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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

[한윤수의 '오랑캐꽃']<302>

한국으로 시집온 태국인 위라이(가명)는 노동자 겸 통역이다.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하지만, 격주 일요일마다 우리 센터에 나와 통역을 해준다.
그녀는 상냥하고 인사성도 밝다.
태국 친정에 다녀올 때는 코끼리를 수놓은 예쁜 편지꽂이를 우리 센터에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뜻밖의 행동을 할 줄이야.

▲ 화성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통역 일을 하는 태국인 위라이(가명)가 친정에 다녀와 센터에 선물한 예쁜 편지꽂이. ⓒ한윤수
나는 매일 아침 5시에 산에 올랐다가 8시경에 내려온다.
8시경이면 노동자들의 출근시간.
내려오는 지점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여기서 아는 얼굴을 만날 때가 많다.

금요일 아침 8시.
산에서 내려와 횡단보도에 서있는데, 건너편 골목에서 흰색 티코가 나오더니 횡단보도 맞은편에 선다. 운전석에는 한국 남자, 그 옆 자리에 앉은 여자는 분명히 위라이다. 아마도 남편 차를 타고 출근하는 모양이다.
파란 불이 켜지자 티코는 좌회전하려고 내 쪽으로 서서히 건너온다. 내가 반가워 손을 들자, 위라이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키를 낮춰 차창 밑으로 숨었다.
순간 아연했지만 사정을 이해했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외간 남자와 인사하는 걸 꺼릴 수도 있으니까.

일요일 아침.
센터에 나온 위라이가 반갑게 인사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안에서는 저렇게 인사 잘하는데, 왜 밖에선 모르는 체할까?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 8시.
산에서 내려오다 보니 버스 정류장에 위라이가 서있다.
이번엔 옆에 남편도 없으니 설마 아는 체 하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나를 본 위라이가 고개를 싹 돌린다.
"또 저러네!"
소리가 나오는 순간,
버스가 와서 위라이를 싣고 가버렸다.

분하고 섭섭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왜 나를 모르는 체할까? 생각해보니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여성들은 나이 많은 남편과 산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인사하는 것조차 꺼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직장 동료이자 상사인 나를 모른 체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그 다음 일요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위라이와 또 만났다.
나는 단단히 마음먹고 그녀를 롯데리아로 불러냈다.
"왜 모르는 체 하죠?"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못 봤어요. 봤으면 제가 모르는 척할 이유가 없죠."
그녀는 월요일 아침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날은 남편 차도 없어 지각하기 십상인데 버스가 안 와서 불안했고 웬만한 건 눈에 안 들어왔다는 것이다.
웬만한 거라니? 내가 1미터 80의 거구인데 웬만한 거란 말인가? 혹시 이 여자, 눈이 안 좋은가?
내가 물었다.
"위라이, 눈 좋아요?"
"예, 좋아요."
환장하겄네! 왜 이러냐? 눈 좀 나쁘다고 하지.
다시 물었다.
"요새 무슨 일 하죠?"
"자동차부품공장에서 검사 했어요."
"눈으로 검사?"
"아뇨. 현미경으로."
"그래 눈 괜찮아요?"
"아뇨. 아프고 어지러워서 그 회사 그만두었어요."

나는 옳다 됐다! 하고 결론을 내버렸다.
일 때문에 눈이 나빠졌고,
눈이 나빠져서 나를 못 보았다고.

그걸로 끝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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