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와중에 북한이 최근 방북한 미국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를 통해 강력한 대화 신호를 보내 주목을 끌고 있다. 리처드슨과 함께 방북한 미국 <CNN> 방송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북한은 영변 우라늄 농축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 활동 및 미사용 핵연료봉을 남한 등 외부로 판매하는 방안도 수용할 뜻이 있다고 한다. 동시에 한반도의 군사 문제를 논의할 남-북-미 3자간 군사위원회 설치 및 남북한 군사 직통전화(핫라인) 재가동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남-북-미 3자 군사위원회 창설은 서해상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논의할 수 있는 중추 기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사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적대감이 커진 남북한 양자 대화보다는 미국, 필요하다면 중국까지 포함한 다자 대화가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자 대화를 통해 "문제의 근원인" 서해 경계선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울러 "미국은 한국의 정치나 정책의 볼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북미 직접대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싸늘한 MB 정부의 반응
그러나 한국 정부의 반응은 싸늘하고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담하다. <연합뉴스> 12월 21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핵 사찰단 복귀 허용방침을 밝힌데 대해 "자신들의 핵 개발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속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짜 사찰을 받으려면 그 전에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다시 들어와야 하며 NPT에 돌아오려면 모든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철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NPT 복귀는 가장 높은 수준의 요구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이 관계자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의 전향적인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대북강경책이 계속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북한의 미사용 핵 연료봉 해외 판매 제안에 대해서도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다. "미사용 연료봉은 농축 이전단계의 재료여서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으며 더욱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까지 공개한 마당에 실질적으로도 쓸모없는 카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은 돈이 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의 입장에 대한 미국 정부의 평가는 냉담하면서도 한국 정부보다는 전향적이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리처드슨 주지사가 귀국하면 자세한 얘기를 청취한 이후에야 입장을 내놓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북한이 핵 사찰단 복귀를 수용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긍정적인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핵 개발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이라는 MB 정부의 평가보다는 긍정적인 해석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크롤리는 "미국은 북한의 말이 아닌 행동에 따라 대북정책을 정할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북한의 제안, 가볍게 넘길 일 아니다
MB 정부는 북한의 제안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지만,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소지도 크다. 우선 북한의 이번 제안은 대부분의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느닷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IAEA 사찰단 수용 의사를 밝힌 것은 12월 9일 중국의 다이빙궈 국무위원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이미 나왔었다. 이는 남한이 연평도 사격훈련 일정을 발표한 것보다 1주일 앞선 시점이다. 북한도 나름대로 6자회담 재개를 희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사용 연료봉의 해외판매 입장도 변화 징후를 보이고 있는 북한의 핵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지난 11월 상순에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고 와 이를 세상에 알린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의 방북 보고서를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당시 국내외 대다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핵폭탄 제조용'이라고 단정지었지만, 정작 헤커 박사는 "북한의 군사적 능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것보다는 주로 민수용 핵 발전을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면서, 플루토늄 핵 프로그램과 관련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그는 "5메가와트(MWe) 원자로는 가동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며, 이를 재가동하는 데에는 6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상당 부분 공기(工期)가 진척되었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건설 중단된 50MWe 원자로는 "대형 크레인에 의해 해체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헤커 박사는 2006년 방북 때에는 북한이 50MWe 원자로 재공사에 착수했다며, 2∼3년 이내에 완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그는 올해 11월 자신이 목격하고 온 것을 종합해볼 때, "북한은 분명히 현 시점에서는 더 많은 플루토늄이나 플루토늄 핵폭탄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결론지었다. 국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를 주목하지 않았지만, 북한이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포기한다면 이는 북한이 매년 10여개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북한이 밝힌 미사용 연료봉의 해외판매 의사는 헤커 박사의 분석을 강력히 뒷받침해준다. 미사용 연료봉은 5MWe 원자로나 50MWe 원자로가 완공된다면 사용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연료봉의 해외판매는 북한이 더 이상 이들 원자로를 가동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제안을 적극 검토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IAEA 사찰단의 감시가 없는 상태에서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 핵 연료봉 생산을 위한 '저농축'인지, 핵무기 제조용 '고농축'인지 알 길이 없게 된다. 또한 미사용 연료봉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북한은 언제든 흑연감속로를 가동해 추가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게 된다.
▲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채택한 6자회담 당사국 대표들이 회담 직후 손을 맞잡고 회담 성공을 축하하고 있다. ⓒ연합뉴스 |
6자회담 재개,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6자회담을 조속히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북핵 문제 이외에도 한국 입장에서 6자회담의 재개 유용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우선 6자회담은 북한의 추가적인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외교적 수단'이다. 대화가 재개된 상황에서 북한이 또 다시 연평도 포격과 같은 공격 행위를 벌인다면, 강력한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할 것이다. 6자회담 자제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외교적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강경 입장으로 공전하고 있는 6자회담을 재개할 경우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MB 정부가 사활적인 이해가 걸려 있다고 주장해온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위해서는 이들 나라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대중, 대러 관계의 복원은 시급히 요청된다. 거꾸로 MB 정부가 각국의 대화 재개 노력을 거부하면서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할 경우 중국과 러시아의 '북한 편들기'도 강해질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정학적으로 한-미-일의 대북강경책은 북-중-러의 결속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6자회담 재개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가늠해보고, 추가적인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국제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으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1석3조의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 MB 정부가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보면서 6자회담 재개에 동의해야 할 까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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