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겪는 고초가 어떤 종류이기에 나는 "원래 끝나지 않는다"고 자리매김하는가? 선한 사람이 악한 세상에서 겪는 고초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허위와 가식과 기만에 사로잡힌 자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초이다. 곽노현은 곤경에 빠진 이웃을 외면할 수 없다는 선한 의무를 행했을 뿐이다. 세상에 이런 선행이 애당초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 악랄한 자들은 '대가성'이라는 교묘한 말장난에 스스로 함몰되어 곽노현을 벌했다. 이를 위해서는 그의 행위를 마치 '더러운 거래'인 양 모함하는 조작이 반드시 필요했다. 검찰이 조작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주류 신문사들이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이른바 논객이니 평론가니 하는 인물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상황의 진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들 자기가 진상을 말하고 있다고 여겼을지는 모르지만, 착각과 자기기만에 빠졌을 뿐이다. 검찰과 주류 신문사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선거로 뽑힌 '진보' 교육감을 몰아내는 동시에 선거제도 자체에 대한 냉소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상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아가기 위해 어떤 소재를 어떻게 짜깁기할 것이냐 하는 조작의 기술이었다. 악랄한 의도를 품은 보도가 일단 시작되자 순진한 추종자들이 덩달아 입에 거품을 물고 나섰다. 사태의 진상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이 단순히 주류 신문사들이 만들어낸 일방적인 이미지에 반응하며 곽노현을 파렴치범으로 몰았다. 기껏 점잖다는 축마저 '진보'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힌 배신행위라는 투의 매도를 서슴지 않았다.
▲ 검찰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곽노현 교육감의 모습. ⓒ연합뉴스 |
입방아꾼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얼마나 경박한지는 재판이 시작하기 전에 그토록 무성하던 논객들의 매도가 막상 법정 공방이 시작된 후에는 사그라졌다는 데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사건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어야 한다. 법정 공방전에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가 공판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드러난 후에 왈가왈부를 시작해야 정상인 것이다. 심판하려는 대상이 누구이든, 정죄하려는 행위가 무엇이든, 판단에 앞서 진상 확인이 필수적 선결 요건이라는 점은 모든 도덕에 우선하는 근본적인 이치이다.
더군다나 곽노현 사건은 1심 재판부가 200여 시간의 사실 심리를 통해 더 이상 궁금할 대목이 없도록 진상을 낱낱이 밝혀놓았다. 도덕이나 정의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판 기록을 확인해 보고, 그 결과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결론과 종전에 언론보도만 보고 내뱉었던 말을 대조해 봤어야 한다. 종전에 추측만 가지고 했던 말이 밝혀진 실체적 진실로 강화된다고 생각되면 목청을 드높이고, 그 반대라면 반성문을 썼어야 한다. 곽노현을 매도한 사람 중에 공판 기록을 보고 나서 목청을 드높인 사람도 반성문을 쓴 사람도 전혀 없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논객이라는 자들이 그저 허명(虛名)만 쫓아다니는 경박하고 무책임한 하루살이임을 이보다 확실하게 보여줄 수는 없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수로 분류되든 진보로 분류되든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파와 진보파가 서로 목청을 높일수록 세상이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싸움판이 벌어질 뿐이다. 왜 그럴까? 무엇을 두고 싸우는지 쟁점의 진상을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 진상을 확인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진상에 투사하고 말기 때문이다. 곽노현은 한국 사회의 실제 모습이 이처럼 경망스럽고 엉터리임을 우리 모두에게 알려줬다.
근대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구성되는 특징을 지닌다. 다양한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진실뿐이다. 그래서 근대 사회는 진실을 공적인 공간에서 확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사법부가 그러한 장치를 대표하지만, 사법부의 차원을 넘는 특별한 사안에 관해서는 의회가 나서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사법부가 나서든 의회가 나서든, 진상이라는 것은 항상 발굴된 다음에 일정한 정치적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결과에 대한 고려가 진상의 발굴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곽노현 사건의 경우에는 진상은 충분히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리의 적용이 뒤죽박죽으로 되는 바람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처벌하는 어이없는 사태로 일단 귀결되었다. 다만 한국 사법부의 이러한 실상이 곽노현 덕분에 더욱 분명하게 알려진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곽노현이 문자 그대로 선행을 베풀었는데도 그를 정죄한 사법부가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것일까? 결정적인 이유는 인민 다수가 법을 사법고시 출신들에게 방치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은 인민적 합의의 결정체로서 결코 사법공무원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독재의 전통이 오래 지속된 사회에서 인민이 법을 사법공무원에게 사유하도록 방치하게 되면, 결국 법은 권력의 시녀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관료와 군부와 재벌의 이익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기극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법학 교수 출신인 곽노현에 대해 법정이 강요한 불의를 통해 우리는 이 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회고해 보면, 2011년에 한국 정치의 큰 물결을 불러일으킨 계기에 곽노현이 있었다. 곽노현의 무상급식 정책을 방해하려고 오세훈은 주민투표를 강행했고, 거기서 자신의 뜻이 무산되자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때문에 박원순과 안철수라는 참신한 신인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그들로 말미암아 변화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일어났다.
보수 세력은 이러한 흐름을 차단하는 관건이 곽노현이라고 보고, 오세훈이 물러난 바로 그날 저녁에 그의 '혐의'를 언론에 흘렸다. 안철수의 '통 큰' 양보에 이어 박원순이 당선된 결과에 진보 세력이 도취해 있는 사이에 곽노현은 1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 문제를 사법개혁의 의제로 부각시키지 못한 진보 진영은 결국 2012년 4월 총선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총선이 끝난 직후에 항소심은 그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곽노현이 이런 일들을 미리 내다봤을 리는 당연히 없지만, 개인의 의도나 기획과는 상관없이 2011년부터 전개된 한국 정치의 흐름 한 갈래는 곽노현이라는 인물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가 교육감으로서 추구한 목표를 둘러싼 갈등으로 말미암아 서울시장이 바뀌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실시됨으로써 변화를 원하는 민중의 요구와 기대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의 진실을 진보 진영이 소홀히 다룬 일과 총선 패배가 겹쳐서 전개된 것이다.
곽노현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국 정치에서 영웅의 출현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의 역할이 줄어들수록 정치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인의 진실을 중시하는 사람은 늘어나기를 바란다. 특히 사회의 진보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개개인의 진실에 주목하는 섬세한 지성을 갖춰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섬세한 지성이 갖춰져야 공동체의 건강에 기여하는 법과 법을 빙자한 권력의 횡포를 분간할 수 있다. 곽노현을 통해 우리는 이 당연한 이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가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려면, 선행이 표창까지는 받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탄압만은 받지 말아야 한다. 어떤 행위가 선행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다음이라면 아무리 악랄한 권력이라도 탄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악랄한 권력이 선행을 탄압할 때에는 항상 그 행위를 선행이 아닌 다른 것으로 둔갑시키는 조작이 선행한다. 곽노현의 선행을 탄압하기 위해 한국을 지배하는 권력은 그것을 더러운 돈거래로 조작해내야만 했다. 권력이 그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반 시민 가운데 다수, 특히 지식인입네 행세하는 논객들 다수가 이 조작에, 혹자는 알면서 혹자는 몰라서, 동조했다는 사실이 있다. 이런 식의 무분별한 행태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진보의 희망은 없다. 곽노현은 이러한 아픈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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