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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얼' 드러난 '원자력 마피아', 그런데도 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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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생얼' 드러난 '원자력 마피아', 그런데도 한국은…

[기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한국, 일본, 독일을 보며

1.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그 반응

독일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17세기에 시작했고, 19세기에 심화되었으며, 2차 대전 때는 동맹까지 맺은 관계였었다. 19세기 유럽의 신흥강대국으로 등장한 프러시아는 자기를 흠모해 법학, 군사학, 과학, 의학 등 제반 문명과 문화를 영리한 제자처럼 모방하고 배워갔던 일본을 동양의 각 나라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호를 했었고, 그 전통은 오늘의 독일에도 이어져서 독일은 일본을 자기와 각별한 친화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양의 형제국, 엘리트국으로 대접하며 존경하고 있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시 독일 언론들이 연일 "침착하고, 질서있고,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일본인들을 우수한 민족으로 칭찬 묘사하고 부러워하면서 자신들도 이제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며 일본 민족을 신화화시킬 정도로 과대평가한 기사들 속에 잘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일본에서 두 달이 넘은 오늘까지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원전 사고의 처리문제가 지연되면 될수록 정부, 원전업체, 안전기구들에 대한 비판과 항거 없이 그들을 신임하고 고통을 인내하며 모든 것을 숙명으로 여기려는 무비판적인 복종심이 일본 민족성의 또 다른 참 모습인 것과, 원전 사고와 신속한 처리 불능은 현 일본 정권, 원전사업체, 안전기구들이 야쿠자 식으로 야합한 공범의 결과라는 숨겨진 진실이 점차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들의 성급한 판단과 편견적인 시각을 약간은 부끄러워하며 자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몽된 성숙한 민주주의 나라요, 역시 이성적이고 침착하고 우수한 민족이라 자인하면서도 여전히 편견과 선입관과 어리석은 속단에서 자유롭지 못한 독일인들의 참모습을 일본 원전 사고를 통해서 잠시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의식있고 비판적인 지성인들과 언론들은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 뒤에 숨은 인위적인 실책과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 한 마디 반대의 고함도 지르지 않고 모든 것이 숙명이라 생각하고 정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만 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정치의식에 대해서 강한 의혹과 유감을 표명하고 있기도 한다. 지금까지 독일에서 신화가 된 일본인의 상이 이제는 서서히 깨어지기 시작하는 징조가 아닐지?

독일인들에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후쿠시마 사태가 그들의 오랜 쟁점인 핵에너지 포기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정책의 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메르켈 보수정권은 자신의 원전 보유라는 기존 정책을 다시 한 번 바꾸어, 드디어 원전 포기라는 전환정책을 결정하고 그 자세한 백서를 곧 발표할 예정이다.

일본의 인접국인 한국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일본과 독일의 반응에 비해 어떤 반응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원전정책에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일까?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에서 독일과 달리 자유로운지, 나아가서 딴 나라와 딴 민족뿐만 아니라 대체로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자신에게 한번 물어봐야 할 줄 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뿐만 아니라 원전 자체에 대한 일본, 독일, 한국의 인식과 정책 및 그와 결부한 그들의 민족성, 정체성, 그리고 민주주의 현주소에 대해서 냉정히 관찰해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 자신의 보다 나은 장래를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는 기회가 된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 이명박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9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원전에 관해 커다란 견해 차가 드러났다. ⓒ청와대

2. 군주 관료의 나라 일본

일본은 한국처럼 대체에너지 생산 조건의 취약성, 좁은 땅과 인구 과잉, 수출을 통한 신속한 선진국 건설 정책 때문에 원전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라이긴 하다. 그리고 비록 원폭을 받은 과거 역사가 있고, 지진이 잦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해일의 위험이 상주하는 해안에 원전을 설치하는 어리석고 무모한 모험의 배후에는 세계를 선도하는 그들의 과학기술과 안전대비책에 대한 자만심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 지진이라도 몇백년에 한 번쯤 있으리라 계산하고 믿었던 요행과 그들의 신화같은 치밀한 사고 대비책과 고도의 안전기술에 대한 믿음과 장담은 강도 9의 지진과 해일 앞에서 하루아침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정부, 원전업체, 안전기구들이 원전 사고 직후 긴급대처 없이 중요한 시간을 허비했던 이유는 그들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고, 그들 자신들의 각자 이해타산과 서로간에 이해를 중심으로 맺어진 검은 유착관계 때문이었다. 원전업체는 자신들의 원자로 손상을 피하려다가 냉각작업을 지연시켰고, 정부는 자신의 권력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사고의 위험을 축소하거나 사고 발생에 대한 은폐 전략을 펴는 미온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도쿄의 보수 정치가요 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해일과 같은 천재지변은 현대의 개인주의, 물질주의, 배금주의에 내린 신의 천벌이라고 하며 그 죄는 지도자가 아닌 국민이 져야한다는 파렴치하고 위선적인 주장을 했다고 어느 외국기자가 폭로하기도 했다.

신과 같아서 늘 국민과 고고하게 거리를 두는 일본의 왕이 사고 피해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위로하면서 그들에게 희생정신, 순응정신, 감내정신을 발휘하라고 한 간곡한 부탁은 정작은 정부에 순응만 하라는 완곡한 명령에 지나지 않았다.

군주와 관료가 중심이 되어 지배하는 엄격한 위계질서를 하늘처럼 믿고 비판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국민의 복종심은 일본의 오래된 전통이고 미덕이지만,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일본을 지배하는 비민주적인 통치원리이며, 국가와 사회의 질서와 화합만을 위한 개인의 일방적인 포기요 희생을 의미한다. 옳지못한 지도자들은 이런 미덕을 악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그들의 생리가 아닐까? 그들이나 우리들도 학교에서 이 들 사기성 농후한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도구가 바로 민주주의라고 배우지는 않았던가?

잦은 지진에 습관화되어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비록 큰 지진과 해일이 한 도시를 한 순간에 쓸어서 황무지를 만든 것을 보고서도 인간의 차원을 넘는 자연의 재앙과 그 피해는 인간의 숙명이라 보았다. 따라서 저주나 원망이나 탄식 같은 일시적이고 원색적인 감정 반응 대신 침착하고 여유 있는 인간의 드높은 품성과 위엄을 보여준 점은 우리도 배울만한 그들의 장점이요 생활태도임은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진과 해일 1주일 후 일어났던, 인간의 생명을 보다 더 위협하는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의 인위적인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늑장을 부리는 정부의 대처나 그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 자신들의 복종심, 인내심, 숙명론에 때문에 비판과 반대의 규탄 소리 하나 없었던 일본인들의 모습은 일본이 채택하고 있는 사이비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또한 그들은 체르노빌과 맞먹을 만한 대형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전확대 정책을 견지하는 정부에 대해, 비록 소규모의 시위는 있었지만, 거센 반대의 항거 없이 여전히 묵인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4월 23일 일본 총리는 비록 안전점검에 따라 원전증설 포기를 시사하고 있지만,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주장인지 알 수 없으며, 국민의 긍정적인 반응 또한 찾기 힘들 듯 하다.

원전에너지가 쉽사리 대체되기 어렵고 그 폐기가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이 미리 현명하게 잘 알아서 그럴까? 아니면 정부의 원전정책을 무조건 옳다고 믿기 때문일까?

다만 일본 전문가도 아닌 필자의 눈에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당하면서 보여준 일본인들의 태도는 민주시민의 비판과 참여없는, 명령과 복종의 원칙에 바탕을 둔 일본식 민주주의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보여졌을 따름이다. 개몽된 시민들의 비판적인 정치의식과 정치참여가 일본인들에게는 부재하지 않을까 추측하는 필자를 놀라게 할 일본의 숨은 민주시민들이 건재하고 있기를 바란다. 정신대 문제도 독도 문제도 비판적으로 보고 자성도하는 그런 일본 민주시민들 말이다.

3. 민주주의 모범생 독일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독일의 반응과 그들의 원전정책, 그리고 그들의 민주주의는 어떠한지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일본인들이 정부의 즉각적인 대처를 기대하며 침착하고 예의 바르게 기다리고만 있는 동안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일찍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반응을 보이면서 수십만 명이 자국의 원전반대 시위를 벌인 나라는 독일이었다.

나라의 면적이 비슷한 인접국 프랑스는 원전 19개를 소유한 독일과는 달리 58개를 소유하고 있지만, 독일과는 대조적으로 원전 사고나 방사능 위험에 대한 불안감을 독일처럼 그렇게 예민하게 느끼지 않는 낙천적인 나라이다. 일본 역시 55개의 원전을 소유하면서도 지진과 해일에 무심한 채 여전히 해안에 설치할 정도로 원전의 위험에 불감증을 가진 자만심 넘치는 나라이다.

그들 뺨을 칠 정도로 더 대담한 나라는 수많은 사람이 밀집해 사는 좁은 땅에 물경 21개의 원전을 세우고도 모자라서 20년 후에는 35기로 확충해서 원전 의존도를 49%로 늘리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원전 밀집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정부나 국민들이 모두 원전의 위험을 모르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한 채 역시 일본처럼 원전위험 불감증에 걸려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보다도 더 선진국이요, 또한 일본과 인접해 있어서 방사능으로 오염된 바람과 조류가 단시간 안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아니고, 1만km나 떨어져 있는 독일이 마치 자기나라의 사고인 양 반응하면서 원전 산업에 역행을 하는 원전정책 폐기와 대체에너지 정책을 고수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지닌 국민병인 "독일의 공포증(german angst)" 때문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눈앞의 현실이 아닌 이상에 척도를 대는 그들의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이상주의 사고 때문일까?

둘 다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들의 생활 철학과 사고방식을 조금은 체험하면서 확신하고 있는 필자의 좀 더 정확한 대답은, 그들의 지나친 안전제일주의 사고방식에서 찾아 볼 수가 있겠다.

독일인들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안전감각과 그 추구열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강하다. 그들은 민족 특유의 완벽성과 절대성을 백분 발휘해서 안전을 위해서는 모든 아까운 시간, 비싼 재정, 지루할 정도로 주도면밀한 준비와 계획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 앞에서는 지나친 겁쟁이요, 굼뜨고 느린 지각생이며, 행동보다는 말과 이론과 토론을 앞세우는 몽상가들이요 이상주의자라는 주변국들의 비아냥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들을 만큼 안전과 조심에 좀스럽도록 천착을 하고 있다. 그들은 원전의 위험은 전 지구상의 문제이고 수 천년 수 만년 동안 인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86년 체르노빌사고 이후 독일에는 "수퍼 가우"(Super GAU. 초대형 사고)라는 인공단어가 일반 보편명사가 될 정도로 안전의식은 국민들의 뇌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독특하고 예외적인 사고방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는 아마도 그들의 녹생당일 것이다.

지금은 '동맹90/녹색당'이라 칭하는 애초의 서독 녹색당은 1970년대에 68운동과 같은 사회개혁운동에서 싹텄고, 1980년대에 정식 당으로 출발했으며, 1989년 이후 동독의 새로운 당인 동맹90과 합당해서 현재까지 30여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역사를 지녀온 독일의 중요한 정당이다.

젊은 그들은 과거 나치 전범자들을 영입한 보수여당들의 불의와 비리, 비판과 개혁의식 없는 보수정치에 저항하며, 친환경주의, 사회안전과 평화주의, 인권보호와 민주주의 등 새롭고 과격한 강령들을 채택하고 기존 정당과 정치에 반기를 드는 항의 정당으로 출발했다. 전통적으로 보수주의 국가인 독일은 이들을 경원시 내지 백안시해서 처음에는 5%의 지지율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과격정치를 실용정치로 바꾸는 아픈 탈바꿈까지 하면서도 집요하고 끊기있는 정치투쟁을 벌여온 덕택에 그 동안 장관도 배출했고, 사민당과 연정하는 주도 여럿이 되고, 3월 초에는 보수 기민당이 50년 넘게 독점해왔고 독일에서 바이에른주와 함께 가장 부유하고 보수적인 주로 알려진 바덴 뷰르텐베르그의 주지사까지 점령하게 되었으며, 현재 국민의 25%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어 사민당뿐만 아니라 기민-기사 연립당들과도 어께를 나누게 된 대망의 정당이 되었다.

그들 성공의 직접적인 계기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건 같은 우연의 재난들이기도 하지만, 실은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산업, 평화, 에너지부문에 대한 과감한 정책 전환과, 무엇보다도 그 정책에 부여하는 그들의 철학인 지속성(Nachhaltigkeit)에 참다운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파괴, 시민들의 불평등, 소수인의 자본편중, 부패와 비리와 위기를 낳는 빠르고 위험한 경제와 국가성장 대신 느리지만 안전하고 평등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성장과 국가 발전을 선호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변함없고 지속적인 준비와 시계의 톱니바퀴같은 실행이수라는 독일적인 사고방식과 미덕이 그 열쇠가 되었다. 녹색당이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독일인들의 친환경적이고 평화적인 대체에너지의 끈질긴 요구는 급기야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에게 오랫동안 토론되어 오던 독일 핵에너지 정책의 급전환이라는 결정을 강요시켜 주었다.

독일인들은 사회공동생활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자기와 생각이 다른 상대방의 의견을 우선 겉으로는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침 없이, 인내심 있게 들어주면서 서로 논리적이고도 이성적인 대화를 하는 토론 애호 민족이다. 해결의 출구가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분쟁과 분열, 또는 적대관계라는 파탄의 길을 걷지 않고, 서로 간에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 원만한 해결을 추구하던지, 아니면 생각이 다른 이질적인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간다. 따라서 지루한 토론과 대화 때문에 독일은 주위의 다른 나라에 비해 모든 면에서 지각생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덕분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준비를 하고 실수 없이 실행을 할 수 있는 생활 모범생, 민주 모범생이라 칭할 수 있다.

매년 봄 노사와 노임 문제로 데모와 시위가 연중행사처럼 찾아올 때면, 과거의 정치 노장들이 타협 위탁을 받고 중도적인 입장에 서서 밤낮 주야로 밤을 세워가며 의견 조정과 타협과 합의점(Konsens)을 찾은 후 서로 화해를 시켜 해결해 나가는 전통이 있다. 이것은 그들 해당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게도 이익과 평화를 제공하는 성숙하고 현명한 정치문화라 할 수 있겠다.

독일은 또한 이웃 아시아 제 민족들에게 저질렀던 정신대 사건, 남경학살 사건, 생체해부실험 같은 악한 범죄행위에 대해서 사과는 커녕 인정도 하지 않으려는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자기의 점령지였던 폴란드에 과거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죄하고 오늘 까지도 엄청난 전쟁배상을 지불하고 있는 양심적인 국가이다. 1970년 폴란드 유대인 희생탑 앞에서 독일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 무릎을 꿇은 브란트 독일 수상의 유명한 사죄장면은 독일의 정직성, 솔직성, 예의성, 민주성을 표현해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독일인들은 어떤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 치르는 고가의 비용과 시간과 인내의 지루한 과정은 종국에는 오히려 더욱 안전하고 비용이 싸게 먹히고 오래 간다는 간단한 진리를 초등학생처럼 순진하게 믿는 어쩌면 우매한 민족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은 한국과 달리 시행착오는 결코 반복하지 않는 나라다. 라인강을 직선화했다가 손해만 보게 되자, 그 실책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천문학적인 재정을 부어넣어서 다시 재자연화를 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의 합리성과 안전지상주의를 이해하는 한 좋은 예일 것이다. 4대강을 국민의 의견과 전문가들의 참작 없이 미친 듯 숨 가쁘게 추진하는 한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비싼 시행착오를 밥먹듯 하는 어리석은 한국이 배울만하고 본 뜰만한 독일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독일도 어는 나라 못 않게 탈세, 뇌물, 사기, 횡령, 암거래 같은 일반적인 범죄행위가 상존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강한 준법정신과 정직성 때문에 비교적 깨끗하고 안정된 나라로 인정 받고 있다. 다만 강한 자민족 우월심, 외국인 차별정책, 고도의 이중적 성격 등은 특별히 독일의 추악하고 부정적인 단점 들이라 할 수있다.

4. 민주 없는 민주의 나라 한국

근대 산업발전의 세계적 모범생이었던 일본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혼신의 노력을 다 해 짧은 기간에 부유한 선진국 클럽에 도약한 한국은 그 성공의 원인들을 많이 들 수 있겠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원동력을 이룬 원인으로는 아마도 원전에너지 정책을 들 것이다. 소위 값 싸고 풍부한 핵에너지를 추진력으로 삼은 한국은 현재 세계 유수의 수출국가가 되었고, 정부와 국민들은 "단군 이래로" 누리는 경제부국이라는 행복감에 도취되어 자랑스럽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싸다하는 원전가격은 엄청난 핵폐기물 처리비를 제외시킨 기만으로 포장된 위장가격이고, 그 선진 부유국이라는 행복은 초대형 사고나 위험에 대한 안전대책과 안전의식이 부재하고, 절약 검소라는 윤리적인 생활태도를 모르며, 소비와 눈앞의 향락만을 중요시하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행복이다. 사회의 빈곤층, 소외자, 노동자들의 인권, 평등,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배제하기 때문에 복지와 민주가 평행선을 이루지 못하는 파행적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실체 없는, 형식적이고 허상적인 부유와 선진국이라는 환상을 위해서 정부는 모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의문, 이견, 비판과 항의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들을 묵살시키고 국민의 조건 없는 동질화와 총화를 강요한다. 정부와 국민들, 여와 야, 찬성자와 반대자들 간의 소통이 없는 과속 일방통행만이 존재할 뿐이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한국의 정치가 탈분단 시대인 오늘에도 그 유령을 다시 재생시켜 국민들을 내적 외적으로 옥죄이면서 순종만 요구하고 있는 반공법과 꼭 같은 논리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처럼 위험한 후쿠시마 사태를 주시하면서도 수명을 넘긴 위험한 원전의 중단이나 포기, 근본적인 원전폐기, 대체에너지 개발 같은 새롭고 획기적인 정책 대신 기존 원전고수 정책을 펴면서 보다 나은 안전점검과 그 대책만을 세우겠다는 구태의연한 반응만 보여 주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우리는 정부와 해당기관들에게서 과연 철저하고 신중한 원전안전 점검만이라도 기대 할 수가 있고, 그들의 약속이 국민들의 신뢰의 대상이 되어질지 매우 의심스럽다.

허위와 기만을 일삼는 정치가들과 정부를 신뢰하는 국민들의 숫자는 드문 법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당국과 그의 시녀인 언론에만 있고 국민 자신에게는 전혀 없을까? 원전 위험에 대한 거센 반발이나 안전한 대체에너지에 대한 강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고 있는 국민 자신도 일종의 공범자들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원전의 잦은 사고들을 은폐하거나 불투명한 허위 정보만 제공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급급하는 정부와 원전업체와 언론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항의가 없는 한 그 국민은 민주국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소비문화와 자연파괴 사이의 깊은 악의 상관관계를 모르거나 깊은 통찰을 기피하고 현실만족에만 사로잡힌 국민들의 비판없는 자세는 역시 미래한국의 참다운 복지대신 숫자와 형식으로 포장된 사이비 복지를 추구하는 정부의 거짓 정책만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악의 구조를 극복하는 길은 비판적인 시민단체들의 활발한 조직·육성과 왕성한 정치참여일 것이다. 독일이 선진국인 이유는 이런 잘 조직된 수많은 시민단체 들의 끈질긴 고발정신과 비판과 시위에 있으며, 그 시민단체의 비판과 항의에 정부는 가장 예민하게 신경을 쓰고 배려한다는 사실을 한국은 배워야할 줄 안다.

한국의 정부나 국민은 그들 모두가 자랑하는 역동성과 민첩성과 임기응변성을 상징하는 빨리빨리 정신에 도취되어 실수를 많이 저지르고, 그 잦은 실수는 엄청난 재정적 손실을 그들에게 안겨다 준다. 그 손실을 메우는 비용과 진정한 국가발전의 정체와 지체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질 것인가? 정부인가 국민인가? 국민이 지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기에 국민 모두는 이 불을 보듯 뻔한 진리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참다운 정치가들과 정부를 뽑아야하고 뽑은 후에도 늘 감시를 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한국 기장의 고리 원전에 후쿠시마급의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면 한국인의 반응은 어떠할까? 아마도 모든 사람의 입에서는 희생자에 대한 곡성과 해당 정부, 업체, 관청에 대한 원성과 입방아 린치 요구가 하늘을 찌를 것이라 상상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국민은 흥분과 분노와 복수심에만 도취되는 대신 차분히 원전 사고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분석과 그 대처 및 책임 소재를 묻고 집요하고 조직적인 항의운동을 벌이는 이성적인 반응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정부도 한국이 일본처럼 지속적인 대치에너지의 생산조건이 불리하다해서 현재 30%넘는 원전 에너지 의존도를 2030년에는 59%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철폐부터 해야할 줄 안다. 해당 정부, 관청, 기구, 언론들 모두는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진정한 자문 자책과 반성을 해야 할 것이며, 한국의 원전기술이 일본보다 낫다는 자만과 오만심을 버려야 한다. 국민의 안심에만 급급하는 정부는 참다운 안전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고는 아무리 겸손하고 조심해도 모자라는 예측불가능하며 늘 상주하는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친인간적인 기술진화는 불신을 낳기 시작했고, 그 한계에 도달했다. 원자력은 통제불능의 재앙이 이미 된 것을 우리는 보았다. 더구나 남한은 어차피 북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도 대립해있는 위험한 지대가 아닌가? 만약에 원전이 공격의 대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결론적으로 정부와 국민, 핵공학자, 지질, 기상 전문가, 사회경제학자, 환경단체들 모두가 참석해서 뜻과 힘을 모아 추후의 사고 재발에 대한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안전 대책 강구와 미래의 대체에너지 개발이라는 근본적인 의식 전환과 착상부터 이제라도 늦게나마 시작해야 할 최상의 기회가 왔다고 본다.

남한의 정치는 한반도가 반세기가 넘도록 극심하고 지루한 이념전쟁에 옥죄인 외적인 이유 탓이기도 하지만, 생각과 체제가 다른 상대방을 오로지 적이요 원수로만 보고 비방, 욕설, 모욕 행위의 쳇바퀴 속에 자신을 가두고 그들과 함께 이전투구를 하며,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이며 비민주주의적인 대립 사고방식이라는 내적 이유 때문에 가장 미개발 영역으로 전락해 있다. 남과 북의 정권뿐만 아니라 보수와 진보 논객들을 위시해서 수많은 사람들도 이 이분법과 양자택일론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혀서 남을 수용 포용 용서하며 상생 상존하는 사고는 이미 잊었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우리의 적이었던 일본인들이 한국을 경멸의 눈으로 보듯, 우리 자신들도 필리핀이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멸시하거나 인간취급을 하지 않고 있는지 자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후쿠시마 사고시 과거 적의 나라요 독도 문제로 괴롭히는 일본에게 신속하고 즉흥적인 도움과 협조를 제공한 한국의 높은 휴머니즘 정신은 칭찬할 만 하지만, 자국에 있는 자국 또는 제3세계의 약자들에게도 일본인에게처럼 꼭 같은 대우와 예우를 해주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그 반응을 보여준 일본, 독일, 한국 세 나라와 그 들 국민들의 장단점을 단편적으로나마 잠시 살펴보았다.

우리들은 공동체의 질서와 조화, 구성원들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이웃나라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민족사랑은 배움직 하나, 그들의 비민주적인 사고구조는 거부해야 할 것이다.

깊이, 멀리, 철저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생각한 후에야 행동하며, 자연과 환경을 중요시하고, 타인을 존경하는 민주국가 독일에게서는 인권과 민주와 안전의식과 환경보호 사상을 배워야 하리라 믿는다.

깊은 생각에 앞서 빠른 행동을, 남보다는 자신을, 민주와 준법과 공동체, 자연과 미래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위법까지 서슴지 않고 하면서 성급한 선진과 눈앞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이, 질주하는 자신들의 고삐를 잠시 늦추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성하면서, 이웃을 존경하고 배려하는 상생공존의 도를 잠시나마 인식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모든 정치와 국가사업에 투명성과 국민의 의사 반영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성급하게 추진하는 비민주성, 부와 권력과 이익을 혈연, 학연, 지연으로 묶어서 약탈하고 독식하는 부패한 족벌주의와 이기주의, 약자보다 강자의 편을 드는 반 인간성, 불공정성 같은 한국의 악덕과 암 들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한국은 그야말로 참다운 복지국가,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영예를 부끄러움 없이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세계의 부와 기술과 국가 발전도에 한국이 1, 2등을 한다는 랭킹 서열은 한갓 형식적인 숫자놀음일 뿐이다. 부와 민주와 문화가 병행하며 발전 할 때에야 비로소 한국은 진정한 부유 민주 선진국이 될 수가 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전제조건과 자질들인 개인주의, 창조적인 개성력,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정, 자유분방성, 강열한 민족애, 동포애, 평화애 같은 민족성을 소유하며 태어났고, 짧은 근대사에서 식민국, 동학혁명, 6.25 이념전쟁, 독재정치, 민주항쟁, 민주화 운동같 은 귀중한 역사 체험을 몸소 했기에, 혁명 없는 일본이나 독일과는 달리, 진정한 민주주의를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다만 정부와 국민이 민주화 실현을 위해서 자신들부터 자성하고 감히 개혁을 단행하는 일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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