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카터 통해 '남북 정상회담' 제안

남북 비핵화 회담도 사실상 수용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김 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28일 전한 친서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언제든지 만나 모든 주제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난 26일부터 2박 3일간 북한을 방문하고 이날 서울에 온 카터 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이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고 밝혔다.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김 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이 과거에는 핵 문제를 반드시 미국하고만 논의하겠다고 했으나 이번에는 핵 문제든 다른 군사적인 문제든 남한 정부와 직접 논의할 의향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는 북한이 '6자회담 남북 수석대표 회담→북미접촉→6자회담'이라는 6자회담 재개 '3단계안'에 사실상 동의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카터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6자회담 관련국들과 언제든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전제조건 없이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오늘 오전 우리가 머무르고 있던 초대소를 떠나 공항으로 가는 길에 다시 초대소로 돌아오라는 요구를 받았다"면서 "김 위원장으로부터의 개인 메시지를 전달받았고 이를 한국 지도자들에게 전달해달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성 부상은 카터 일행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면서 봉투에서 종이를 꺼내 김 위원장의 친서를 읽어줬다고 그는 소개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어 "향후 상황이 호전돼 이 같은 제안이 한국과 미국, 그리고 6자회담 당사국들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 군부는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민간인이 사망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으나 그에 대해 사과하거나 자신들의 연관성을 인정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 북한에 다녀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8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北, 조만간 남쪽에 직접 제안할 듯

김정일 위원장이 카터를 통해 모종의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있었다. 그러나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카터의 방북은 민간 차원의 활동'이라고 의미를 축소하는 한편, 북한이 남쪽에 제안할 게 있으면 직접 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카터를 통한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을 인정하지 않고, 공식적인 대응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터를 통해 '운을 뗀' 북한이 조만간 비핵화 회담을 직접 제안해 올 경우 정부로서도 거부할 명분이 없다. 남측은 이미 지난 1월 남북 비핵화 회담을 북측에 제안해 놓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여당의 참패로 끝난 4.27 재보선 이후의 남측 정치 상황 등을 보아가며 대남 제안을 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우라늄농축 프로그램(UEP)을 비롯한 모든 핵 활동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 등 '비핵화 사전조치'를 요구하는 남측과, 남북대화를 징검다리로 북미대화·6자회담으로 넘어가려는 북한 사이의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역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카터 전 대통령은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브룬트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등 전직 국가 수반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 3명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서해 직항로 편으로 서울로 내려와 위성락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6자회담 수석대표), 월터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 현인택 통일부 장관 등을 차례로 만났다. 그는 현인택 장관을 만나 김정일 위원장의 메시지를 받은 사실만 언급했을 뿐 친서의 내용은 알리지 않다가 이후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 내용을 밝혔다.

이날 저녁 김성환 외교부 장관이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한 카터 전 대통령은 29일 오전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비공개 회동을 할 예정이다. 작년 8월 방북 당시 북한에 구금된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를 데려왔던 카터는 이번에는 북한에 억류된 한국계 미국인 전용수 씨와 함께 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