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마일 에트만 이집트군 대변인은 31일(현지시간) 국영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이집트 국민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legitimacy)"이라며 "군은 이집트 국민에 대해 무력을 사용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트만 대변인은 "평화로운 표현의 자유가 모두에게 보장돼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어 시위대를 향해서도 "시위대는 국가 안보를 불안하게 하거나 재산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집트 시민들과 내외신은 군이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시민들 사이에서 시민들을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AP> 통신은 시위가 무바라크 정권의 붕괴를 가져올지라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사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이날 성명은 시위대가 1일 총파업과 '백만인 행진'을 추진하는 가운데 나왔다. 31일 카이로 시내 타흐리르(자유) 광장 시위에서는 '군은 이집트와 무바라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구호가 쓰여진 플래카드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 광장에는 이날도 1만명 이상이 모이는 등 시위가 계속됐다.
▲ 정국의 '열쇠'로 평가받는 이집트 군은 과연 시민 편에 설 것인가? 지난 30일 탱크 위에 선 이집트 군인이 시위대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뉴시스 |
시위대 "1일부터 총파업, '백만인 행진' 열겠다"
시위 조직책인 에이드 모하메드는 이날 프랑스 <AFP> 통신에 "주요 도시에서 1일 백만인 행진을 벌이고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파업은 운하도시인 수에즈의 노동자들이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다른 시위 조직책 모하메드 와케드는 "수에즈 운하 노동자와 합류해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총파업을 벌이겠다"고 이 통신에 전했다.
파업 계획이 현실화될 경우 이는 무바라크 정권에 무시못할 압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에즈 운하는 단지 이집트 경제뿐 아니라 세계 물류 운송의 '목줄'이기 때문. 특히 하루에 200만 배럴에 가까운 원유가 이 운하를 거쳐 중동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있어 원유값 상승 등 세계 경제에도 적잖은 파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백만인 행진'에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과 최대 야권 조직 무슬림형제단도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 시위대는 정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하기 위해 엘바라데이 총장과 무슬림형제단이 포함된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날 엘바라데이는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난다면 임시 대통령직을 맡을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자신은 이집트 국민들의 바람을 배반할 수 없다며 "(국민이 원한다면) 권위주의 체제를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무바라크 대통령은 며칠 내로 이집트를 떠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도 "무바라크!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구호를 외쳤다.
이집트 정부는 '백만인 행진'에 대한 대비로 이날 철도 운행을 전면 중단시켰다. 통금령이 4일째 유지됐으며,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로 연장된 통금 시간이 이날부터는 오후 3시부터로 또 한 시간 연장됐다. 인터넷 연결도 4일째 불통됐다.
또 이집트 당국은 시위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던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 소속 기자 6명을 체포해 한동안 구금하기도 했다. 당국은 30일 이 방송의 카이로 지국을 폐쇄하고 방송 면허를 취소한 바 있다.
31일 현재 정부가 집계한 공식 사망자 수는 97명이며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한다. 그러나 병원 관계자 등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언론사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는 훨씬 많다. <알자지라>는 30일 사망자가 이미 150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혼란을 틈탄 약탈 행위 사례도 계속 보고됐다. 군은 이집트의 자랑인 국립박물관에서 유물을 훔치려 한 사람 50명을 체포했다. 유서깊은 도시 룩소르의 유명한 관광지 카르낙 신전 앞 기념품(골동품) 가게를 털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AP>는 전했다.
무바라크 정권 연장 안간힘 "개혁하겠다"
이날 무바라크 대통령은 지난 29일 내각을 해산한 지 이틀 만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등 일종의 정치개혁 조치를 발표했지만 민심을 달래기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개각 조치가 과연 '개혁'인지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마르 술레이만 신임 부통령은 31일 밤 국영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오늘 무바라크 대통령이 저에게 모든 정치 세력과 즉각 대화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며 개헌 등 정치개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또 이집트 국영 방송은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시민들의 불만을 샀던 하비브 알-이들리 내무장관이 물러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시위대는 진압에 격분해 내무부 건물에 방화를 시도한 적도 있다. 또 재무장관에는 사미르 모하메드 라드완이, 무역장관에는 사미하 파우지 이브라힘이 각각 임명됐다.
그러나 알-이들리 전 내무장관의 뒤를 이을 것으로 알려진 마흐무드 와그디는 육군 장성 출신으로 경찰청장과 교도소장을 역임했다. 또 무바라크 정부의 핵심인 모하메드 탄타위 국방장관과 아흐메드 아불 가이트 외무장관은 유임됐다. 특히 탄타위 장관은 부총리를 겸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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