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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아톰'의 자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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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아톰'의 자식들이다

[김성민의 'J미디어'] 원자력과 발전주의, 그 공고한 욕망의 굴레

어린 시절 틈만 나면 '아톰'의 배에서 나오는 바퀴를 굴리며 자란 필자에게 훗날 알게 된 그 사실들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우주소년 아톰>이 일본 만화 <철완 아톰>(鉄腕アトム)이라는 사실과, 그 이름이 방사능 원소 'Atom'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덤으로 아톰의 여동생 '아롱이'의 원래 이름이 '우라늄(ウラン)'이라는 사실까지.

<철완 아톰>이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기 시작한 건 1963년의 일이지만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원작 만화가 코분샤(光文社)의 만화잡지 <소년>(少年)에 정식으로 연재되기 시작한 건 1952년부터였다. 그러니까 '아톰'이 10만 마력의 원자력 모터로 날기 시작한 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불과 5~6년 후의 일인 셈이다.

그때 '아톰'이 상징한 건 무엇이었을까. 원폭의 악몽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50년대에 어떻게 일본 사회는 '원자'라는 이름의 만화 주인공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당시의 일본 사회에서 원자력의 이미지는 그런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폭의 악몽 보다는 눈부신 미래를 보여주는 희망의 상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 지난달 16일 일본 도쿄의 도쿄전력 본사 앞에서 열린 원전 반대 시위 ⓒAP=연합뉴스

후쿠시마 출신의 젊은 사회학자 카이누마 히로시(開沼 博)에 따르면 전후 10여 년은 원자력이 '꿈의 에너지'로 부상한 시기였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이 잇따라 세워졌고 미디어는 앞 다퉈 원자력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홍보했다. 원자력이 도쿄를 중심으로 한 국가 재건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원자력의 지위는 1960~70년대 본격적인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원자력발전소 지역 주민들에게 원자력은 자신들의 마을이 '도시'가 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원자력발전의 위험 요소가 조금씩 인지되기 시작하고 반대파가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누구도 고도성장의 꿈에서 깨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반대파까지 포함된 '원자력 발전'의 공고한 구조가 구축되었다. 발전소와 발전소 주변 지역인 '지방'이 하나의 축이라면, 원자력 행정을 주도하는 국가와 전력회사, 미디어, 반대파 등이 자리한 '중앙'이 또 하나의 축이었다.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립 구조는 논의의 건전성을 담보하는 구성 요소일 뿐 실제 정책에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카이누마는 일본의 원자력 발전 정책은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 두 축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실제 발전소가 존재하는 지역의 현실은 철저하게 은폐, 배제, 고착화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은폐와 배제, 고착화야말로 '일본 고도성장의 에너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성장의 환상'이었다.

실제로 후쿠시마 지역에서 자란 그가 지적하는 것은 지방의 '자발적 복종'이다.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지워진 상황에서 지역 경제는 갈수록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게 되고, 그 속에서 지역 주민들의 입장은 단순히 원자력 발전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고향을 사랑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난 4월 10일에 치러진 '통일 지방선거'의 결과는 원자력 발전의 그 '식민지적 구조'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중심'에서 원자력 발전 반대 집회가 잇따르고 '탈원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정작 원자력발전소 관련 지역인 '지방'에서는 찬성파가 다수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나가 성장을 꿈꾸던 시절, 소형원자로의 에너지로 날아다니는 '아톰'이 보여준 건 '평화적 핵 이용'을 통한 성장의 꿈이었다. 그 사이 아톰은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봇이 되었고 일본은 그토록 꿈꾸던 성장을 이뤘다. 문제는 성장만을 꿈꿔서는 안 되는 지금도 그 시절 그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일본뿐인가. 원자력뿐인가. 4대강은, 뉴타운은, 성장을 쫓아 나는 그 수많은 '아톰'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이 어떻게 은폐되고 배제되고 고착화되고 있는가. 누가 중앙이고 누가 지방인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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