표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제가 만난 (북의) 군 관계자나 정치 관계자들은 천안함 사태로 인해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연평도 사건으로 인해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데 대해서는 깊은 유감을 표했다"면서 "깊은 유감을 표하기는 했지만 천안함 사건에 대해 사과하거나 자신들의 개입을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가 요구해왔던 남북간 '비핵화회담'은 수용하고, 천안함 사건 사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은 셈이다.
북한의 제안에 대한 정부의 반응은 5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의 유럽 순방 중에 나왔다. 이 대통령은 9일 오후(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핵 포기 문제에 있어 북이 진정하고 확고하게 포기하겠다는 의견을 국제 사회와 합의한다면 내년 3월 26~27일 제2차 핵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북측의 정상회담 제안은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장소는 서울로, 시점은 3월 핵정상회의 기간에 하자는 제안으로 들린다.
일부에서는 그동안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로 강하게 연계해온 '천안함·연평도 사건'의 굴레를 벗고 우회적으로 사실상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비핵화 트랙을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적극적 해석을 내놓았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도 다자 정상회의에선 통상 중요한 파트너 사이에 양자 정상회담을 하기도 한다며 핵안보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한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비쳤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사과는 (대화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기준"이고, "그렇기 때문에 북이 사과하는 문제는 6자 회담이나 남북(대화) 등 여러 가지에서 기본이다"라며 '천안함·연평도사건 사과'를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북측의 '사전조건 없는 대화'를 거부하고 '선 사과 후 대화'를 촉구한 것이다. 여전히 천안함 사건 사과 문제가 걸림돌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남과 북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수차례 비밀접촉을 통해 천안함 사건 해결방안과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논의했으나 천안함 사건 사과를 둘러싼 해법 도출에는 실패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이 대외적으로 천안함 사건이 자신과 관련이 없는 "모략극"이라고 천명한 조건에서 공식적인 사과 표명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까지 '일관된 원칙'을 내세우며 남북대화와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사과 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해온 우리 정부로서도 천안함 사건을 덮고 가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실제로 정부는 임기 안에 어떤 형식으로든 북한의 사과를 얻어내기 위해 남북교류와 6자회담 재개에 빗장을 걸고 대북압박을 강화해 왔다. 따라서 기대에 못 미친 이 대통령의 베를린 제안으로 남과 북 어느 한쪽이 양보안을 내기 전까지 남북대화는 힘들게 된 셈이다.
"베를린 제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북이 수용할 수도"
그러나 청와대의 기류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북한이 조국평화통일위워회 대변인을 통해 베를린 제안에 거부 입장을 밝힌 후에도 이 대통령은 낙관적 전망을 드러냈다. 이 대통령은 "(북의) 어떤 반응이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며 "부정적으로 나왔다고 해서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고 밝혔다.
청와대의 한 주요 관계자는 "우리가 새롭게 제시한 화두이고 핵안보 회의까지 시간도 많이 남은 만큼 향후 북한과 소통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본다"며 "북한은 우리가 제안한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 간의 직접 대화는 물론이고 한중간의 6자회담에 앞선 사전 접촉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내년 서울 핵정상회의 초청에 대한 우리측의 진의를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식·비공식 채널과 접촉을 통해 북측에 베를린 제의의 진정성을 전달한다면 호응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청와대의 복안은 이런 것 같다.
'핵정상회의가 열리는 내년 3월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그 동안에 여러 가지 정세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북한이 원하고 있는 북미대화나 6자회담은 남북간 6자 수석대표 회담을 해서 비핵화에 합의가 이뤄져야 가능하다. 남북간에 비핵화 합의가 구체적으로 이뤄지면 6자회담에서도 북핵문제에 큰 진전이 이뤄질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김정일 위원장이 내년 3월에 올 수도 있다. 북한은 국제적 안전보장과 경제적 지원 및 협력을 원한다. 북한이 핵 폐기에 나설 경우 정부는 북한의 안전보장을 위해 한반도 평화협정 등을 체결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북한의 3대 세습체제도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복안을 가지고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중국과 협의하고, 북한과도 최고위급차원의 물밑접촉을 시도할 경우 북한이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사과도 결국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구상에는 세 가지 허점이 있다. 첫째는 이 구상은 비핵화와 천안함 사건을 분리해야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는데, 정부가 과연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 통일외교팀의 진용으로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그렇다면 이 구상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지금까지의 비밀접촉에서 넘지 못한 천안함 사건 사과문제가 비핵화회담이 열린다고 해서 해결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 핵정상회의 참석 가능성 없다
둘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정상회의에 참석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지금까지 다자회담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만약 남북간에 논의가 잘 진행되더라도 김 위원장을 대신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나올 것이다. 정부가 이를 수용하더라도 남북 정상회담은 별도 차원의 문제가 된다.
셋째는 미국이 언제까지 '선 남북대화 후 6자회담 개최'라는 정부의 입장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은 로버트 킹 국무부 북 인권특사의 방북 후 적절한 시점에 대북 식량지원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남북대화가 성과를 낼 때까지 마냥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 북한의 남북 정상회담 제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의로 나왔다는 점에서 마지막 대화 제안이 될 것으로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한 대북소식통은 "북측 내부에서 남북대화 회의론 내지 무용론이 확산되고 있다"며 "북측이 먼저 제안한 백두산 화산 전문가 협의나 동해 표기와 관련해 남북 역사학자들이 공동 대처 논의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이 같은 기류와 연관돼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정상회담 제안이 무산될 경우 북한은 대화보다는 다른 선택을 모색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올해 들어와 남북 교류를 담당하는 민족화해협의회의 인원을 반으로 축소하는 등 남북관계 단절이 지속될 경우에도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남북간 비밀접촉을 통해 천안함 사건에 대해 극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한 핵정상회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참석시키겠다는 이 대통령의 구상은 성공할 수 없다.
이럴 경우 핵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내년 4월 총선 때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구상도 흔들리게 된다. 핵정상회의 개최 시기를 3월로 앞당긴 이유는 자명하다. 더구나 남북대화의 파탄은 핵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에도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월부터 미국과 핵정상회의에서 북핵문제를 다루지 않는 방향으로 협의를 하는 등 김정일 위원장의 참석에 공을 들여왔다. 핵정상회의를 앞두고 북한의 긴장고조를 막고, 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대대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빅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산될 경우 정부는 당장 남북관계가 다시 긴장고조 국면으로 빠질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핵정상회의를 앞두고 연평도 포격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 북한은 의도적으로 핵정상회의를 앞두고 핵실험 또는 장거리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다. 내년 봄 핵정상회의의 성공과 총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이래저래 이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역설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청와대의 기류를 잘 아는 한 언론사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핵정상회의의 성공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남북관계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이를 실행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에는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며 "그러나 핵정상회의가 다가올수록 남북대화를 복원하려는 정부 내 대화파에 힘이 실릴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공개적으로 오고가고 있는 남북 사이의 가시 돋친 발언, 남북간 첨예한 입장차 등 현재 조성된 객관적 조건은 회의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남북간 협상여지가 조금은 남아 있는 것이다. 조만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남북 물밑접촉에서 이 대통령이 어떤 카드를 내놓을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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