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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의 비명이 꽃피는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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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의 비명이 꽃피는 봄입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18> "4·3 겪은 제주가 2차 피해를 보고 있다"

"이 자의 두뇌를 20년간 멈추어야 한다"는 유명한 판결문과 함께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이 유명한 경구는 로맹 롤랑의 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그람시가 요약한 것입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600명이 넘는 주민, 평화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 투옥, 벌금 사태 뒤에는 불법 공사 상황이 있습니다. 주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강제 과정, 전쟁을 도발하는 안보 기지, 민군복합항이 입증되지 않은 설계도, 환경 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공사, 인권 유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 요인에 대해 제주 도지사를 중심으로 제주 주요 언론은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해 왔습니다.

제주해군기지는 미국 해군의 설계 요구에 의해 미군 핵 항모가 입항할 규모로 설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2012년 9월, 장하나 국회의원이 밝혀냈습니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과 작가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 대정, 세화 성산에 공군기지가, 산방산에 해병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들으며 제주도가 최전선화되는 것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한민국 곳곳의 요지를 미군에 내어준 형편임에도, 비무장 평화의 섬 한 곳 확보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조국은 무력한 나라인가에 대해 다만 슬퍼합니다.

군함에 의해 오염될 서귀포 바다와 기지촌으로 전락할 제주도의 고운 마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제주도민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구럼비의 비명이 꽃피는 봄입니다

오래전 후배 시인이 제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난생처음 제주에 간 시인 부부는 이국적 분위기에 젖어 이곳저곳 여행을 즐겼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제주 토박이 지식인으로부터 실로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실로 충격? 아마 이 글을 읽는 제주도민들은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가 들은 것은 4.3항쟁의 진실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시작돼 대략 한 해 동안 제주도민 1/3 가까이가 학살을 당했다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시인이 알고 있던 4.3항쟁은 '일부 극렬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정부가 진압했다'는 국정교과서 내용이 전부였으니까요.

그 뒤 시인 부부의 신혼여행은 엉망이 됐습니다. 여행은 중단되고, 시인은 술독에 빠져 있다 겨우 육지로 돌아왔다고 시인의 아내는 말합니다. 시인은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이어서일까요. 타자의 상처에 더 예민했던 시인에게, 신혼여행 길에 알게 된 4.3항쟁의 고통과 상처는 평생의 문학적 짐이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몇 년 전부터 강정이 밟혔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제주도와 숲과 바닷물과 구럼비는 4.3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제주'가 2차 피해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시와 산문으로 강정의 고통과 상처를 알리고 몸을 부려 캠페인에 참가합니다. 강정이 고통을 외치면서 그의 영혼 역시 아프기 시작했던 거지요. 그가 강정을 그대로 놔두라고 외치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몸부림입니다.

ⓒ노순택

시인에게 제주는 화약고가 돼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의 눈에는 핵잠수함과 대형 군함이 들락거리면서 가끔씩 오가는 크루즈선은 '위장 평화선'입니다. 그러니 미항과 군항이 동거하고, 군함과 크루즈선이 나란히 떠 있는 군사적 형용모순의 미래를 단호하게 거부해야지요. 강정이 군사 목적의 천혜의 군항이라는 말은 화약고의 다른 말입니다. 화약고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 또 다른 '기억의 정치'를 불러낼 수도 있습니다. 4.3항쟁 이후 제주는 오랜 세월 우리 안의 게토였고, 왕따와 이지메의 대상이었습니다. 한때 육지의 미디어들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다면서도 언제나 '제주도는 제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민이 아니었던 걸까요.

'강정'은 중국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설득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특히 한국 정부의 섣부른 판단은 정말 뼈아픕니다. 강정에 대형 군항이 들어서고 미국의 항공모함이 들락날락하는데 중국은 팔짱 끼고 있을까요? 한미동맹으로서 군사 협력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한·중 간 경제 협력 규모가 한·미 간의 규모를 추월할 정도로 현실은 바뀌었습니다. 세계 질서 역시 미·중 양극체제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멀어지자는 게 아닙니다. 미국과 중국의 국가 이익이 부딪치는 동북아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인 한국 정부가 새로운 중립적 균형추 역할을 하자는 것이지요.

제주는 갈등과 전쟁을 부르는 곳이 아니라, 화해와 공생을 부르는 평화의 섬으로 남아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의 위성들이 핵잠수함과 같은 무기 체계가 작전을 벌이는 제주를 정기적으로 위성 스캔을 하는 순간 평화는 사라집니다. 4.3 발포를 명령한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의도한 오판'이 생각납니다. 제주는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다의 화약고가 돼서는 안 됩니다. 4.3의 비극을 위령하고 평화를 만드는 섬이어야 합니다. 지난 백 년의 모든 대립과 갈등을 뛰어넘어 평화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강정과 제주는 오키나와나 괌 등지에서 장기 파견 근무 중인 미국인들이 피로와 긴장을 풀고 치유하는 곳이면 충분합니다. 4.3이나 노근리 학살 같은 잘못된 판단으로 수많은 양민을 희생시킨 잘못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유달리 제주도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주는 중국 위성이 정기적으로 감시해야 될 적의 군사기지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제주는 달콤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존경받는 섬이어야 합니다. 주먹 쥐고, 총 들고 들여다보는 섬이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지금 제주의 모든 아픔을 당신의 몸 안에 받아들여 앓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도민들의 희망과 나무들과 바람과 바닷물의 영령들이 시인의 영혼을 빌려 한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제주는 시의 나라가 돼 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평화를 노래하는 시인 공화국입니다. 시인들이 구럼비의 비명을 자기 가슴에 꽂듯, 제주 자연이 외치는 외마디가 제주도민들의 영혼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부디 바라건대, 저 시인들의 나라에서 불면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돌과 나무와 바람과 바닷물이 한꺼번에 소리 지르는 일만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고광헌

시인이자 평론가.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시인>지 추천으로 등단. 시집 <시간은 무겁다>(창작과비평사 펴냄), <신중산층교실에서>(청사 펴냄), 평론집 <스포츠와 정치>(푸른나무 펴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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