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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IMF 삭풍과 대한민국판 누벨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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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IMF 삭풍과 대한민국판 누벨바그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탈근대 영화를 사유하는 법

I. 1958년 무렵의 프랑스

지난 여름, 옛 허리우드 극장에 있는 서울 아트시네마에서는 7월 30일부터 8월 29일까지 "2010 시네 바캉스 서울 - 매혹의 아프로디테"라는 주제를 내걸고 영화감독들이 좋아했던 유명한 여배우들의 영화를 특선으로 선보였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그리고 전공 공부에 시달리다 보니 현대 영화들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루이 말, 장 뤽 고다르, 마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프랑스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들은 특히 눈에 띄었다.

그것은 노마돌로지의 지식이나 탈근대의 철학자로 잘 알려진 질 들뢰즈가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영화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누벨바그(새로운 물결) 영화들의 대표적인 감독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와 <연인들>(1958),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 마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1975), 그리고 프랑스와 트뤼포의 <부드러운 살결>(1964)은 21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지구촌 영화들이 보여주는 느낌과 감각들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영화들이 만드는 영화 이미지의 새로운 느낌과 정서들을 이끌고 있다. 이것이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이 오늘날의 지구촌 세계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유이다.

▲ <미치광이 삐에로>
그렇다면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들뢰즈는 1948년 무렵의 이탈리아에서 탈근대의 현대적인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등장한 것처럼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근대 제국주의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일반인들의 억압적 삶"에 대한 관심이 탈근대의 현대적인 누벨바그의 영화들을 등장시켰다고 말한다.

근대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서사구조에 종속되어 있는 근대 장르 영화들에서 벗어나 노마드적인 개인과 관계적 삶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이 등장한 것은 1958년 무렵의 일본과 1968년 무렵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일본과 독일에서 이러한 영화의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처럼 승전국이든지, 혹은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일본과 같이 패전국이든지간에 제 2차 세계대전은 궁극적으로 근대 식민지 쟁탈전이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이탈리아와 일본 그리고 독일과 달리 1958년 무렵의 프랑스에서 영화관객들이 근대적인 국가와 가족의 국가주의와 가족주의의 정서와 느낌에서 탈근대의 노마드적이고 관계적 생성의 느낌과 정서로 이동하게 된 것은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영화 이미지를 조작하는 근대 장르영화들에 대한 환멸이다.

▲ <8월의 크리스마스>
그러면 도대체 16세기 르네상스부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식민지화 하면서 서구의 근대성을 창시한 나라들이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 이미지들을 통하여 근대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이성적 지식에서 벗어나 탈근대의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적 삶의 느낌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정서적 지식으로 나아가는데, 구소련의 변증법적 사회주의 장르영화와 미국의 헐리웃 아메리칸 드림의 장르영화들이 변화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구 근대성의 국가주의를 구소련이 사회주의의 저항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소비에트 연방국가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틀로 국가주의 선전의 장치로 영화를 이용하였고, 미국이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WASP)" 중심의 서구 근대성을 자유주의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연합국가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틀로 아메리칸 드림의 성전장치로 헐리웃 영화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패배하면서 맞이한 서구 근대성의 위기를 미소 데탕트로 해결하는 동시에 소위 러시아 백색주의를 중심으로 한 구소련과 백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이 신자유주의를 통한 냉전 이데올로기를 국가적 지배의 장치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II. 1998년 무렵의 대한민국

1989년 구소련이 스스로 붕괴되면서 러시아 백인 중심과 미국의 앵글로색슨 백인 중심의 냉전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던 서구 근대성이 붕괴되면서 그 동안 서구 근대성의 확산으로 만들어진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식민지적 근대성이 지니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로 유지되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의 근대 장르영화들이 붕괴하면서 탈식민지주의, 여성주의, 그리고 생태주의의 노마드적인 개인과 관계적 삶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로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1958년 무렵의 프랑스적 상황이 1990년 무렵의 동유럽 국가들과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그리고 남아프리카와 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와 미국의 영화들에서도 목격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 유럽의 나라들에서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과 동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을 포함한 비서구 지역들에서 보여주는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은 조금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들이 남성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의 근대성이 지니는 파괴적 억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비서구 지역의 탈근대 영화들은 서구, 백인 중심주의의 식민지성이 지니는 파괴적 억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근대성은 곧 비서구의 식민지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구 근대 세계체제는 비서구 식민지 세계체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적 현상은 1998년 무렵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난다.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이 만든 제도적 민주주의의 확립과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에 확산된 서구적 국가제도의 거대화와 경제체제의 확립을 통한 서구 선진국으로의 진입이라는 환상은 IMF 구제금융사태 국가부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총과 칼로 국민을 학살하면서 정권을 잡은 전두환 파쇼정부는 물러났지만,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문민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국민의 피와 땀으로 만든 근대국가 대한민국을 국가부도의 파산으로 만들면서 각각의 개인과 소수자들, 즉 여성과 빈민 그리고 노동자들을 국가의 노예로 만드는 근대국가의 파시즘적 체계는 더욱 강화시켰다.

소위 들뢰즈가 1958년 무렵의 프랑스적 상황이라고 말한 근대 국민국가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민중의 억압적 삶"에 대한 관심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젊은 영화 예술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1998년은 비록 <타이타닉>이나 <아마게돈>, 혹은 <사랑과 영혼>과 같은 헐리웃의 근대적인 영화가 흥행순위 1, 2위를 오르내렸지만,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이정향 감독의 <미술관 옆 동물원>(1998) 등등은 이미 단편영화로 등장했거나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등등의 수많은 탈근대의 현대적 영화감독들과 더불어 이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하면서 새로운 정서와 느낌을 토대로 한 탈근대의 지식과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 <공동경비구역 JSA>
개인적으로 탈근대성이라는 측면에서 1998년 이후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영화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과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을 들고 싶다.

<공동경비구역>에 등장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인민군 중사 오경필(송강호 분)과 전사 정우진(신하균 분),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군 병장 이수혁(이병헌 분)과 일병 남성식(김태우 분)은 모두 상호 생성적인 관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노마드적 존재들이다.

특히 이들의 즐겁고 생성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한반도의 두 국가로 존재하는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중립국 스위스군의 소령 소피 장(이영애 분)의 탈근대적 느낌과 정서로 다가오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일반인들의 억압적 삶"을 아주 잘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다.

<공동경비구역JSA>이 다른 지역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형성된 두 개의 국가관계를 서로 대립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상생적인 친구관계로 제시하듯이 <가족의 탄생>은 가족이 근원적으로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지배적이거나 억압적인 상하의 수직관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누이나 친구, 혹은 연인의 상호 동지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오누이인 미라(문소리 분)와 형철(엄태웅 분)의 관계 누나와 동생, 혹은 남성과 여성의 서열구조나 지배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딸과 엄마의 관계를 구성하는 선경(공효진 분)과 매자(김혜옥 분)의 관계도 또한 나이의 서열구조나 지배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애매모호한 오누이와 모녀관계는 연인관계로 등장하는 경석(봉태규 분)과 채현(정유미 분)의 친구관계처럼 또 다른 각각의 노마드들이 지니는 "사랑과 스캔들과 비밀"로 가득하다.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구성하는 관계의 끈은 근대 가족주의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연인이라는 상호 동지적인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의 정신분석이나 과학적인 문학비평에서 자주 애용하는 "아버지-엄마-나"라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구조는 가족 구성원들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 생성적인 가족을 근대적인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배와 피지배의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구조로 정착시키려는 근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다.

▲ <가족의 탄생>
III. 근대적인 사진적 사유에서 탈근대적인 영화적 사유로의 이동

문제는 1948년 무렵의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1958년 무렵의 프랑스로 이어져 1998년 무렵의 대한민국으로까지 나아간 탈근대의 현대적 영화들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근대의 고전적인 영화들과는 달리 근대적인 사진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근대의 문학비평에서 시작하여 근대의 고전적인 영화들까지 확장된 근대의 비평적 해석학은 시나 소설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나 비언어적인 기호를 영화의 변화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고정된 상징이나 은유 혹은 환유로 해석한다.

이러한 근대의 비평적 해석학은 마치 프란츠 카프카나 마르셀 푸르스트의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의 언어를 사유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의 지구촌 세계에서 횡행하는 탈근대의 현대적 영화들을 해석할 수 없다.

근대의 고전적인 영화들과 달리 탈근대의 현대적인 영화들은 고정불변의 사진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대의 비평적 해석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영화 이미지들이 전달하는 새로운 연인관계나 친구관계의 관계적 기능을 발견하고, 그러한 새로운 관계적 기능이 생성적이고 생산적인 또 다른 관계들을 끊임없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적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러한 관게적 기능과 개념을 토대로 나와 우리의 생성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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