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바자 튀니지 국회의장은 15일 대통령직에서 퇴임하고 국외로 탈출한 벤 알리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할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메바자 임시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한 뒤 모하메드 간누치 총리에게 연립 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메바자 대통령은 또 TV로 방영된 첫 연설에서 야당을 포함한 모든 정파가 예외 없이 국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간누치 총리가 주도해 새로 구성하고 있는 연립 정부에는 기존 정부에 대한 반대파들까지 포함될 계획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튀니지 혁명 불씨는 한 대졸 노점상의 분신
1987년부터 계속된 벤 알리 대통령의 독재 등 정치 문제와 높은 실업률, 물가 상승 등 경제 문제에 대한 튀니지 국민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은 한 청년의 죽음.
튀니지 중부에 있는 소도시 시디 부지드에 살던 모하메드 부아지지(26)는 대학 졸업자였으나 일자리가 없어 무허가로 과일 노점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다 지난달 17일 경찰의 단속에 걸려 과일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유일한 수입원이던 노점상을 할 수 없게 됐다.
시청 당국을 찾아가 민원을 제기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부아지지는 시 청사 앞 도로에서 휘발유를 온몸에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이번달 4일 사망했다. 이 소식으로 실업과 고물가로 시달리던 튀니지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곳곳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를 테러로 규정짓고 실탄 사격 발포 등 강경한 수단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늘어나자 시위는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졌다. 튀니지 정부는 23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시민단체들은 경찰이 강경대응으로 모두 66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독일 <DPA>통신은 지난 10일 정부는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경찰 총격으로 발생한 사망자는 13명이 13일에도 사망한 이른다고 전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민심 수습을 위해 13일 2014년 차기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이어 내각을 해산하고 6개월 안에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14일 그는 퇴임 의사를 밝히고 간누치 총리를 후임자로 지명한 후 사우디아라비아 망명길에 올랐다.
▲ 지난 14일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벤 알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사위대들이 집회를 벌이고 있다. ⓒ뉴시스 |
튀니지 혁명의 배경
이번 사건의 배경으로는 벤 알리 대통령의 장기 독재와 경제적 불안 등이 꼽힌다. 벤 알리 대통령은 1987년 당시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을 무혈 쿠데타로 축출한 뒤 대통령직에 올랐다. 무혈 쿠데타의 명분은 부르기바 대통령이 30년간 장기 독재를 펴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종신 임기를 보장한 헌법을 쿠데타 직후인 1988년 뜯어고쳐, 대통령 임기는 5년, 연임은 최대 2회로 제한하는 개헌을 실행했다.
그러나 권좌에 오른 벤 알리 대통령도 결과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헌법에 허용된 연임 횟수를 점진적으로 연장했다. 3선 임기 중이던 2002년 4선 연임을 위해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2009년에는 5선에 성공했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국가 경제 운영에는 상당한 성과를 보였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는 무시돼 국민들은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국제 언론 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WB)는 튀니지의 언론 자유 지수를 조사 대상 178개국 중 164위로 선정했다. 또 이 단체는 "튀니지는 매우 효율적인 검열 시스템을 갖고 있다"며 '인터넷의 적 15개국'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튀니지의 높은 청년실업률을 이번 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다. 미국 <CNN>방송은 "공식적으로 실업률은 13%이지만 분석가들은 청년층의 실업률은 더 높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대학 졸업자들도 할 일이 없어 머슴과 같은(menial)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중동 전문가인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교수도 "튀니지 정부가 발표하는 통계는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며 "실제로 실업률은 30% 전후가 될 것이며, 이에 대해 튀니지 국민들은 상당히 불만이 고조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 뒤 튀니지…일부 혼란 속 새 선거 준비
국제사회는 튀니지 국민들의 주권을 존중한다면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마이크 해머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벤 알리 대통령의 출국 소식을 접한 직후 "우리는 튀니지 국민에게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다"며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랍연맹은 이날 성명을 통해 튀니지의 모든 정파와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힘을 합쳐 국가적 화합을 이끌어내 달라고 촉구했다.
현재 튀니지는 새로이 치를 선거를 준비하며 사태 안정을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의 헌법 관련 최고기구인 헌법위원회는 15일 벤 알리 대통령의 축출을 공식화하고, 임시 대통령직은 헌법에 따라 국회의장이 맡도록 돼 있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위원회는 또 앞으로 45∼60일 내에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부에서 혼란을 틈타 방화와 약탈 등이 저질러지고 있다고 <AP>, <BBC>등 외신들은 전했다. 벤 알리 대통령의 퇴진 시위가 벌어진 수도 튀니스에서는 중앙역 청사가 불에 타고 시내에 있는 대형 할인매장과 상점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기도 했다.
또 튀니지 동부의 휴양도시 모나스티르에 있는 교도소에서는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재소자 50여명이 불에 타 숨지거나 탈옥을 시도하던 중 교도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DPA> 통신이 전했다. 일부 재소자는 화재를 틈타 교도소를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전망과 관련해 서정민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튀니지는 지중해권에 있으며 아랍 국가들 중에서는 시민의식이 높은 편"이라며 "간누치 총리가 기존 기득권 세력 중심으로 연정을 구성한다면 국민들이 반발해 정정 상황이 불안정해질 것"이라고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말했다.
서 교수는 "이미 대통령을 한 번 몰아낸 경험이 있는 국민들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 사람이 전면에 나설 경우 반발이 클 것"이라며 "상황 안정을 위해 투입된 군이 얼마나 통제권을 회복할 것인지도 하나의 변수"라고 내다봤다. 그는 최대한 빨리 선거를 치르는 것이 상황을 안정시키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최루탄 연기 속에서 시위대들이 진압 경찰에 투석전으로 맞서고 있다. ⓒ프레시안 |
'트위터, 페이스북, 위키리크스가 이끈 혁명?'
한편 이번 시위 과정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의 역할도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BBC>방송은 14일 "그간 튀니지에서는 정부에 항의하는 비디오와 트위터 메시지, 정치적 선언을 담은 인터넷 게시물들이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 등 다양한 언어로 꾸준히 올라왔다"며 "이중 몇몇은 해외에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이 나라 안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튀니지 여성은 <BBC>에 "트위터 이용자들이나 블로거들은 단지 시위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며 퍼뜨리는 수준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해 사진과 비디오로 시위를 생중계하는 데까지 발전했다"고 말했다. 방송은 이 나라에서 인터넷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이유로 높은 인터넷 보급율을 들었다. 약 1000만 명인 튀니지 인구의 34%가 인터넷 접속을 할 수 있으며, 2백만 명이 페이스북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주변 어느 나라보다 높은 비율이다.
미국 <CNN> 방송도 13일 기사 '튀니지의 시위는 SNS에서 동력을 공급받고 있다'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중심이 된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시위가 조직되고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특이한(unusual) 점"이라고 전했다. 지난 12일에는 '유튜브'에 수백명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스팍스 시내에서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충돌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고 <CNN>은 전했다. 유튜브는 튀니지 당국에 의해 2007년 금지된 사이트라고 방송은 덧붙였다.
한편 대통령 일가의 부패와 무능을 폭로한 위키리크스 전문 폭로도 이번 시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위키리크스가 입수, 폭로한 이들 전문은 이 나라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만든 '튀니리크스'에 게시됐다. 사회 지도층의 부패는 일반 국민들의 '먹고 살기 힘든' 상황과 대비되며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현지 누리꾼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져 정부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2009년 7월 작성된 미 국무부 전문은 벤 알리 대통령의 사위 사헤르 알-마테리가 로버트 고덱 주 튀니지 미국 대사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덱 대사는 이때 알-마테리가 "식사를 마친 후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과 프랑스에서부터 비행기로 공수한 얼린 요구르트, 과일과 초콜릿 케이크를 내놓았다"며 이 집에는 온갖 고대 유물과 애완용 호랑이까지 두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는 "그들의 행동을 보면 튀니지 국민이 벤 알리 대통령 일가를 좋아하지 않고 일부는 증오하기까지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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